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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남난희의 느린 산] 등산 대신 '입산' 하니 산이 보이더라

白馬 2024. 4. 25. 06:23

 

불일 가는 길
아침마다 수행하듯 산책하듯 산길을 거닐다

 

 

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하동 불일암에서 본 광양 백운산 줄기.

 
 

서울 떠난 지 31년이 지났다. 이곳저곳 다니며 살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온 지 22년이 흘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곳에 가장 오래 산 곳이다. 도시에서 등반가로 산을 다닐 때에는 주로 북한산과 설악산만 다녔다.

그 산들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요소의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암벽등반, 리지등반, 빙벽등반일 텐데. 어쩌자고 그런 것들만 산의 전부인양 폼 잡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오르는 산을 그만두고, 아예 산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의 산이 ‘등산’에서 ‘입산’으로 바뀌는 기회가 되었다.

 

쌍계사 입구의 ‘쌍계 석문’.

 

산에 들어와서 알았다. 그동안의 산은, 산의 일부였다는 것을. 세상의 거의 모든 소식(특히 산악계 소식)을 끊고 은둔하듯 살며 주변의 낮은 산들과 일상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목적이 있었던 산길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왔다.

 

나는 허물을 벗고 좀 더 자라듯이 산을, 자연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당장은 아니었겠으나 서서히 오르고자 하는 욕심은 사라졌다. 그냥 산에 스며들듯 오르내림에 경계 없이 그냥 산 안에 들었다. 아! 좋았다.

그렇게 주변의 산을 오르다가 중간에 내려오기도 하고, 내키면 아예 자리 잡고 멈추기도 하고, 뭐 올라가도 좋고. 대신 사물을 살피고 말을 걸고 감탄하고 감사해하는 나를 발견했다.

 

불일폭포 가는 길의 암자인 불일암.

 
 

멧돼지와의 약속 이후 평화로웠다

불일佛日은 이곳에 온 후로 매일 오르는 길이 되었다. 별일 없는 한 나는 먼동이 트면 불일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에서 왕복 9km로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거리다. 동네를 벗어나서 사찰을 지나면 곧 바로 산길이 시작되고 약간의 흙길과 돌길로 이어진다.

경사는 조금 있지만 비교적 편한 길이며,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어 조용해서 좋다. 항상 혼자지만 그 길을 오를 때는 온전하게 자연과의 시간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기도의 시간인 동시에 명상의 시간이고, 어제 일을 돌아보고 오늘 일을 계획하는 시간이다. 온갖 생각이 오가기도 하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기도 하다.

 

작은 석문을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소박한 돌다리가 있다.

 

가장 큰 감정은 감사다. 보이는 사물 느끼는 모든 감정이 그랬다. 처음에는 어둑할 때 집을 나서서 산에 들어가면 멧돼지와 자주 마주쳤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산은 아직도 그들의 무대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과 약속(?)을 했다. 나도 30분쯤 늦게 올 것이니 너희들도 좀 빨리 가달라고. 실제로 듣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이후 우리는 각자 평화로웠다. 

집을 나서고 동네를 지나 쌍계사 동구洞口 커다란 바위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로 알려진 ‘雙溪쌍계’와 ‘石門석문’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서 양쪽에 문처럼 있다. 그 문을 통과해서 조금 오르면 경내이다.

나는 쌍계사를 그냥 지나쳐서 곧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예전에는 흙길이었지만 이제는 나무계단을 만들었다. 조금 올라가면 국사암 갈림길이 나온다. 2년 전까지 나는 국사암을 거쳐 올라왔지만 갑자기 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쌍계사로 다녀야 했다.

 

매일 산책길에 만나는 바위 친구. 잘 생긴 남자 얼굴 옆모습을 닮았다.

 

국사암에는 쌍계사 창건 당시 진감선사가 심었다는 1,200년을 살아낸 어른 나무가 계신다. 어른 나무에 인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지나며 꼭 인사하는 몇 대상이 있다. 국사암 갈림길을 조금 지나 올라가다보면 진감국사 부도탑비가 길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하는데, 매일 들르지는 않고 목례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산길의 반쯤에 ‘환학대喚鶴臺’라는 약간 기운 큰 바위가 있다. 최치원이 학을 타고 오갔다는 설이 전하는 곳이다. 안내판도 있고 쉬는 의자도 있다. 조금 더 오르면 내 친구가 나를 반긴다. 자연 바위로 잘생긴 사람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그 자세 그 표정으로 계절이 가든 꽃이 피든 눈이 오든 그냥 그럴 뿐인데, 내가 친구로 삼아버렸다. 잘 생겼기 때문이다.

 

1200년을 살아낸 어른 나무. 쌍계사 창건 당시 진감선사가 국사암에 심었다고 한다.

 

그와 인사를 하고 계속 오르면 원숭이바위다. 내가 보기엔 간디처럼 생긴 바위인데 최근에 친절하게도 원숭이바위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다리를 건너면 계곡 가운데 부처님 옆모습을 한 바위가 있다. 나는 그에게 합장 인사를 한다. 나만의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저것 고하기도 하고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알리기도 한다. 고백도 하고 자랑도 하고, 어디 먼 길을 갈 때는 안전을 부탁한다.

조금 더 오르면 마족대馬足臺가 나오는데 바위에 말 발자국이 찍혀 있어서다. 자세히 찾아봐야 보이는데 낙엽이 덮고 있을 때도 많다. 이곳을 지나쳐서 오르면 계곡을 건너는 돌다리가 나온다. 돌다리 직전에 작은 석문石門이 있다. 희한하게도 이 석문을 지나면 다른 세상이 된다. 아랫동네의 모든 것이 문이 닫히듯 한다. 세속의 풍광도 소리도 차단된다. 산들이 겹치며 흘러내리고, 아래 세상을 감춰버린다. 여기서부터는 실로 별천지다.

 

지리산 불일폭포

 

불일폭포에 나타나는 독특한 무지개

예부터 신선 사상의 전형적 공간이라는 지리산 청학동을 이곳 불일평전佛日平田과 불일폭포 부근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쌍계사 아래 석문은 큰 문이고 이곳의 석문은 진짜 석문이 아닐까? 늘 이곳에서 허리 숙여 합장 인사를 한다. 이제 호리병 속에 들어온 것이다.

곧 불일평전이다. 지리산에 몇 곳 있는 평전 중 하나로 산 속에 넓은 평지가 있다. 평전은 볕이 잘 들어서 따스하고 평화롭다. 예전에 평생을 이 평전을 가꾸고 지킨 변규하 선생은 가시고, 거의 폐허로 있다가 최근에 쌍계사에서 초막을 짓는 중이다.

불일평전은 변 선생이 살아생전 탑을 쌓고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산중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가고, 나무는 자랐다. 숲이 짙어져 평전은 점점 좁아졌다. 예전에 여기서 조망되던 노고단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불일폭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무지개. 방긋 웃는 모양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밝아진다.

 

그래도 그가 심은 나무에서 철철이 꽃은 피고 지고, 때로는 베여 없어지기도 하며 세월은 흘러간다. 평전에는 초막뿐만 아니라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화장실과 취사실과 쉼터들이 있다. 지금은 누구도 이곳에서 야영하지 않지만, 과거엔 공식적으로 취사와 야영이 되는 곳이었다.

이제 폭포로 갈 것이다. 불일폭포는 비교적 접근이 쉬워서였을까? 옛 문인 묵객들이 풍경 감상과 많은 여행기로 예찬했던 곳이다. 불일폭포 아래 소沼에서 용이 승천하며 청학봉과 백학봉이 생겨나고 그 사이로 폭포가 흐른다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불일폭포에 소가 없다.

폭포는 계절마다 매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매일 매일이 찬란하다. 봄이면 양쪽 벽으로 꽃들이 피어나 화엄세계가 되고 비라도 많이 올라치면, 폭포수는 거의 산을 삼키듯이 쏟아져 내린다.

 

신라시대 최치원의 전설이 깃든 환학대

 

비가 갠 아침에는 불일만의 무지개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슨 현상인지 나는 알지 못하는데 불일 무지개는 보통의 타원형이 아니라 반대의 타원형이다. 한 번은 공처럼 동그란 무지개를 보기도 했다. 폭포수의 어떤 물방울과 햇볕의 조화일 텐데 인간인 나는 그냥 감탄할 뿐이다.

그외에도 신기한 것은 무수하다. 지난해에는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역사적 가치와 빼어난 풍광이 있는 자연유산으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나야 별 상관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연에 손을 대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침 산책 치고는 가볍지 않은 산길 9km를 매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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