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자들의 이야기
헬기에서 내려온 구조대원이 유모씨를 구조하고 있다.
등산사망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꼭 모든 등산사고가 사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살아난 사람들이 있고, 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경각심을 주어 다른 조난사고를 예방할 수 있고, 살려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뜻한 감동을 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본다. _ 편집자
“두 번이나 연기된 것은 어쩌면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2023년 5월 13일 유씨는 지인 한 명과 함께 안내산악회를 통해 소백산을 찾았다. 두 번이나 비 때문에 연기됐던 산행이었기에 기대감이 더 컸다. 소백산은 높지만 비교적 완만한 육산이라 도전해 볼 만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산행 초보라고 낮췄으나 그래도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 많으면 두 번씩 꾸준히 산행한 경험이 있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리산과 청계산, 관악산 등 결코 동네 뒷산 수준은 아닌 산들을 주로 올랐기에 소백산이 무리한 선택은 아니었다.
안내산악회 버스는 오전 6시 50분 서울 사당역을 떠나 10시 15분 어의곡에 도착했다. 유씨는 지인과 함께 산행을 시작해 12시 30분 비로봉에 도착해 인증사진을 찍은 뒤 점심을 먹으며 다시 곧장 어의곡으로 되돌아갈지 국망봉과 상월봉을 거쳐서 갈지 고민했다. 이왕 소백산에 온 김에 더 가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들어 국망봉으로 향했다. 오를 때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2시 40분, 국망봉을 약 500m 남겨두고 갑자기 몸에 이상 증세가 찾아왔다.
“먼저 호흡 곤란이 왔었어요. 이전에도 약간 비슷한 증상이 있었지만 잠시 앉아 쉬면 괜찮아지곤 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날은 괜찮아지긴커녕 호흡이 갈수록 가빠지고 왼쪽 다리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러다가 이어서 오른쪽 다리까지 쥐가 나고요. 안내산악회 버스가 오후 5시 출발 예정이라 빨리 회복해서 가야 되는데 몸이 자꾸 나빠지니까 정신상태가 요즘 말하는 ‘멘붕’에 이르렀습니다.”
유씨는 결국 아예 누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경련은 종아리와 허벅지 전부를 뒤덮었다. 특히 왼쪽 종아리 경련은 엄청난 통증까지 유발했다. 정신없는 상황에 안경을 떨어뜨려 안경알이 빠지고 테는 휘어졌다. 젖은 땅에 누운 탓에 저체온증까지 와서 손발과 입술까지 덜덜 떨렸다.
119에 구조 요청을 하려는데 산속이라 그런지 통화가 쉽지 않고 배터리도 뚝뚝 떨어졌다. 전화가 연결돼서 위치를 알려줘야 하는데 생각보다 산에서 정확한 위치를 말해 주기가 어려웠다.
유모씨 지인이 촬영한 구조 현장.
등산지도앱 필수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를 살린 건 지나가는 등산객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등산객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초콜릿과 이온음료, 핫팩도 주셨죠. 특히 한 부부와 처제라 들은 세 분이 한 시간 가까이 계속 머무르며 간호해 주셨어요. 저체온증이 곧 올 거라면서 여분의 옷을 꺼내서 입혀 주고, 경련이 온 다리를 계속 주물러주셨죠.”
119 구조 요청도 다행히 잘 접수됐다. 한 시간 뒤 구조헬기가 도착했다. 도와주던 등산객 중 일부가 능선으로 나가 색깔 있는 옷을 흔들어 헬기를 유도했다. 유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돼 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갑자기 쓰러진 걸까?
“지병도 없고 혈압이 조금 높긴 하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산행하면서 김밥도 먹고 과일, 사탕 등으로 영양보충도 충실하게 했고요.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요인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하나는 오버페이스입니다. 안내산악회 특성상 제한 시간 안에 내려와 버스까지 가야 한다는 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어요. 또 동행한 지인이 산을 좀 잘 타는 분이라 그분한테 페이스를 맞췄는데 그게 좀 벅찼던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심리적 요인입니다. 2022년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등산도 사실 그 일을 잊기 위해 많이 다니게 됐거든요. 마음이 안 좋은데 무리하니까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아요. 평소 산을 좀 안다고 기고만장하고 다녔는데 산에서 죽음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유씨는 이 사고를 산의 경고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는 “앞으로 좀 더 겸손하게 산을 다니기로 했다”며 느낀 점을 말했다.
“안내산악회는 체력이 충분하거나 경험이 풍부하신 경우에만 이용하세요. 저도 경험이 더 있었다면 국망봉으로 가지 않고 바로 어의곡으로 하산하는 결정을 했을 거고, 그럼 이런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절대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산행하셨으면 합니다.
또 하나는 119신고 앱이나 산행지도앱을 꼭 설치하고 산에 가시기를 추천해요. 일반적인 지도 앱은 산에서 정확한 위도, 경도 정보를 잘 알려주지 못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저를 도와주신 부부와 처제분이 이 기사를 보신다면 꼭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저를 그렇게 챙겨주시고 난 뒤에도 저와 동행했던 분이 안내산악회 버스를 놓치자 역까지 태워주셨다고 해요. 그때도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말씀을 안 해주셨다는데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덕유산 육구종주는 육십령부터 구천동까지 약 31km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걸음이 빠른 사람들은 12시간 내외로 하루에 일시종주하기도 하지만 보통 삿갓재대피소를 이용해 1박2일로 산행한다.
2023년 2월 27일 육십령에 선 우 모씨도 1박2일에 걸쳐 바로 이 육구종주를 해보려고 했다. 그는 2022년 여름부터 등산을 시작해 소위 ‘코로나시기에 등산을 시작한 MZ 등린이’였다. 지리산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에 당연히 덕유산 종주도 손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요. 육십령에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했는데 저희 수준을 생각하면 더 이른 시간에 시작해야 됐어요.”
우씨는 블로그에 적힌 등산 후기들을 참고해 계획을 짰다. 검색해 보니 한 산악회에서 종주 갔을 때 회원들에게 나눠주는 안내서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 길 안내 및 각 구간별 소요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9시 30분에 출발해도 충분히 삿갓재대피소까지 갈 수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육십령에서 할미봉으로 오른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5~6구간 정도 고정로프를 잡고 오르는 급경사 구간이 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 걸려 할미봉에 도착했다. 에너지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정상에서 하나를 전부 다 먹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 다음 난코스라는 할미봉~서봉 구간에 임했다. 힘들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 되니까 나중에는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서봉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그때 이미 거의 17시가 된 참이더라고요. 여기서 삿갓재대피소에 전화하니까 ‘서봉에서 대피소까지 4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속도면 대피소까지 오는 건 무리’라면서 아이젠과 랜턴이 있는지 묻더라고요. 아이젠은 있지만 랜턴은 없었죠. 해가 지기 전엔 대피소에 도착할 것이라 믿었어요. 그러니까 남덕유산으로 가서 하산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문제는 아이젠이었다. 발바닥 전체를 덮고 고정되는 아이젠이 아니라 밴드 형태로 돼 등산화 중간에 착용하는 아이젠을 챙겨간 탓에 걸으면 걸을수록 헐거워지고 아예 발에서 빠지곤 했다. 속도는 갈수록 느려져 남덕유산에 도착하니 18시 30분이었다.
남덕유산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다.
너무 무거운 짐이 근본적 원인
“물도 다 떨어지고 체력은 바닥인데다 무릎은 시큰거리고 더 이상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정말 막막해서 어쩌면 산에서 비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덕유산에 도착해서 결국 119에 조난 신고를 했습니다. 119 구조대원과 영각탐방지원센터 직원 분이 남덕유산 쪽으로 올라갈 테니 저에게 그 방향으로 하산하라고 하더군요.”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어둠이 내린 산에서는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20시 30분, 드디어 탐방지원센터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물도 주고 가방도 들어주며 무사히 하산을 유도해 주며 여러 조언을 들었다.
“블로그 정보를 보고 계획을 세웠다가 실제와 다른 상황을 만나 조난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참고한 자료를 말씀드리니 그건 숙련자들에게 해당한다며 계절별, 날씨별로 산의 상황이 다르니 탐방지원센터에 문의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등산하는 능력이 달라 덥석 후기를 믿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서봉에 도착해 확인한 등산지도. 탐방소요시간은 계절별, 개인별 편차가 엄청 크다는 걸 절감했다
조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씨는 “종주를 할 만한 경험도, 체력도 없었고 출발시간이 늦었던 것도 문제였다”면서 “가장 큰 이유는 짐이 너무 무거웠다. 대피소에서 잘 걸 생각해서 버너, 식량, 여벌 옷 등 짐이 많았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메고 등산한 것이 처음이어서 그렇게 빨리, 쉽게 지칠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체력에 자만하지 않고 항상 안전에 유의하면서 다녀요. 높은 산을 몇 번 올라갔다 왔다고 등산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더라고요. 만약 저처럼 초보인데 종주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먼저 그 산에 익숙해지도록 몇 구간을 먼저 등산해 본 뒤 종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할미봉만 올라갔다가 하산하고, 다른 날엔 서봉을 갔다가 하산하는 식이죠.
조난당하고 난 뒤 산이 무서워서 등산을 더 이상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좀 마음이 회복되어 다시 등산을 다니고 있어요. 힘들지 않고, 이미 올라봤던 산이라도 언제나 안전하게 천천히 오릅니다. 차갑고 시원한 맑은 공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발걸음에 힘과 생기가 돋는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 다시 산을 찾게 됐어요.”
남덕유산 가는 길의 등산로.
★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