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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지리산 잔설 뚫고, 봄이 빼꼼 고개 내밀다 [남난희의 느린 산]

by 白馬 2025. 4. 11.

봄을 기다리는 마음
화개장터 지나 악양까지 섬진강길을 걷다

 

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섬진강의 작은 배. 수심이 얕아 작대기로 땅을 밀어서 강을 건너는 방식이다.

 

새들의 움직임과 소리가 부산해진 지 한참 지났는데, 날씨는 여전히 겨울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봄은 유난히 게으름을 피우며 오기를 주저하고 있다. 자연에서 살게 되면서 계절에 많이 민감해진 덕분인지, 아직 추위가 풀리기도 전에 새들이 신 새벽부터 부산하게 재재거리면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면 계절을 앞서가는 선머슴처럼 봄을 찾아다닌다. 주변에 조금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있어서 수시로 그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그동안 시기가 어긋난 적이 많지 않았는데, 올해는 몇 번을 갔다가 허탕 치고 오기를 계속했다. 어디에 어떤 꽃이 빨리 피는지는 나만 알고 있는 곳도 몇 곳 있다.

유난히 일찍 꽃을 피운 소학정 청매화. 

 

아직 다른 꽃이 피기 전, 잔뜩 기대를 하고 나만의 비밀 장소로 간다. 추위에 떨고 있는 연약하지만 수줍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몇 송이 꽃을 만나면, 감동 받고 감사해 한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꽃나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베어져 사라졌거나, 공사로 인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 소용으로 심겨지고 베어지는 것이겠지만, 돌아오는 길은 몹시 허탈하다. 나만의 비밀 장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올해는 그나마 봄이 늦어지는 바람에 계절을 앞서 꽃을 찾아다닌 느낌이다. 꽃을 빨리 볼 수 있는 산을 산행지로 잡아놓고 미루기를 몇 번 했다. 꽃은커녕 눈만 쌓여서 녹지도 않고 또 눈이 와서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남쪽 지방에선 드문 일이다.

섬진강에서 본 산과 하늘.

 

‘첫 매화’ 만나러 가는 길

하는 수 없이 나는 땅을 유심히 내려다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겨울을 버틴 풀 중에는 성질 급한 아이들이 있어 그들이라도 봐야겠기에 풀이 있는 땅을 유심히 살피는데, 하나 둘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녀석들이 있다.

가장 먼저 개불알꽃이 청보라색으로 눈이 부시다는 듯 실눈을 뜨고 세상을 살핀다. 뒤질세라 광대나물꽃이 진분홍을 자랑하며 나팔처럼 고깔처럼 깨어난다. 나는 반가움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들과 눈을 맞추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봄은 이렇게 오고야 마는 것이다.

산의 꽃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기에 섬진강가로 발길을 돌린다. 행여 그곳은 강바람이 봄을 몰고 와 있으려나? 하지만 역시나 아직이다. 섬진강은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양쪽에 두고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지나 경상남도 하동에 이르는데, 구례군을 지나며 강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남해 바다에 이른다.

화개장터에서 악양으로 이어진 강길에는 대나무숲과 차밭, 매실밭을 지난다.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 쪽에는 자전거 도로가 뚫려 있어서 꽃철이 되면 수많은 자건거족들의 라이딩 성지로 손꼽힌다. 경상도 쪽은 화개장터부터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걷기길은 주로 시멘트 포장과 나무 데크로 만들었는데, 여름마다 큰물이 들면 데크길은 수시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이 아닌 것은 자연을 이길 수 없어서일 것이다. 

식생도 큰물이 질 때마다 바뀌는 것 같다. 예전에 볼 수 없던 풀들이 많이 자란다. 재미난 것은 강 주변에 야생갓이 많아서 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가끔 잎을 따서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 맵싸한 것이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어느 해 누군가에게는 섬진강 야생갓이 돈벌이로 보였을까? 씨가 마르도록 캐 가는 바람에 한동안 갓 구경을 하기 어려웠다. 

소학정 홍매화.

 

그런데 자연이란 참으로 위대해서 한 해 큰물이 지고 난 후 다시 갓이 강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화개장터에서 악양까지 강길은 찻길을 조금 벗어나 강을 가깝게 끼고 걷는 길이다. 혼자 기척 없이 걷다보면 꿩 가족이 숲에서 “푸드득 꿩꿩”하며 요란한 소리로 날아올라 몇 번을 놀라기도 했다.

그들도 놀랐겠으나 매번 놀라는 내가 우스워 혼자 허허 웃는다. 길에는 찰랑거리는 강물과 차밭과 매실 밭과 대나무 숲과 여러 풀과 야생갓이 있다. 길을 살짝 벗어나 강의 모래밭으로 갈 수도 있다. 가끔의 쉼터도 있어서 소풍으로 하루 놀기 좋은 곳이다.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물비늘을 보며, 아직 떠나지 않은 철새들을 보며, 눈 쌓인 먼 산을 보며, 겨우 피워낸 풀꽃을 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을 보며, 싱싱한 야생갓을 보며 걷는 재미도 좋다.

봄을 기다리며 차분히 흘러가는 섬진강.

 

가끔 수리 매가 머리 위를 선회하다가 강가의 모래톱에 앉는다. 그 모습이 우람하고, 날갯짓은 우아하다. 간단히 싸온 도시락을 먹고, 야생갓 몇 잎을 따서 배낭에 챙긴다. 벌써 알싸한 향기가 코에 배이며 침이 고인다.

아무리 추위가 풀리지 않았다고 해도, 한낮에는 그 힘을 잃어서 겉옷을 한 겹씩 벗는다. 곧 이 길에도 매화가 피고, 벚꽃이 피며 화려한 강길이 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배꽃, 찔레꽃, 조팝꽃, 아카시꽃 같은, 더 많은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중의 으뜸은 물론 ‘첫 매화’겠지만 벚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질 때, 꽃잎의 무게로 꽃가지가 길에까지 뻗어와 손으로 잡힐 듯할 때, 그리고 꽃비가 난분분할 때 이 길은 환상이겠다.

잠시 생각했다. 만약 벚꽃에도 향기가 있다면? 상상 불가능이다. 그 무수한 꽃에서 향기가 난다면? 개인적으로는 벚꽃에 향기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 많은 각자의 꽃들에서 향기를 풍기면 세상은 질식하지 않을까? 자연은 정말 위대해서 무수한 화려함에 향기를 주지 않은 것이다.

산행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편안한 강길이 휴식처럼 이어진다.

 

대신 매화의 향기는 얼마나 수수하고 은은하고 감미로운지. 날씨가 풀리고 이 길을 걸을 때를 생각한다.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강가에라도 내려가 맨발로 모래와 자갈을 밟아보고 섬진강물에 발이라도 담가 본다면, 내가 물수제비를 띄울 줄 알던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편안히 걷다보면 어느새 악양 입구로 접어든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강이다. 봉순이 빠져 죽은 강. 그 입구에 섯바위가 있다. ‘삽암’이라고도 하는데 꽂힌 바위라는 뜻이다.

싱싱한 야생갓.

 

산에서는 고소성이 삽암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섯바위 오기 전에 작은 배 한 척이 강가에 떠있기는 했다. 강폭이 넓고 수량이 얕아서 줄 배도 아닌, 노를 젓는 배도 아닌, 작대기로 강바닥을 눌러가며 전진하는 배였다.

이제 평사리공원으로 접어든다. 평사리공원은 강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모래톱이 유난히 넓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야영장도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강 건너 소학정의 철 이른 매화를 만나고 가야겠다.   

악양 입구로 접어드는 길의 섯바위. 꽂힌 바위라고 하여 ‘삽암’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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