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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남난희의 느린 동네 옆 산, 황장산] 지리산에 가린 산, 그래서 호젓한 산

白馬 2024. 6. 28. 06:53

948m짜리 동네 옆 산


화개장터 들머리로 황장산을 올랐다

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황장산에서 본 하동군 화개면 일대.

 

오늘은 옆 산으로 가볼까 한다. 옆 산이라고는 하나 역시 지리산 자락이다. 반야봉을 시작으로 삼도봉을 거쳐 불무장등과 통꼭봉을 찍고 황장산을 넘어 촛대봉을 지나 결국은 섬진강에 풍덩 빠져버리는 능선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되는 능선이다.

동네 옆 산이지만, 해발고도가 거의 0에서 시작해서 1,000m 가까이 오르는 산길이다. 결코 만만한 길은 아닌 것. 그래서 간단한 도시락도 준비하고 스틱도 챙긴다. 매일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습관으로 불일폭포만 다녔다. 그렇다 보니 가끔 그곳에서 만나야 할 대상이 있는 시기에 다녀오곤 한다. 주로 진달래가 필 때나 흙길을 걷고 싶을 때 간다.

 

황장산 등산로 초입의 왕대나무숲.

 

시작은 화개장터다. 지금의 화개장터는 관광객을 위해 새롭게 조성된 곳으로 행락철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상품은 지역 특산물도 있지만 전국 관광지 어디에나 있는 물건이다. 그야말로 있는 것은 다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장터다. 원래 화개장터는 승용차 10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되었다.

 

그 유명한 화개장터의 터가 너무 좁은 것이 놀랍지만 지금과는 시절이 달랐다. 그만한 터에서도 장이 서고 섬진강으로 배에 실려 온 온갖 물건과 해산물이 산 넘어온 산채와 약초 숯과 교환되거나 팔렸던 것이다. 

옛 화개장터 초입에 황장산 등산 안내판이 있고 곧 급경사가 코앞을 막는다. 얼기설기 계단을 만들어 두었지만 오래되고 정비도 하지 않아서 망가져 있다. 경사가 너무 심해서 로프도 설치해 두었지만 이 또한 낡아 있다.

 

원래 화개장터는 이토록 소박한 터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었다.

 
 

화개장터의 잊혀진 등산로

이곳은 등산로는 있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쩌면 유명한 등산로가 아니고 무엇보다 전망이 별로 없는 능선이다 보니 등산객이 별로 없다. 그나마 지리산 주능선이 입산 통제에 들어가면 간혹 산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능선 중간쯤인 당치까지는 국립공원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급경사 양쪽으로 비교적 굵은 왕대나무와 그 사이로 키 작은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숨 가쁘게 조금 오르면 인공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 또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망가져가고 있다. 그나마 이곳에서 조망되는 섬진강과 백운산 그리고 화개장터는 자라난 나무들에 가려 조각난 풍경이 되어버린다.

 

지금의 화개장터. 과거와 비할 수 없이 커졌다.

 

경사가 조금 수그러들며 동네 야산처럼 산소와 밤나무들이 있고 길 양쪽으로는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로 비닐 끈이 길게 쳐있다. 더 오르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주변 모든 나무에 비닐을 둘러 알 수 없는 숫자를 표기해 놓았다. 굳이 비닐로 나무 둥치를 감아 두었는데 보기 불편하다.

한동안 주변 나무는 소나무로 바뀐다. 흙길에 떨어진 솔잎을 밟으며 오르는 길은 폭신한 흙길이라 기분이 좋아진다. 순하고 포근한 길을 오르다 보면 무너진 돌담이 있다. 아마 예전에는 성터였을 텐데 이제는 방치된 채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웃 악양의 고소성은 다시 복원되어 번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어쩌자고 이곳의 성터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아마 고소성과 같은 시기의 성터로 섬진강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감시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산행 중 만난 오소리굴.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국시대로 보는 측과 가야로 보는 측이 있다고 한다. 군데군데 무너진 석축이 있고 더러는 산소 축대로 뽑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연한 초록에서 진한 초록으로 낮은 산의 산색은 변해가고, 땅 꽃들이 주변을 환하게 한다.

실은 이 능선은 진달래 능선으로 진달래가 필 때면 그야말로 화엄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그때쯤 나는 진달래를 만나러 그 능선에 가고는 했는데 올해는 어쩌다 보니 놓치고 말았다. 이제 진달래꽃은 지고 없고, 잎만 초록초록 하며 반짝인다.

처음 이곳에 이사 와서 무엇이든지 시도해 볼 적이었다. 진달래꽃으로 두견주를 담으면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루는 날을 잡아 이 능선에 올라왔는데, 그야말로 온 산이 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많은 진달래꽃을 어디부터 딸까 하며 한 꽃에 눈을 주는 순간 꽃이 나를 보고 “화안”하게 웃는 것이다.

그래서 그 꽃은 도저히 딸 수 없어서 다음 꽃을 보는데, 역시 나를 빤히 보고 활짝 웃고 있는데 어떻게 딸 수 있단 말인가? 몇 번을 더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 생명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꽃에도 각자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꽃도 말을 한다는 것을.

삼신마을 지킴이 바위.

 

경치 없으나, 홀로 우뚝한 948m 산

예전에는 ‘큰재’였는데 어느 날 ‘작은재’로 바뀐 곳.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는 지점에 왔다. 지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안내판 때문이다. 전라도에서 처음 나무 안내판을 걸었다. 그러자 경상도에서 뒤질세라 같은 판을 그 옆에 새웠다.

서로 타협해서 하나만 세웠다면 좋았을 것을, 거기다가 둘레길 안내판까지 있으니 좁은 산길에 안내판이 세 개나 된다. 이 능선에서 둘레길 이외에는 피아골 쪽으로는 내려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화개 쪽으로는 급경사인 곳이 대부분이다. 

 

산길에서 만난 다소곳한 붓꽃.

 

삼신마을 위 능선에는 동네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우뚝한 바위가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바위에서 동네가 잘 내려다보이도록 나무를 쳐주고는 했는데 어쩐지 숲이 차서 예전의 전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관심사도 변하고, 나무는 자라는 것이다. 그곳이 도시락을 먹으며 쉬는 곳인데 그럴 마음이 없어져서 내쳐 걸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덕분인지 산돼지 흔적이 유난히 많고 오소리 굴도 심심찮다.

황장산 촛대봉에 올라 도시락을 펼친다. 녹차 밥을 해서 주먹밥을 만들고 생야채 샐러드를 조금 싸왔다. 녹차 밥은 여름에는 잘 상하지 않고, 겨울에도 딱딱하게 굳지 않아서 산행 도시락으로는 그만이다.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느긋하게 만찬을 즐긴다. 전망은 없지만, 그래서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 아래 내 집이 있다.

 

이름처럼 바위에서 자생하는 바위취.

 

이제 황장산 오름길이다. 지리산의 큰 봉우리들은 대부분 천왕봉, 반야봉처럼 봉이라 명하는데 유독 산 이름을 얻은 황장산은 멀리서 보면 독립된 산처럼 우뚝하다. 날씨가 잔뜩 흐린 탓에 그렇지 않아도 전망이 없는데 더 그렇다.

황장산 정상에는 나무를 쳐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었는데 흐린 날씨 탓도 있지만 나무가 자라고 숲이 차서 날씨가 좋아도 전망은 어렵게 되었다. 이제 그동안의 오르막은 버리고 급경사 내리막이다.

황장산이 독립적인 산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인 당치까지의 내리막이 있을 것이다. 당치 이후는 국립공원 입산통제 구역이라 더는 능선을 따라 갈 수 없다. 피아골 쪽으로는 거의 능선 마을인 농평이라는 동네가 있고, 화개 쪽으로는 조금 내려가면 목통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나는 당연히 목통으로 내려갈 것이다.

목통은 으름나무를 이르는 말로 내려가는 내내 으름나무들이 있고 나무마다 꽃이 매달려 있다. 이렇게 하루 옆 산을 다녀왔다. 내려가면 나도 녹차를 따고 만들며 한동안 바쁠 것이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