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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낭만야영 고창] 청보리밭 초록색 물감에 '풍덩'

白馬 2024. 6. 25. 06:29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저녁 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1953년 윤용화가 작곡하고 시인 박화목이 작사한 노래 ‘보리밭’. 교과서에 실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본 가곡일 것이다. 이북 출신의 두 친구가 피란처에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한다.

 

 

보리밭으로 유명한 고창 학원농장 앞 유채밭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초록 물결일 일렁이는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가는 봄이 아쉬워 올해 마지막 꽃 산행을 준비하던 중 김혜연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저랑 자전거 캠핑 갈래요? 지금 아니면 못 가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자전거 캠핑의 달인인 혜연, 언제나 그랬듯 내가 거절할 수 없는 멋진 장소를 제안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 좋아!” 

나는 그녀에게 그곳이 어딘지 묻지도 않고 수락했다. 혜연은 무조건 좋다고 하는 나에게 신이 난 듯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전북 고창의 청보리밭이에요. 지금 가면 딱이래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가곡 ‘보리밭’이 반사적으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오~~리이바~~~~앝 사아~~~잇 길로오~~~~~ 걸어가며~~~~언”

 

고창 학원농장 앞 길을 지나가고 있다. 뒤로 보이는 초록빛 들판은 보리밭이다.

 

두 번째 문장에서 가사가 기억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40년 같이 산 남편한테 잔소리하듯 혜연이가 내 노래를 막았다. 

“이그~~ 내가 못 살아~ 또 시작이네! 또!!”

덕분에 상황극이 짧게 마무리됐다. 작년 말에 폴딩(접이식) 자전거를 장만한 막내 한예진도 섭외했다. 

“언니! 저 요즘 엄청 열심히 타고 있어요~!!” 

예진이의 자랑에 칭찬 한 스푼 떠먹여주고 약속을 잡았다. 평일 아침 가까스로 출근시간을 피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용화산에 다녀온 지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고창행 버스 짐칸에 폴딩 자전거 세 대를 실었다.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캐리어를 끼워 넣었다. 능숙한 혜연이 덕분에 자전거는 손상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전거에 캐리어 거치가 가능한 두 사람과 달리 내 자전거는 연식이 오래된 구형모델이라 부품을 구할 수 없어 배낭을 짊어진 채 자전거를 타야 한다. 사려 깊은 혜연이는 나의 무거운 촬영장비 등을 예진이와 자기 캐리어에 나누어 실었다. 덕분에 배낭을 메고 달리기가 한결 수월했다. 주행에 익숙한 혜연이가 앞장섰다. 아직 짐을 싣고 페달링이 버거운 예진이는 중간에 자리했다. 나는 틈틈이 사진을 찍으며 뒤따랐다. 등산할 때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는 뜨거웠다. 예진이와 나는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반면 틈만 나면 자전거 캠핑을 다니는 혜연이는 전동 자전거 타듯 오르막을 달려 올라갔다.

 

보리밭 안에 누워 드론을 띄웠다.

 
 

“저 녀석은 전생에 엄복동(자전거왕)이었던가!!?” 

앞서가는 혜연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답은 예진이 했다. 

“언니! 뭐라고요!? 저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온몸을 쥐어짜듯 비틀며 페달링하는 예진의 뒷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한적한 도로 20km를 달려 청보리밭에 도착했다. 벌써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와 경사구간이 많아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햇볕이 청보리의 비단결 같은 수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보리를 만졌다. 서걱서걱 이삭의 까실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광활한 청보리밭 사이로 길이 두 줄 나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예진이와 혜연이를 보리밭 안으로 들여보냈다. 잔잔한 호수 위를 가르며 헤엄치는 물고기 마냥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보리 이삭들이 일렁였다. 

눈부신 햇살에 잠시 눈을 감았다. ‘보리밭’ 노래가 입가에 또 맴돌았다. 처음에는 노래의 서정적 멜로디가 그저 좋다고만 생각했다. ‘와, 아름다운 선율인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딱이야!’ 그런데 가사를 따져보니 슬펐다. 그리운 감정이 뚝뚝 흘렀다. 혜연과 예진이 갑자기 쓸쓸해 보였다. 당시 전쟁 피란민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기는커녕 슬픔의 구덩이 속으로 더 파고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럴 뻔했는데, 두 사람이 웃긴 포즈를 취하는 바람에 그만 풉 웃고 말았다. 아, 내 곁에 그녀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아름다운 곳에서 이렇게 웃을 수 있어 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꿈에서 깼다.

 

보리밭에 들어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예진(왼쪽)과 혜연. 두 사람의 익살스런 포즈에 웃음이 나왔다.

 

캠핑장 꼬마에게 자전거 넘길 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보리밭은 아니지만, 이미 노란 꽃은 지고 푸른 유채 줄기만 무성했다. 꽃이 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포토존이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자전거 세 대를 나란히 세우고도 자리가 남았다. 꽃은 없었지만 무성한 초록이 예뻐서 끄트머리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나왔다. 

결국 다 돌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캠핑장까지 남은 거리는 약 20km. 해가 지기 전에 거기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미리 알아 둔 구시포캠핑장은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캠핑장까지 논스톱으로 달리기로 했다. 혜연이에게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했다. 그녀는 페이스메이커가 됐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질주했다. 잠시 후, 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허벅지는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예진은 뒤에서 계속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뒤돌아보았지만 배낭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오르막에 올라 예진을 기다렸다. 그녀는 여전히 흐느적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5미터, 3미터, 1미터. 그녀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구시포 캠핑장에서 본 노을. 캠핑장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운치가 가득했다.

 

“언니~ 저는 괜찮아요. 다리에 쥐가 나고 있지만 괜찮아요. 나는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내 앞까지 온 예진은 나를 안심시키는 건지, 자기한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 모를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진아 괜찮아??”

“언니!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하하하”

“힘들면 천천히 가도 돼. 혜연이는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캠핑장 부근에서 셋이 자전거를 눕혀 드론을 날렸다.

 

예진이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출발했다. 예상대로 혜연은 우리가 길을 잃을까 싶어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혜연이를 따라 달렸다. 드디어 구시포해변에 도착했다. 석양이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텐트 칠 여유는 있었다. 캠핑장에는 3인 가족뿐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텐트를 쳤다. 자전거를 세우고 붉은 석양을 담았다.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짐을 정리하는데 옆집 꼬마 손님이 찾아왔다. 텐트 밖으로 나가보니, 폴딩 자전거의 작은 보조바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지면 안 된다는 엄마의 주의에 꼼짝 않고 있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도록 핸들을 잡은 뒤 꼬마에게 만져도 된다고 했다. 먼저 자기 주먹만 한 보조바퀴를 검지손가락으로 열심히 굴렸다. 핸들을 잡고 있는 내 팔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쪼그리고 앉아 페달을 잡고 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꼬마가 바퀴를 두 바퀴만 더 돌렸으면 자전거를 그대로 안겨줄 뻔했다. 휴~. 엄마는 아이가 바퀴 달린 걸 너무 좋아한다며 귀찮게 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이런 귀찮음이라면 천 번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꼬마 손님이 돌아가고 나서야 허기를 느낀 우리는 따끈따끈한 배달음식으로 한가한 저녁을 만끽했다. 

다음날 아침,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왔던 꼬마 손님이 아빠와 함께 또 왔다. 아빠는 우리가 잠이 깰까봐 조용조용 만류했지만 꼬마는 보조바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나보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고 밖으로 나갔다. 기분 탓인지 꼬마가 나를 반기는 표정이었다. 

 

학원농장 옆에 마련된 산책로를 걷고 있다.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에 우리는 계속 웃었다.

 

“어서 오세요. 꼬마 손님~! 환영합니다~!!”

연신 바퀴를 돌리는 꼬마. 내친김에 자전거를 태워 주려 했지만, 안장과 핸들의 길이가 너무 길어 결국 앉아만 보고 내려와야 했다. 그래도 만족한 듯 웃고 있는 꼬마는 아빠 손을 꼭 잡은 채 한 손을 배꼽에 얹고 꾸벅 인사했다. 허리 대신 무릎이 굽혀지는 모습에 또 다시 자전거를 안겨줄 뻔했다.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아침식사를 하는데, 꼬마의 엄마가 맛있는 커피를 선물로 주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싫어 캠핑장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 순간 이런 흐뭇한 즐거움을 주는 이웃이 있다면 난 기꺼이 캠퍼가 될 것이다. 

꼬마 손님 가족을 먼저 보내고,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예진이는 무릎에 쥐가 나 더 이상 페달을 밟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오랜만에 장거리 라이딩이라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우리가 달렸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디선가 짙은 풀냄새가 청신한 바람을 타고 몸속에 스몄다. 청보리밭이 “후”하면서 부는 것 같았다. 고작 하룻밤 지났을 뿐인데, 어제의 즐거웠던 순간들이 출렁이는 보리밭에 실려 넘실거렸다. 아쉬움과 그리움에 ‘뉘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민미정 깨알 팁(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구시포해수욕장에서 드론 날리면 안 돼요!!

텐트를 철수하고, 짐을 다 싼 후에 마지막으로 단체 인증샷을 찍으려고 드론을 띄웠다. 잠시 후, 외출에서 돌아온 펜션 사장님이 다급하게 뛰어오셨다.

“여기서 드론 날리면 안 돼요~!!!”

놀란 나는 급히 드론을 착륙시켰다.

“어? 여기 금지구역인가요? 조종기에는 ‘권장구역(비행인기지역)’으로 나오는데.”

 그제서야 야영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드론 비행 금지’ 팻말이 보였다.

“구시포 근처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어서 드론을 날리면 안 돼요. 관광객들 중 저걸 못 보고 날리는 분들이 꽤 있어요.”

잠시 후 경찰이 찾아왔다. GPS에 잡힌 것이다. 신분조사와 촬영물을 확인했다. 메모리카드에는 5m 정도 높이에서 찍은 우리 모습밖에 없어서 삭제 후 훈방조치로 마무리됐다. 별다른 촬영물은 없었지만, 소란을 일으킨 것에 거듭 사과했다. 경찰은 드론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아 출동이 잦다고 말했다. 여행지에서 드론을 날리기 전 귀찮더라도 꼭 확인하자. 아래 어플에 정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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