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3구간 석개재~답운재 26km
낙동정맥 3구간 출발 전. 길이 멀고 험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걷기는 공부다. 특히 산에 올라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지도를 확인하고, 다시 하산해 지역 사람과 만나는 일은 지리학 심화학습에 해당된다. 자주 접하기 힘든 낙동정맥 능선을 타면서 주변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익히고 싶었다.
‘허바허바 낙동정맥 종주’는 이번이 마지막회다
나의 선배기자(신준범)에 따르면 낙동정맥 능선은 21세기 한국 땅에 얼마 남지 않은 모험지다. 모험의 뜻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지역을 여행하다’와 선배의 저 말은 어느 정도 맥락이 통한다. 일반적인 등산, 그러니까 정상까지 2시간 정도 오르막을 타고 올라가 조망을 즐긴 후 맛있는 간식을 먹고 하산하는 일과 낙동정맥 능선을 종주하는 행위는 난이도에 있어 차이가 크다. 이번 3구간 종주 전 나는 약 두 달에 걸쳐 체력을 다졌다. 준비물을 철저하게 챙겼고, 출발 전 지도도 여러 번 들여다봤다. 그냥 ‘등산’할 때의 마음가짐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이런 모험은 굳이 왜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것은 차원 높은 ‘놀이’다. 산에서 길을 찾고, 허기와 갈증을 어느 정도 견디면서 육체적 한계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 건 색다른 재미를 준다. 영화관에서 액션 영화를 보고 얻을 법한 카타르시스, 식당에서 매운 고추를 먹고 난 다음 느껴지는 개운함을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달까? 집에서 인터넷 위성지도로 지구상 전 지역을 관찰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어떤 사명을 띤 모험 행위는 없어졌다고 봐도 된다. 이 시점에 낙동정맥 종주는 그래서 어쩌면 더 순수한 행위가 아닐까 싶다.
한나무재에서 쉬고 있는 종주대. 3구간 능선은 임도와 많이 겹친다. 그것 때문에 김이 좀 새긴 하지만 언제라도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의지가 되기도 했다.
임도 때문에 김빠져
비가 내렸다. 석개재엔 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중얼거렸다.
“종주하기 딱 좋은 날씨네. 물도 덜 먹히겠어.”
김민수, 장보영은 들은 체 만 체 석개재에서 묘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초입에 서 있었다. 산에서 하루 만에 30km를 주파하기로 했는데, 둘은 덤덤했다. 두 사람은 트레일러닝 경험이 많다. 둘의 표정은 ‘어려울 게 뭐 있겠어? 저녁 먹기 전엔 끝나겠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긴장했다. 30km를 가는 동안 내 다리가 버텨줄지 걱정됐다. 그런 나에게 김민수가 말을 걸었다. “괜찮겠어?” 내가 대답했다. “가다가 힘들면 포기하지 뭐.” 그가 다시 물었다. “포기한다는 건 도중에 내려가겠다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우리는 출발했다. 김민수, 장보영은 빠르게 앞서 나갔다. 나는 그들을 죽어라 쫓아갔다. 어차피 조망 없는 산길, 빠르게 가보자!라면서 이를 악 물었다. “착, 착, 착, 착!” “슥, 슥, 슥, 슥!” 흙길을 밟고 낙엽을 차는 소리만 산 속에 가득했다. 심박수가 금세 170까지 올랐다(보통 편안한 상태의 심박수는 90 정도). 장보영이 소리쳤다.
(사진 좌측부터 순서대로) 1. 종주 중 점심은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으로 해결했다. 간편하고 먹기 좋았다. 2. “지도 좀 볼까?” 3구간은 길이 잘 나 있다.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다른 길로 샐 수 있다.
“1km 갔는데, 고도가 100m나 올라갔어, 여긴 킬로미터당 고도가 100m씩 올라가나봐!”
출발 후 1시간쯤 지나 묘봉(1,167.6m)의 전위봉(1,110m)에 올랐다. 우리는 멈춰서 쉬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 지도를 펼쳤다. 능선 양쪽으로 계곡이 보였다.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삼척에선 이것이 용소골로 불리고 봉화 쪽에선 반야골이라고 이름 붙었다. 용소골 쪽은 등고선이 빽빽한데, 봉화군 쪽은 그에 비해 등고선 간격이 널널하다. 용소골엔 사람 대신 소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이 계곡엔 철도가 있었다. 1939년쯤 일제시대 때 용소골 인근의 잘생긴 소나무들은 모조리 잘려 철길을 통해 운반됐다. 잘린 소나무는 가곡천을 따라 동해 쪽으로 빠져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당시 사진을 보니 덕풍계곡이 공사장처럼 어지러웠다. 지금은 그 시절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복원됐는데, 그때 잘린 소나무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더 멋진 풍광이었을까? 궁금한 한편, 일본 사람이 아니어도 소나무들은 멀쩡했을까(일본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사람은 모두 욕심쟁이니까)?와 같은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반야골엔 그런대로 사람이 좀 살았다. 반야골의 들판이 꽤 넓었다고 해서 반야盤野 또는 ‘너래들’로 불렸다(봉화일보, 오지마을탐방<11> 中). 이 마을도 춘양목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때부터 여기서 자란 소나무가 전국 각지로 잘려 나가 건축재와 가구재로 쓰였다. 따라서 마을에는 목도꾼도 많았다. 그러다가 1968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났고, 공비 한 명이 인근 가래골에서 생포됐다. 이후 화전민 이주 정책이 시행되는 바람에 주민들이 대거 마을을 떠났다. 지금 이곳엔 낙동정맥 트레일 봉화구간이 지나는데, 그 길을 따라 가끔 외지인이 드나들 뿐 인적이 거의 없다.
진조산을 넘어 답운재로 가는 중 자작나무숲과 만났다. 지친 몸에 힘을 줄 정도로 예쁜 풍경이었다.
그래도 낙동정맥 능선길은 잘 나 있었다. 맨 앞에서 달린 김민수는 거미줄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이 많이 다니나봐. 길이 좋네. 거미줄도 많이 없어!”
등산로 옆엔 임도가 있었고, 우리는 줄곧 그 옆을 따라서 달렸다. 임도는 계속 나타났다. 그것 때문에 김이 샜다. 끝까지 산길로 가야 한다는 마음과 그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가자는 마음이 계속 싸웠다. 삿갓봉 근처에선 등산로가 아예 임도로 빠졌다.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면서 임도 위를 쌩쌩 달렸다. 대신 우리는 다시 등산로로 올라가는 통로가 나타날까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기슭을 샅샅이 훑었다.
임도삼거리를 지나서도 길은 한동안 임도로 이어졌다. 우리는 길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과 지도를 배낭 앞주머니에서 넣었다가 뺐다가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안 가 길가에서 리본을 발견하고 산길로 올라갔다. 등산로가 나타났다. 우리는 안도했다. 요망한 임도 같으니라고! 저 임도는 전곡리나 소광리로 연결된다. 낙동정맥을 타는 사람에게 이 임도는 그러니까 귀신 같은 것이다. 홀리면 큰일 나는 것, 그대로 따라갔다가 의지를 잃고 헤매게 만드는 것이다! 낙동정맥 종주자들이 저 널찍한 임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안내판을 설치해야겠다 싶었다. 나는 안내판에 이렇게 쓸 것이다.
“출구 없는 미로, 절대 임도로 가지 마세요!” 혹은 “잠깐의 편안함, 산행을 망치겠습니까?”
하지만 저 임도가 몇 해 전 이곳에 발생한 산불로부터 금강송을 지켰다는 기사를 여럿 찾았다. 당시 산불진화작업에 나선 사람들에 따르면 임도는 일종의 방어선으로 산불진화에 큰 도움을 줬다. 산불진화차량과 인력이 유일하게 화재 현장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덕분에 피해 규모가 임도가 설치되지 않은 인근 지역에 비해 10배 이상 줄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1. 덕풍계곡 별빛야영장에서. 쾌적하고 아늑했다. 우리에겐 이곳이 호텔방이었다. 2. 종주 중 유일하게 마주한 조망. 진조산 가기 전에 있다.
있는 힘껏 산에서 놀자!
우리는 산길로 돌아와 마음의 안정의 찾은 대신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임도에서 벗어나자마자 높이 1,000m가 조금 넘는 봉우리를 넘었고 그 뒤로도 셀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앞장 선 김민수는 계속 고함을 질렀다. “아하! 후아!” 그가 고함을 지를 때마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지도를 확인한 다음 말했다.
“오! 우리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거의 다 왔어! 앞으로 3~4시간 정도만 더 가면 답운재야.”
김민수는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날씨가 흐리고 조망이 없다는 건 확실히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됐다. 물을 덜 마셨고, 가는 도중 한눈 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다리를 놀리면서 오르막이 나오면 올라가고 내리막이 나오면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누구의 입에서도 “와! 경치 좋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반대편에서 오던 양수열 기자를 만났다. 그는 차량을 이용해 임도를 타고 우리를 쫓아오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가 결국 진조산 아래 한나무재까지 차를 몰고 왔다. 그는 고개에서 우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거꾸로 산을 타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해 무척 반가웠지만 그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모두 그를 보자 말했다. “어, 왔어?”
석개재에서 덕풍계곡으로 내려가다고 본 낙동정맥 능선. 겉에서 보기엔 둥글둥글 순해 보인다.
우리는 자작나무숲을 지났다. 산죽과 오르막이 ‘협업’ 중인 어렵고 가파른 오르막도 올랐다. 김민수는 계속 신음소리와 기합소리를 합친 소리를 냈다. “으허! 하압!” 요동치는 능선을 따라 우리도 들썩대면서 결국 한나무재로 내려왔다. 임도는 널찍했다. 양수열 기자의 차에 컵라면이 실려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컵라면은 없었다. 대신 그가 따뜻한 커피를 끓여 줬다. 양수열 기자가 말했다.
“근처에 뭘 살 데가 없었어!”
나는 여기서 ‘그만 내려갈까?’ 고민했다. 답운재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남은 능선에서도 조망 따윈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오후 4시였다. 곧 포기할 수 없다고 결론냈다. 예전에 나는 김민수, 장보영과 설악산 서북주릉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종주했다가 도중에 탈출한 적이 있다.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건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으면서 놀다가 완성을 못한 채 집에 가는 것과 같았다. 나는 있는 힘껏 산에서 더 놀고 싶었다. 우리는 줄줄이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 진조산을 지났고, 굴전고개를 건넜다. 긴 산죽밭을 지나 결국 답운재로 내려왔다. 도로에서 양수열 기자가 우리를 맞았다. 몸은 지쳤는데 기분은 상쾌했다.
덕풍계곡 별빛야영장 이경도 사장
“도움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구조도 합니다!”
석개재에서 삼척 방향으로 차를 타고 10분쯤 내려가면 덕풍계곡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안으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면 ‘덕풍계곡 별빛야영장’이 나오는데, 종주 전 이곳에서 하루 머무는 걸 추천한다. 계곡 주변을 둘러싼 기암절벽을 감상하는 재미와 더불어 물소리, 새소리와 함께 힐링하기 딱 좋은 곳이다. 별빛야영장은 2016년 지어졌다. 이경도(52) 사장은 서울에서 15년간 떡집을 운영하다가 고향 덕풍마을로 내려와 캠핑장을 열었다. 젊었을 때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적 있는 산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캠핑장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마을에서 구조대 역할도 맡고 있다. 취재팀이 낙동정맥을 종주한다고 하자 산행을 마치고 꼭 연락 달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총 50개 사이트가 있고, 나무 그늘이 비교적 잘 든다. 별빛야영장은 마니아들로부터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다. 연휴 때는 자리가 없을 정도다.
주소 :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덕풍길 918 문의 : 010-3240-7984
봉우리 인증
1 북도봉.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2 삿갓봉. 바로 아래 임도가 지난다.
3 임도를 달리다가 산기슭에 달린 이정표를 발견하고 능선으로 올라갔다.
4 934.5봉. 여기가 코스의 반정도 된다.
5 진조산. 댄스 크루 ‘진조 크루’를 오마주하면서 포즈를 취했다.
6 답운재. 철조망을 넘어와 도로를 건너면 통고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낙동정맥 종주 중 진조산 부근에서 보조배터리가 들어 있는 가방을 주웠다. 가방에서 안양산죽회 이정표를 발견했다. 산악회 최기운(67) 회장에게 연락해 낙동정맥 종주를 몇 명의 인원이 어떻게 종주하고 있는지 물었다.
“10년 전에 1대간 9정맥 종주하면서 낙동정맥을 종주했고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매달 2회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있어요. 한 번 갈 때마다 10~15km 정도 진행합니다. 지금 4분의 1 지점까지 왔고요. 내년 초쯤 부산까지 완주할 것 같습니다. 낙동정맥을 종주하는 회원들 나이는 50~60대예요. 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 갈 때마다 회비는 5만 원이고요.”
문의 : 010-3481-7950
석포 달그락식탁 이경옥 사장
“석포에 초등학생만 100여 명이에요”
경북 봉화군 석포에 도착해 이것저것 산행 준비를 하다 보니 저녁 때가 다 됐다. 근처에서 식당을 찾다가 귀여운 이름을 가진 이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가 많았는데, 식당 주인 이경옥(58)씨는 우리에게 여러 차례 산채비빔밥을 권했다. 마지못해 주문했는데, 얼마 후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에 크게 놀랐다. 맛있어서 또 놀랐다. 요리솜씨가 보통 수준을 넘긴다고 여겼는데, 그녀는 이 식당을 연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다. 나물과 반찬은 집 뒷산 텃밭에서 키운 것이고, 요리 실력은 그간 집에서 갈고 닦았다. 그러니까 이 식당은 진짜 ‘집밥’을 내는 곳이다. 그녀를 통해 이 지역 초등학생 수가 꽤 많다는 것도 알았다. 식당을 열기 전 그녀는 석포에서 25년간 교육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곳 초등학생 수는 100여 명에 달한다. 매년 그 수가 늘고 있다. 봉화군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지방 인구소멸 분위기와 정반대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석포제련소 직원들이다. 제련소 직원 수는 작년 2,100여 명으로 이 숫자 또한 늘고 있다. 제련소가 지역 경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이경옥 사장이 설명했다.
낙동정맥 3구간(석개재~답운재)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 삼척시 가곡면 /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천면
산행 거리 26km 산행 시간 8시간 30분
산행 난이도 ★★★★★(조망 없고 오르내림 심함)
산행길잡이
낙동정맥 3구간은 석개재에서 시작된다. 석개재에서 남쪽 방향으로 큰 임도가 나 있는데, 임도 왼쪽 능선에 산길이 나 있다. 모퉁이에 등산리본이 여럿 달려 있고, 이 지점이 3구간 시작점이다. 산행 시작 후 11km 지점까지 임도가 능선 옆으로 계속 이어진다. 낙동정맥 능선길도 그동안 임도와 겹치기도 한다.
노란색 등산리본을 찾아 따라가면 능선으로 붙을 수 있다. 임도를 따라가도 답운재까지 갈 수 있다. 다만 이 길은 능선길보다 지루하고 더 멀다. 골짜기를 굽이돌아 이어지기 때문이다. 편하게 갈 요량으로 임도길로 종주를 진행하면 체력 소모가 더 빠를 수 있다. 능선길이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산행 시작 후 11km 지점에 이르러서야 능선에서 임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부터 지루한 오르내림이 산행이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 이 지루함을 견디는 방법은 빠르게 가는 것이다. 야영장비가 들어간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보다 짐을 적게 지고 빠른 걸음으로 능선을 주파할 것을 추천한다. 길 찾기도 어렵지 않다. 능선상에 등산 리본이 잘 달려 있다.
교통
석개재까지 가려면 먼저 석포로 가야 한다. 석개역까지 가는 열차가 있다(1회 환승). 청량리역에서 영주역으로 가는 열차가 하루 10회(05:38~16:00) 출발하며, 영주역에서 석포역으로 가는 열차가 하루 4회(08:14~20:06) 출발한다. 석포에서 석개재까지 택시(석포개인택시, 054-672-6272, 요금 1만2,000원선)로 이동하면 된다. 답운재에서 석포로 가려면 택시로 가도 되지만 요금이 많이 나온다(5만 원 선). 분천역에서 석포로 가는 열차가 하루 5회(09:13~21:12) 출발한다. 요금 2,600원이다.
맛집
석포에 식당이 많다. 달그락식탁(0507-1444-0825)은 석포 제련소 직원들이 자주 찾는 식당으로 산채비빔밥(1만2,000원)이 맛있다. 산채비빔밥을 시키면 10여 가지의 반찬과 함께 된장찌개가 곁들여 나온다.
★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