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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제주, 어디까지 아세요 월라봉]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진지 상처를 보듬은 자연의 위대함

by 白馬 2024. 5. 31.

 

다래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서귀포시 안덕면 해안가의 201m 봉우리
월라봉

 

대평포구 상공에서 본 박수기정과 월라봉. 멀리 산방산이 마주 보고 섰다.

 

월라봉月羅峰(201m)은 서귀포시 안덕면의 군산과 산방산 사이에 언덕처럼 자리한 오름이다. 명승 안덕계곡이 월라봉 기슭을 휘감고 지난다. 옛사람들은 ‘래오름’이라 불렀다. ‘래’란 우리나라 산중에서 나는 덩굴나무의 열매인 ‘다래’나 하늘에 뜬 ‘달’ 또는 ‘達달’이라는 설이 있다. 

제주의 오름 중에는 이름 끝에 봉峰(또는 )이나 산山, 악岳이 붙은 곳이 몇 있다. 봉화 ‘봉烽’자가 붙은 곳은 대체로 해안가에 솟은 오름이다. 군사상의 위급한 일을 알리는 통신장치인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봉우리 봉峰으로 바뀌며 산 이름이 되는 경우가 있다. 

 

월라봉에서 본 화순 쪽 풍광. 우뚝한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그 뒤로 송악산도 보인다. 

 

박수기정은 월라봉의 한 부분

수산봉과 당산봉이 그렇다. 월라봉은 양옆의 군산과 산방산보다 낮아서 봉수대를 설치하기엔 적절치 못하다. 래오름이라는 예쁜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바뀐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월라봉은 행정구역상 안덕면 감삼리에 있지만, 그 품은 화순리와 대평리에 걸쳤을 만큼 넓다. 제주올레 9코스의 깎아지른 해안절벽인 ‘박수기정’이 월라봉의 남쪽 부분이다. 박수는 ‘바가지로 떠 마시는 샘물’, 기정은 ‘벼랑’의 제주방언이다. 즉 ‘바가지로 떠 마실 수 있는 샘물이 솟는 높은 절벽’이란 뜻이다. 

 

정상부 능선에서 진지동굴 쪽으로 내려서는 길. 예쁜 나무계단이 깔렸다. 

 

월라봉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지동굴. 비스듬히 아래로 이어진다. 

 

제주올레 9코스(대평-화순올레)가 월라봉을 감싸며 지난다. 올레길을 따르면 대평포구에서 화순항까지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짧게 월라봉만 다녀올 수도 있다. 북동쪽의 한밭농장을 지나 오르거나 남서쪽 창고천에서도 길이 이어진다. 창고천 쪽이 수월하다. 화순항에서 화순삼거리로 가는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오름 이정표가 보인다. 이 길 따라 300m쯤 간, 창고천 위에 걸린 ‘개끄리민교’를 건너면 곧 한 채의 민가 뒤로 월라봉 안내도가 나타난다. 

 

월라봉 올레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으름덩굴 암꽃. 월라봉 일대엔 으름덩굴이 많다.

 

일본 본토 밖 유일한 결호작전 대상지

목재데크가 깔린 완만한 경사의 탐방로가 칡이 뒤덮은 넓은 묵밭을 지나 개활지로 접어든다. 여기서 데크가 끝나며 산길이 시작된다. 곧 계단이 나타나지만, 큰 힘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부드럽게 뒤틀어지는 계단길이 끝날 즈음 갈림길을 만난다. 두 길은 정상부를 길쭉하게 한 바퀴 도는 원형 탐방로여서 양쪽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다. 오른쪽을 추천한다. 

월라봉은 두 개의 희미한 말굽형 굼부리를 가졌다. 북동쪽 군산 방향으로 트인 굼부리가 크고, 남서쪽으로도 우묵하게 벌어진 게 보인다. 북동쪽 굼부리는 우거진 수풀로 조망이 막히고 길도 없다. 탐방로 곳곳에서 만나는 화순리, 산방산, 송악산, 중문 쪽 조망이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 전망대나 벤치가 있어서 쉬어가기 좋다. 

 

벽을 따라 양치식물이 가득한 한 진지동굴.

 

대평포구에서 본 박수기정. 깎아지른 절벽이 비경을 연출한다.

 

이렇듯 남쪽 바다를 손바닥 보듯 훤히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일제강점기 말,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밀리던 일제는 이곳을 요새로 삼았다. 1945년,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로 대변되는 ‘결7호 작전’을 펼쳤는데, 이는 일본 내 6개 지역과 일본 외 1개 지역을 합친 7개 지역에서 준비한 결호작전이다. 일본 외의 한 곳이 제주도였다. 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높은 곳에 견고한 방어기지를 구축하려고 제주도 남쪽의 오름과 해안 절벽에 수없이 많은 포대와 토치카, 벙커, 해안동굴을 만들었다. 

 

천장이 무너진 월라봉 제2동굴. 무너져 내린 자리에 녹나무가 자란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공간

이 작전에서 월라봉은 더없이 중요한 곳이어서 봉우리 북서쪽 상단부를 따라 일곱 개의 진지동굴이 뚫렸다. 이 중 주진지 동굴은 관통형으로, 폭과 높이가 4m에 길이 80m나 된다. 출구를 여러 방향으로 만들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게 한 것은 여느 오름의 진지동굴과 흡사하다.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비스듬하거나 수직으로 통기구멍을 뚫어놓기도 했다. 정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오름의 동굴 입구가 아무런 보강시설이 없는 것에 비해 월라봉의 동굴은 입구를 콘크리트로 튼튼히 만들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토치카 시설도 보인다. 동굴의 상태가 비교적 온전해서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한 보강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에 주의해야 한다. 

 

동굴진지 앞으로 이어지는 탐방로. 최고의 조망을 보여 주는 곳이다.

 

SNS용 사진 명소인 독바위. 월라봉 남쪽 올레길에서 만날 수 있다.

 

그간 무심코 흐른 듯 한 세월이 상처를 뒤덮으려는 걸까? 전쟁광들이 드나들던 동굴 입구엔 온갖 꽃이 흐드러지고, 어떤 곳은 천장이 무너져 그 사이로 녹나무가 자라기도 했다. 또 다른 동굴 벽은 수없이 많은 양치식물이 뒤덮어 무척 신비롭다. 자연은 언제나 이렇듯 평화와 아름다움을 향해 나가는데, 그것을 볼썽사납게 바꾸고 망가뜨리는 건 인간인가보다. 

전쟁을 준비하며 판 대부분의 동굴 입구는 화순과 어우러진 산방산과 그 앞바다를 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풍광은 제주를 대표할 만큼 아름답다. ‘전쟁과 평화’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 제주 서부지역 일대의 전쟁유적지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월라봉은 일제의 씻을 수 없는 만행과 더불어 평화의 섬 제주의 현재 위상을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Info

교통 운진항(모슬포남항여객선터미널)에서 광평리를 오가는 752-1번과 752-2번 지선버스가 월라봉 입구인 ‘화순리 동하동경로당’ 정류장을 지난다. 여기서 오름 들머리까지는 900m를 걸어야 한다.

 

맛집(지역번호 064)

산방산 앞, 안덕면 사계리의 ‘올레마당 제주산방산점(792-7881)’이 먹을 만하다. 공기밥이 포함된 모듬생선구이 1인분이 1만1,900원으로, 1인상은 고등어, 4인상은 옥돔과 갈치가 더해진 4종류의 생선구이가 나온다. 

 

주변 여행지

안덕계곡 드라마 ‘구가의 서’, ‘추노’ 촬영지기도 한 안덕계곡은 천연기념물 제377호로 지정된 ‘안덕계곡상록수림지대’를 품고 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꼽히며, 예로부터 명승으로 소문이 자자해 대정으로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전체 길이의 절반쯤이 5~10m의 수직 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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