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주작산에서 볼더링 중. 주작산에는 보는 것 만으로는 아까운 멋진 바위들이 지천에 널렸다.
봄은 사계절 중 그 기간이 가장 짧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이 시간을 제대로 음미하면서 즐기기란 좀 어렵다. 봄이 절정에 이를 때 즈음 ‘땅끝’ 해남에 가면 후회 없이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주작산에서 잘생긴 바위를 구경하고, 해남읍내에서 맛있는 제철 음식을 먹은 다음, 시장 가서 구경하기. 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남에서 다 할 수 있다.
주작산으로 볼더링하러 가는 중. 등에 멘 것은 볼더링 매트로, 등반하는 바위 아래 깔아놓고 추락에 대비한다.
조규복클라이밍센터 조규복 대표가 볼더링 중이다.
볼더링 매트 위에 누워 쉬고 있다. 따듯한 봄 햇살에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주작산 볼더링
상처투성이 백자 밥그릇. 해남에 관한 이미지로 이것을 떠올린다. 투박하고 거칠면서 뭔가 따뜻한, 이 밥그릇 안에는 밥 대신 노란 햇빛이 가득하다. 나의 머릿속에 해남이 이렇게 각인된 이유는 해남을 비롯한 강진과 영암에서 맛있는 걸 하도 많이 먹어서 그렇고(그 식당들 어딘가에서 백자 밥그릇을 본 것 같다), 붉은색 황토가 덮인 평야 한가운데 도로에서 시속 60km 속도로 차를 몰면서 여행자의 기분을 만끽했던 경험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남에서 나는 늘 들뜬 기분이었다. 따져보니 이 기억들은 대체로 봄에 만들어졌다. 해남에서 후끈한 봄기운을 맞고 몽롱했던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약인 건가?
해남에 대한 나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은 여기가 서울과 멀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해남읍까지 자를 이용해 직선을 그으면 350km 정도 된다. 부산보다 짧은 거리지만 차로 가면 보통 5시간 걸린다. 부산까지 가는 시간도 비슷한데, 해남은 심적으로 더 멀다. 그것은 여기까지 가는 교통편이 부산만큼 많지 않다는 점 때문도 있지만 ‘땅끝’이라는 수식어가 장애물을 만든다. ‘큰 맘 먹고’ 가야 하는 곳이라고 부담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남은 나에게 자주 갈 수 없어 더 애틋한 곳이다.
이런 애틋함을 안고 사는 나는 얼마나 대단한 행운아인가? 애틋함은 일종의 밥과 같다. 그 기분을 갉아먹으면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도 있으니까. 내 주변엔 해남에 관한 기억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 대부분은 평생 해남에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해남에 같이 가자고 설득하기란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모두 “거기까진 멀어서”라면서 말을 줄였다. 딱 한 사람이 유일하게 반응했다. 조규복(60, 조규복클라이밍센터 대표)씨였다. 그 역시 살면서 해남 땅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 그래서 해남에 가자는 나의 말에 그는 대뜸 “거기 뭐가있는데?”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바위요, 바위가 굉장히 많아요!”
조규복씨. 그는 국가대표 클라이밍 선수였다. 등반하기 좋은 멋진 바위를 찾아 돌아다니는 건 그에게 아주 신나는 일이다.
이날 볼더링할 때 사용한 장비들.
조규복씨는 30대 때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선수 자격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등반했다. 그는 바위 마니아다. 무려 30년 동안 등반할 수 있는 잘생긴 바위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출동했다. 나는 그에게 해남 주작산에 볼더링할 수 있는 바위가 널렸다고 속삭였다. 그는 별 다른 토를 달지 않고 “가자!” 고 했다. 이리하여 나는 이번 여행을 ‘조규복 록트립’이라고 이름 지었다.
고생대 바위에 올라탄 기분
4월 초, 조규복씨와 금요일 밤 10시에 서울 광진구에서 만났다. 해남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가는 건 어렵다고 판단했다. 밤 10시에 출발해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자고 가자고 했다. “규복이형, 고속도로 휴게소에 장거리 트럭 운전사들을 위한 숙소가 있어요. 거기서 자고 가요.” 그는 놀라면서 말했다. “뭐? 그런 데가 있어? 좋아.” 출발 후 2시간 30분쯤 달렸을 때 여산휴게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휴게소 뒤편에 있던 ‘화물차라운지’에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나 다시 해남으로 향했다. 영암 쪽에 다다르자 공기가 따뜻해졌다. 우리는 차창을 열었다. 꽃향기인 것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멀리서 월출산의 바위봉우리들이 보였다. 조규복씨는 감탄했다. “와, 바위 많네. 저 밑이 온통 볼더링할 수 있는 바위일 텐데.” 그는 “쩝”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올라탔던 바위들. 멋지게 생겼다.
우리는 주작산자연휴양림으로 갔다. 입구에는 관광버스가 많았다. 등산객들이 북적였다. 진달래를 구경하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휴양림 ‘제5주차장’까지 차를 끌고 갔다. 여기에 차를 세우고 커다란 볼더링 패드를 꺼내어 멨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어떤 사람이 “등에 멘 게 대체 뭡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휴대용 침대예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작천소령까지 올라갔다. 그리고선 길을 살폈다. 등반할 수 있는 바위가 지천에 있었다. 나는 고개 꼭대기에서 가까운 방향의 바위 군락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먼저 가볼까요?” 우리는 왼쪽의 주작산 방향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덜 가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윽고 패드를 내려놨다. 조규복씨가 말했다. “이거 괜찮겠네. 한번 올라볼까?” 우리는 암벽화로 갈아 신고 바위에 붙었다.
이 바위들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까?
나는 바위들의 내력이 궁금했다. 한국국토지리연구원 홈페이지에서 ‘한국지질도’를 살펴봤다. 주작산 능선의 바위들은 퇴적암, 화산암, 변성암들이다. 이 바위들은 또 조선누층군, 태백산층군으로 나뉘는데, 여기까진 복잡해서 알 필요 없고, 다만 이 바위들은 고생대쯤 생겼다. 고생대는 원생대와 중생대 사이의 시기로 약 5억 7,000만 년 전부터 2억 2,500만 년 전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니까 주작산 바위들의 나이는 대략 5억 살이며, 지금 지상으로부터 35km 깊이 지하에서 탄생했다. 그들이 스멀스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깎이고 깎여 지금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바위들은 말하자면 이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인 것이다. 그것을 붙잡고 어루만지고 올라탈 수 있다니! 우리는 그 영광을 실컷 누렸다. 주작산에서의 볼더링도 우리가 한국 최초, 세계 최초였다. 주변에 만개한 진달래가 우리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 가슴이 뻥 뚫린다!”
조규복씨는 그동안 바빴다. 서울과 경기도에 각각 두 개의 실내인공암벽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일이 바빠서 지난 수년간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다. 여행이라고 해봤자 그에겐 바위가 있는 등반지로 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해남에는 여태것 한 번도 내려간 적 없다. 해남에는 등반지가 변변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주작산의 바위들을 보고 놀랐다. 지천으로 널린 그 양 때문이기도 하고, 능선 주위에 펼쳐진 시원스런 풍광 때문에 그는 더욱 즐거워했다. ”가슴이 뻥 뚫린다”고 했을 정도. 능선에서 내려와 우리는 바위가 즐비하게 선 소석문과 석문공원에 잠깐 들렀는데, 그때마다 그는 “해남에서 등반 축제를 열어도 되겠다”면서 감탄했다.
강진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밀밭. 뒤로 주작, 덕룡산 능선이 이어져있다.
해남 세광염전. 해남에도 염전이 있다. 모두 진도와 가까운 곳에 있다.
해남의 맛
해남 우수영 5일 시장
우리가 해남에 방문한 날 마침 우수영에서 5일 시장이 열렸다. 우수영은 문내면 동외리에 있다. 해남읍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지역은 예전에 굉장히 척박했다. 마을 바닥이 온통 바위로 덮여 있는데, 이 때문에 비가 와도 물이 줄줄 샜다.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고 식수마저 얻기 어려웠다. 이런 곳에서도 시장은 꾸준히 열렸다. 우수영 5일장은 1964년 처음 열렸다고 인터넷 여러 곳에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해남군사>에 1945년 광복 직후에도 열렸다고 나와 있다. 이 시장에서 눈에 띄는 건 단연코 인근 바다에서 막 잡아 가지고 온 해산물이다. 숭어, 갑오징어, 민물장어 미끼로 쓰는 미꾸라지 치어, 운저리, 꽃게와 뻘떡게 등 종류가 여러 가지다. 생소한 수산물이 많긴 하지만 가격은 기대만큼 저렴하진 않다. 숭어가 한 마리에 2만 원 선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니 “무조건 사 가라”고 버럭 하기도 했다. 숭어를 더 싸게 사는 방법이 있다. 근처 임하도에 가면 오전과 오후, 선착장에 막 잡은 숭어를 싣고 배가 들어온다. 이 배의 선장이 숭어 한 마리를 5,000원에 판다. 회를 직접 떠주기도 한다.
문내면 우수영로 10-56(4일, 9일 개장)
061-532-1130
매운양푼이 집의 제철 상차림. 가운데 검은색 접시에 담긴 것은 뻘낙지 숙회다.
매운양푼이의 낙지 무침.
매운양푼이
해남에는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집이 꽤 많다. 하지만 그런 집들 모두 해남의 제철 농수산물로 요리를 하는 건 아니다. 해남읍 해남고등학교 앞 대로변에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서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매운양푼이’라는 간판을 단 집인데, 얼핏 보면 매운양푼갈비를 취급하는 식당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 지금쯤 이 집에 가면 해남 내동에서 잡은 갑오징어와 뻘낙지로 만든 숙회와 무침을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9년째 장사 중인 김현숙 사장에 따르면 이 집 모든 반찬은 100% 해남산이며, 맛으로 치면 해남에서 5위 안에 든다. 저녁시간만 되면 이 집에 꽉 들어차는 사람들이 그 증거다.
해남읍 북부순환로 158
061-537-2253
명량주막식당 주인이 뜰채로 잡은 숭어로 만든 숭어회.
이 집 숭어 껍데기도 별미다.
명량주막식당
우수영국민관광지 안에 있는 이 식당 주인 박양호씨는 울돌목에서 뜰채로 숭어를 잡아 올리는 ‘달인’으로 이름나 있다. 우리가 식당을 찾은 날도 오전에 울돌목에서 숭어 20마리쯤 잡았다고 했다. 숭어회는 쫄깃한 식감이 맛의 80%를 차지한다. 물살이 거친 곳에서 살아 근육이 발달해서 그렇다는 것이 현지인의 설명이다. 숭어회를 주문했을 때 함께 나오는 ‘숭어 껍데기’도 별미다. 이것 역시 쫄깃하고 고소하다. 순수한 맛으로 치면 껍데기가 더 맛있다. 이 집의 해초비빔밥도 맛있는데, 밥 위에 양념장으로 놓인 ‘칠게장’이 독특하다. 감칠맛 난다. 6월까지 아침 7시, 오후 4시쯤, 하루 2회, 진도대교 아래 갯바위 부근에서 박양호 사장이 뜰채로 숭어를 낚는 것을 볼 수 있다.
문내면 학동리 1021-3
061-532-2120
해남 오리지널
피낭시에 고구마빵. 고구마와 똑같이 생겼다. 맛은 더 좋다.
피낭시에 이현미 대표.
피낭시에
고구마빵으로 유명한 집이다. 이 집 고구마빵은 해남뿐만 아니라 멀리 서울까지 알려져 있다. 하루 3,000개 정도 팔린다. 이현미 대표는 해남에 살면서 이곳 대표 특산물인 고구마로 여러 버전의 고구마빵을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6여 년 전 빵 모양을 고구마와 똑같이 만들었더니 불티나게 팔렸다. 실제 고구마와 이 집 고구마빵의 차이점이 있다면 피낭시에의 고구마빵 껍질이 실제보다 10배 더 맛있다는 것이다. 쫄깃하고 쫀득쫀득하다. 내용물은 실제 고구마 맛과 비슷하다. 그러니 피낭시에 고구마빵이 진짜 고구마보다 맛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것을 얼리면 ‘아이스 고구마’로 변신하니 여러모로 이 집 고구마빵은 명물이다.
해남읍 읍내길 8
061-537-6262
삼산주조장의 막걸리. 3대째 이어 온 내공있는 막걸리다.
삼산주조장 한홍희 대표.
삼산주조장
대흥사 초입에 막걸리 주조장이 있다. 3대째 운영 중인 내공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대표 막걸리는 총 세 가지 ‘삼산생막걸리 6도’, ‘찹쌀생막걸리 9도’, ‘찹쌀생막걸리 12도’. 삼산생막걸리는 당귀가 들어가 있고, 찹쌀생막걸리는 찹쌀과 멥쌀이 반반씩 들어가 있다. 찹쌀막걸리는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단맛은 감미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찹쌀에서 나온 것으로 이 집만의 비법이다. 한홍희 대표는 도시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해남으로 내려와 주조장 운영을 맡았다. 주조장 운영을 맡은 지 5년 정도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양조장을 새롭게 꾸미고 기존 ‘농주’ 이미지가 강했던 막걸리를 트렌디하게 변화시켜 해남 양조업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삼산면 고산로 583-1
061-534-5507
해남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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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우수영관광지.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량대첩의 본거지다.
이번 여행 가이드를 맡은 천기철씨. 해남 토박이로 이 지역 곳곳을 꿰뚫고 있다.
진도에 있는 금골산. 바위가 멋지다. 조규복씨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은 곳이다.
★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