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근교에 자리한 제주도 절반 크기의 야생화 평원
LA의 봄은 짧지만 강렬하다. 사막성 기후인 LA 근교 야생화들은 짧지만 강렬하게 봄을 알린다. 겨우내 눈 폭탄, 비 폭탄에 시달린 올해의 꽃 마중에 기대가 컸다. 꽃이 폭탄처럼 슈퍼블룸Super Bloom(사막에 일시적으로 꽃이 많이 피는 현상)이 될 거라 말들을 하고 있으니까.
2017년에 카리조평원Carrizo Plain National Monument에서 만난 꽃의 바다. 그때 만났던 소름 돋는 감동은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꽃소식이 왔을까, 혹은 놓칠까 조급증이 나서 4월 첫 주 이곳을 찾았다.
아득한 평원엔 색색의 야생화가 앞 다퉈 들판을 덮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절정은 아니었다. 며칠 지나자 지평선이 아닌 ‘꽃평선’을 이룬 꽃바다에 놀란 미국의 뉴스가 먼저 터지기 시작했다. 카리조평원을 뒤덮은 야생화 장관을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4월 9일, 다시 이른 새벽 카리조평원으로 달렸다. 카리조평원은 비교적 최근인 2012년 국가기념 장소로 지정되었다. LA에서 북서쪽으로 160km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오지다.
이곳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원시의 장소로도 불린다. 평원의 들머리 소다호수Soda Lake 길로 접어들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과 1주 전 왔던 카리조평원이 아니었다. 그때는 살며시 실눈을 뜨고 자신이 잠깐 살다 갈 세상을 엿보던 꽃봉오리들이 더 많았다. 그 꽃봉오리들이 폭탄 터지듯 일제히 피어난 것이다.
카리조평원 입구에서만난 목가적 주택이 꽃밭에포위되어 있다.
호수 건너편 템블러산맥Temblor Range도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거기도 제철이 시작된 모양. 우점종을 이루고 있는 힐사이드 데이지Hillside Daisy, 피들넥Fiddleneck, 골드필즈Goldfields 꽃들의 특징은 모두 노란색이라는 점이다.
사진을 찍으러 꽃밭에 들어 설 때마다 “미안해, 미안해”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입 없는 꽃에게 건넨 진심 섞인 독백. 정말 풀보다 꽃이 많다. 키 큰 꽃 아래에도 한국의 제비꽃 닮은 아주 작은 꽃이 빼곡했다. 그것들을 밟는 미안함.
꽃이 세상을 바꿔 놓았다. 몽땅 자신을 닮은 노랑 세상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순간을 위하여 겨우내 치열하게 준비했겠으나 놀라운 변신이다. 1주 만에 산야는 물론 지평선까지 노란 꽃 세상을 만든 꽃의 마술. 소리도 없이 화려한 색채와 향기로운 세상을 창조해 낸 꽃들의 반전. 놀라운 자연의 역사를 본다.
우리가 달리는 비포장도로가 대략 80km 되니 꽃이 점령한 땅의 넓이를 미루어 짐작한다. 우리처럼 개화 정보에 촉을 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들 어른 아이가 되어 꽃밭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빙긋 웃는다든지 온갖 요상한 폼을 잡고 셀카를 즐긴다. 꼬리를 물고 주차된 차들이 보이면 그곳은 볼거리가 있다는 신호.
자연은 대지에서 스스로의 물감을 길어 올려 꽃피우고 그림을 완성한다
폐허가 된 목장을 지나 무인 캠핑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평원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에게 공원 당국은 경고하고 있다. 이 평원에서는 물, 음식, 연료를 보충할 수 없다. 무인지역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나는 미국에서 지정한 국립공원이나 천연기념물National Monument을 무조건 믿는다.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을 많이 방문했지만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그리고 국가지정기념물인 모뉴먼트Monument는 머지않아 국립공원으로 승격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신호. 카리조평원은 제주도의 절반쯤인 1,000㎢에 달하는 넓이였다. 이 예비 국립공원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초원 중에서 가장 큰 곳이다.
꽃평선에 깃든 끔찍했던 추억
이런 풍요로운 곳에 사람이 사는 건 당연한 일. 이곳에는 츄마시 인디언이라는 원주민이 살았다. 그들이 신성시하던 페인티드 록Painted Rock이 멀리 보인다. 성채처럼 솟은 바윗덩어리 안쪽에는 원주민들의 벽화가 있다는데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 대신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올랐다.
전망대를 오르는 등산로 역시 꽃길이다. 호수 건너 템블러산맥 골짜기는 무지개 색깔로 피어났다. 노란색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악센트처럼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수채화를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눈앞 야생의 꽃바다를 쓸고 바람이 분다. 바람에도 꽃향기가 물씬 묻어 있는 듯했다. 어서 오라는 듯 노란 꽃바다 꽃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꽃평선을 걷는 관광객들.
이곳에 시나브로 핀 야생화는 우리에게 보여 주려 피어난 게 아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자유롭게 한 철 살다 갈 것이다. 우리가 사라져도 야생화의 윤회는 끝나지 않는다. 경이로운 꽃바다를 보며 뜬금없이 인간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잘난 인간은 한 번 가면 끝인데 이 꽃은 내년 봄에도 무장 무장 필 것이다.
아니다. 우리도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는 생각도 든다. 산을 좋아하다 보니 얻은 보너스. 계절 따라 이런 행복도 찾아 낼 수 있었다는 자가발전 혹은 자가당착. 허튼 생각이 불쑥 솟은 건 아득한 꽃평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평원 종단을 마쳤다. 여태 달려온 소다 로드를 버리고 7마일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이 길도 비포장도로. 증기기관차처럼 꽁무니에 하얀 먼지를 품어 내며, 맞은편 템블러산맥을 향해 돌진했다. 7마일 길 역시 뷰포인트로 소문난 도로였다.
앞에는 야생화를 뒤집어 쓴 채 거대한 꽃동산으로 변한 산맥이 있었다. 양쪽으로 질펀한 꽃평원을 가르며 달렸다. 중간 중간 그 풍경을 담으려 차를 세운다. 드디어 엘크 호른Elk horn 길을 만났다. 엘크 호른 길 역시 전 구간이 비포장도로. 이 험준한 길은 템블러산맥을 넘어 문명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비가 오면 절대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섬뜩한 경고판이 오늘도 보인다.
이 길에는 나의 끔찍한 기억이 녹아 있다. 엘크 호른 길은 이곳에서도 오지 중 오지이기에, 숨은 야생화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길이다. 우리처럼 힘 좋은 사륜구동 차만 볼 수 있는 한적함도 마음에 들었다. 좋은 사진을 건진다는 욕심이 앞섰다. 무인 지구이므로 바퀴가 빠졌을 경우 조난된다는 경고를 꽃멀미 핑계로 잊었다.
꽃이 일시적으로 폭탄처럼 많이 핀다 하여 ‘슈퍼블룸’이라 부른다.
당시 동쪽 소다호수를 끼고 돌아왔다. 이제 서쪽 평원의 웅장한 경치를 감상하며 갈 것이다. 카리조평원을 한 바퀴를 돈다는 느낌표의 완성. 그런 욕심이 엘크 호른 길로 돌진하게 만든 것. 그러나 정부에서 세금 걷어 붙여 놓은 경고는 언제나 듣는 게 좋다. 이 엘크 호른 길은 그런 간단한 진리를 더 간단하게 쑥 알려 줬다.
그때는 후배 정임수 시인과 함께였다. 자연 좋아하는 그의 차는 힘 좋다는 SUV 사륜구동. 가자! 빠질 것 같으면 돌아 나오면 되지. 사륜구동인데 걱정할 거 뭐 있어. 정임수 시인은 내 말만 듣고 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자연에 대한 호기심천국, 생각이 닮은꼴이라 그랬다고 믿는다.
“잠깐! 저 노란 꽃밭은 그림이 좋겠는데”하는 내 말을 듣고 정 시인이 비포장이지만 바짝 마른 길로 차를 슬쩍 들이밀었다. 슬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말 살살 1m쯤 들어갔을 때였다. 마른 도로 껍질이 쑥-! 들어가더니 바퀴가 빠졌다. 조금 앞으로 갔다가 후진하면 될 듯싶어, 조금 전진하면 그 만큼 빠진다. 후진도 헛바퀴뿐. 믿었던 사륜구동 4바퀴 모두 진흙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 옷을 벗고 손으로 진흙을 파내고, 시트를 버릴 요량으로 바퀴 밑에 끼어 넣고… 별짓을 해도 사륜 헛바퀴였다. 만물의 영장이 땀 흘린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였다.
겁이 났다. 흙을 파내느라 혹사한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죽을 염려는 없지만 해는 지고 있지, 인적은 없지, 휴대폰은 불통이지, 배는 고프지. “가자!”고 한 죄가 크다. 온몸을 땀으로 샤워하면서 차량 구출에 목메었으나 헛심만 잔뜩 쓰고 포기. 그때, 전화 감도를 찾아 헤매던 정 시인이 구세주 같은 복음을 전한다. 신고를 했더니 연결되었고, 구글 위치추적으로 확인을 했고, 기다리면 구조차량이 올 것이라고.
무인지구인 카리조평원은 제주도 절반쯤 되는 거대한 넓이다. 이런 꽃 세상이 불과 2주일 만에 사라진다는 것도 놀라운 자연현상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고생 끝에 있다
거의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힘센 트럭이 와서 1,000달러를 먼저 결제하라더니, 쇠줄을 묶고 차를 쑥~! 빼준다. 불과 1~2m 빼주고는 1,000달러라니. 결제할 때만 해도 와준 게 고마웠으나, 위기를 벗어나자 바가지 쓴 기분. 우리처럼 말 안 듣는 차가 많아, 꽃구경 철엔 자기들이 특수를 누린다고. 독사 약까지 올리며 웃는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이번에도 “가자!”였다. 그 이유는 중간에 산 안드레아스San Andreas 단층斷層을 봐야 한다는 핑계. 비록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땅이 이곳이다. 지금도 이동하고 있는 카리조평원의 반쪽. 태평양 판이 미국대륙 판과 어긋나게 부딪쳐 일어나는 경계가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다. 이 외딴 평원을 단층이 가로지르며 계곡을 깎고 산을 이동시키고 있다.
LA에 지진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 북진하는 카리조평원의 반쪽은 4,000만 년 후에는 어디쯤 존재할까? 500km 이상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과학이다. 단층을 조망하러 근처 언덕을 올라섰다. 평범한 저 계곡이 어마무시한 단층이라니 실감나지 않는 그림이다.
그 대신 여기서 보는 소다호수와 꽃바다는 일품이었다. 소다호수라는 이름답게 물가에는 베이킹 소다처럼 백색 알칼리 침전물이 꽃밭 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제주도 면적의 반쯤 되는 광활한 초원. 이 초원을 가득 채운 야생화 바다가 숨이 멎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산 안드레아스 단층은 수만 년 동안 느리게 움직이지만, 야생화는 단 몇 주만 지속되는 짧은 생이다.
문득 자연도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산 고개를 향해 출발했다. 역시, 말 잘 안 들어 맘고생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로또처럼 가끔 복이 있다. 무시무시한 비포장 언덕을 넘고, 용을 쓰며 길게 파인 도랑을 타고 넘다 보니 이제 꽃도 잊었다. 쑥-사건이 재발한다면 5,000달러도 싸다. 기도가 통했는지 템블러산맥을 넘는 고개를 무사히 올라섰다.
이제 내리막 길. 굴러도 내려갈 것이니 걱정을 덜었다. 또 간사해졌다. 쑥~! 걱정을 언제 했냐는 듯 우리는 차를 세우고 다시 풍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캘리포니아 주화州花인 주황색 파피Poppy와 보라색 꽃 군락이 어울렸다. 계곡을 무지개처럼 채색하고 있다. ‘왜 세상 모든 아름다움은 이런 마음 졸임을 해야 만날 수 있는 걸까?’하고 자기합리화에 나선다.
높은 곳에서 우리가 지나 온 꽃평야를 내려다본다. 비포장도로가 한 줄 가르마처럼 보였고, 그 꽃벌판을 가르며 우리가 왔다. 나는 이런 세상을 처음 만난다. 이렇게 넓은 꽃산맥에 빠진 것도 처음이다. 꽃밭에 방목하는 소가 생각났다. 그 검은 소는 풀보다 많은 꽃을 먹었을 터. 자동으로 꽃등심이 되었을 소. 종일 눈이 행복했다면 늦은 저녁은, 꽃등심으로 입도 행복해지게 만들자. 그런 생각으로도 귀갓길이 또 즐거워졌다.
엘크 호른 길을 따라 고개를 넘기 직전 뒤돌아본 카리조평원.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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