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지맥 르포
화왕지맥 화왕산~비들재 암능길 7.3km, ‘준·희’를 찾아가다
견봉에서 바라본 화왕지맥에서 ‘준.희’의 흔적을 찾았다. 왼쪽 끝은 화왕산 정상.
“등산리본에만 의지해서 산행할 수 있을까요?”
등산리본 전문가 ‘준.희’ 최남준 선생은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새는 길이 잘 돼 있어서 당연히 갈 수는 있지. 그런데 그렇게 가면 안 돼. 등산리본은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참고의 대상이야. 자넨 정답지를 먼저 보고 문제를 푸나?”
최 선생의 추천, 화왕지맥
원래 계획은 등산리본만 보고 가는 산행이었다. GPS도, 지도도 휴대하지 않고 오로지 등산리본에 의존해 오르는 산행이다. 그러면 등산리본의 실황과 실제 가치를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등산리본 작업만 30여 년을 해온 최 선생은 단호하게 “그러면 등산의 본질이 훼손된다”고 막아섰다. 지도를 통해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찾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고,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곤 최 선생은 “등산리본들을 잘 살펴보고 싶으면 내가 가장 최근에 작업한 창녕 화왕지맥을 가보게”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창녕의 화왕지맥을 찾았다. 화왕지맥은 100대 명산에 속하는 화왕산을 따라 흐르는 종주길이다. 열왕산을 지나는 열왕지맥에서 분기돼 창녕군 남지읍, 낙동강으로 잦아드는 약 37.4km의 산줄기다. 주요 봉우리로는 구룡산(741m), 관룡산(754m), 구현산(579m), 석대산(564m), 등산(147m), 큰갓실산(122m) 등이 있다.
산행은 관룡산과 화왕산 사이의 고갯마루에서 시작했다. 관룡산과 화왕산 사이를 넘어 화왕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임도는 원래 차량 통행이 금지된 곳이지만, 취재를 위해 창녕군청이 협조해 줬다. 동행한 이는 창녕군청산악회 백태진 세무과 팀장과 이현미 노인여성아동과 팀장.
“여기도 화왕지맥길이에요. 열왕지맥에서 분기된 화왕지맥 산줄기는 관룡산을 지나 화왕산으로 넘어오죠. 창녕에는 지맥길이 총 3개 있어요. 화왕火旺지맥과 열왕烈旺지맥, 그리고 왕령旺嶺지맥이죠. 딱 봐도 공통점이 보이죠? 바로 왕성할 왕旺자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창녕의 산들은 그렇게 높진 않지만 기운이 좋다고 합니다.”
고도를 거저먹었기에 발걸음이 사뿐하다. 화왕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지맥은 능선 쪽으로 난 오솔길이지만 그 밑에 난 임도를 따른다. 이곳에 있는 드라마 <허준> 세트장을 보기 위함이다. 세트장에는 초가집 다섯 채가 들어서 있는데 유순한 산세와 어울려 산간마을의 운치가 있다. <허준> 외에도 <대장금>, <왕초>, <상도>, <조폭마누라>, <영웅시대>,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각종 드라마 및 영화의 촬영지였던 곳이다.
화왕산성 내부의 억새밭.
고고하고 웅장한 화왕산성
10분 남짓 임도를 따라 걸으니 웅장한 성벽이 맞이한다. 화왕산성이다. 비화가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둘레 2.7km에 성 내부 넓이는 5만 6,000평이 넘는 큰 산성이다. 곽재우 장군이 정유재란 때 가토의 군대를 맞아 7일간 싸워 격퇴한 역사가 남아 있다.
“조금 더 늦게 오셨으면 진달래가 예쁘게 피었을 텐데 아쉽네요. 화왕산 정상은 이 억새밭과 진달래로 유명해요. 억새축제도 했었지만 2009년에 사고가 났죠. 저도 그때 현장에서 축제 안전관리를 하고 있었어요.”
화왕산 정상에서는 1995년부터 3년마다 대보름맞이 억새태우기 축제를 했었다. 축제가 열릴 때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2009년 갑작스런 돌풍에 불똥이 방화선을 넘어 옮겨 붙었다. 혼비백산한 관중들은 낭떠러지 쪽으로 떠밀려 추락했고, 결국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화왕산 정상 맞은편 봉우리에 들어선 추락위험지역 출입금지 안내판 옆으로 위태롭게 등산리본이 붙어 있다. 길이 없는 곳이므로 등산리본을 잘못 붙인 사례에 속한다.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화왕산 정상은 고요했다. 산성 안에 넉넉하게 담긴 억새밭이 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린다. 성벽을 따라 난 길을 걸어 오른다. 눈으로 볼 땐 그리 멀지 않았는데 막상 걸으니 제법 멀다. 그렇게 길을 따라 오르니 마치 전망대처럼 산성 북서쪽에 고고하게 홀로 솟아 있는 화왕산 정상이다.
“풍수지리를 전공한 사람들은 창녕의 진산인 화왕산을 천하의 명산으로 친다고 해요. 산에서 나는 기氣가 아주 우수하다고 합니다. 산이 크지 않고 규모도 작은데 산의 모습이 인간에게 좋은 기가 많이 나는 일종의 ‘약산’이라고 해요. 현대병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제격인 산이죠.”
백태진 팀장이 먼지가 묻은 구현고개 표지판을 정성스레 닦고 있다.
비들재 암릉길부터 본격적인 리본산행!
정상에서 바라본 화왕산성은 또 다르다. 성벽 밖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펼쳐져 웅장미를 더한다. 산성 주변에는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미소바위, 꼭 붙어 있는 연인 같다는 소원바위, 포수에게 쫓겨 화왕산으로 왔다가 얼어붙었다는 곰바위 등 재밌는 이야기가 서린 바위들이 널려 있다.
서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화왕지맥에 달려든다. 창녕군은 이 길을 ‘비들재 암릉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비들재는 화왕산과 구현산 사이에 있는 고개이자 이번 산행의 종점. 고개 양옆의 화왕지맥 능선이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비둘기재라 부르다 비들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승으로는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들이 닭의 볏처럼 쭈뼛쭈뼛해서 볏의 지역 방언인 ‘벼슬’이 비슬, 비들로 변해 비들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리본 찾는 산행이란 것을 암시하듯 산성을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통신탑 철조망에 등산리본이 즐비하게 달려 있다. 서울 남산타워에 연인이 채워놓는 자물쇠처럼 주기적으로 관리만 된다면 산행 추억을 남기는 장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 바닥 곳곳에 풍파에 시달려 떨어진 리본들이 먼저 눈에 띈다.
눈에 불을 켜고 ‘준.희’ 리본을 찾아보지만 흔적도 없다. 최남준 선생의 “나는 아무데나 붙이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만 붙인다”며 “그리고 갈림길에서 어느 정도 진행한 곳에 붙여놓는다”는 말이 그제야 떠오른다.
화왕지맥 능선 상에서 갈림길처럼 보이는 길. 올바른 길인 좌측 길로 15m 정도 걸으면 ‘준.희’ 리본을 만날 수 있다. 스스로 길을 찾은 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고수의 등산리본이다.
지맥 길을 마저 잇는다. 병풍바위가 점점 또렷하게 드러나는 관룡산 기슭의 병풍바위가 멋스럽다. 푸근한 숲길이다가도 경쾌한 암릉이 연달아 이어져 걷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오르내리길 반복하며 수많은 등산리본을 마주한다. 그리고 약간씩 복잡한 마음이 든다. 갈림길이나 특정 고개, 봉우리가 아닌 너무나 뻔한 길 여기저기에 등산리본이 묶여 있다. 리본에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면 무시했겠지만 리본만 찾으면서 걸으니 제 역할을 해주는 등산리본이 그리 많지 않다.
바로 그때 드디어 머리 위 소나무 잔가지에 걸려 있는 주황빛 ‘준.희’ 리본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최 선생의 말과는 다르게 일방통행 길 한가운데 독야청청 걸려 있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곳에 걸려 있던 이유는 15m 정도 걷고 나서야 드러났다. 비들재에서 역으로 올라온다면 그곳이 갈림길이었다.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골라온 사람한테만 최 선생이 “잘 왔다. 이 길이 맞다”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는 리본이었던 셈이다.
화왕지맥에서 바라본 창녕읍내.
리본에서 고수의 내공을 느끼며 올라선 봉우리에서 ‘준.희’ 표지판을 맞닥뜨린다. 749.6m봉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내려서면 구현고개, 다시 올라서면 722.9m봉. 각 기점마다 모두 ‘준.희’ 표지판이 맞이해 준다. 백태진 팀장은 세월을 맞아 더러워진 표지판이 있으면 “후배된 자의 도리”라며 정성껏 먼지를 닦아 낸다.
잠시 산줄기가 어깨처럼 삐져나왔다는 뜻의 견肩봉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잇는다. 능선 상에서 순간 길이 흐려지는 순간에는 창녕군청 산악회 리본에 의존해 길을 찾는다. 남발된 등산리본 사이에서 제몫을 하는 리본들이 빛을 발한다. 작은 리본을 찾느라 눈이 뻑뻑해질 때면 관룡산, 영취산 방면의 힘찬 산줄기나 넉넉하게 펼쳐진 창녕읍내에서 눈을 쉬게 해준다.
그렇게 지맥 끝에 가서야 두 번째 ‘준.희’ 리본을 만난다. 이 리본 역시도 비들재에서 올라왔을 때 그 뜻이 헤아려진다. 첫 번째 들머리에서 맞는 길을 따라 지맥에 올라탄 사람한테 “제대로 왔다”고, “화왕지맥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해 주는 리본인 것이다.
낙동강으로 가라앉는 화왕지맥 끝. 최남준 선생은 “우봉지맥과 화개지맥, 화왕지맥의 3지맥과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굉장히 특수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리본관리, 민관&신구세대가 힘 합쳐야
의미 없이 달린 수많은 리본보다 단 두 개뿐이지만 의미를 갖춰 더 빛나는 ‘준.희’ 리본을 곱씹다 보니 어느덧 종점인 비들재다. 배낭을 내려놓고 고개에서 다시 등산리본의 역할을 고민해 본다.
분명 도움이 되는 리본도 많았지만, 경관 공해에 종국에는 떨어져 쓰레기가 된 리본도 있었다. 또 특정 기점에 잔뜩 매달린 등산리본도 관리만 된다면 산행의 추억을 갈무리해줘 더 뜻깊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옳은 자리, 등산리본이 정말 제 역할과 가치를 다하는 자리에만 남을 수 있도록 관리해 줘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선 민과 관이, 그리고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산행길잡이
화왕산 옥천매표소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매표소라고 해서 돈을 내야 할 것 같지만 2017년부터 주차료와 입장료는 모두 무료화 됐으므로 걱정할 것 없다.
여기서 계곡을 낀 임도를 따라 화왕산 능선까지 외길이다.
능선에 오르면 정자 하나가 나온다. 여기서 북서쪽 등산리본을 따라 임도를 걸으면 <허준> 세트장과 화왕산이 나온다.
지맥길도 전체적으로 선명한 외길이며, 갈림길이 간혹 나오지만 남쪽으로 진행한다는 것만 유의하면 된다.
교통(지역번호 055)
산행코스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교통편이 천차만별이다. 자하골 코스로 화왕산만 다녀올 경우 택시를 타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고 들머리로 갈 수 있다.
반면 종주해 비들재 방면으로 넘어갈 경우에는 교통편이 불편해진다. 비들재에서 동쪽 옥천리로 넘어가면 6번, 6-1번 버스로 창녕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올 수 있지만 배차간격이 매우 길다.
따라서 반대편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좋은데, 비들재에서 가장 가까운 초막골정류장까지 약 3.3km, 50분 남짓 걸어야 한다. 일단 정류장까지 오면 창녕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가 수시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55)
숙소는 화왕산에서 거리가 있지만 부곡온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화왕산스파호텔(536-5771), 그랜드호텔(536-6300), 온천모텔(521-0207) 등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창녕은 관내에 도축장이 있어 한우가 유명하다. 지역에서 ‘인동초 한우’라는 브랜드로 적극 홍보하고 있다. 인동초 분말을 섞인 사료를 먹여 육즙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 소고기 맛집은 창녕대가(532-3301)다. 스페셜한우(2만 4,000원), 한우등심&특수부위 2만1,000원.
또 낙동강을 끼고 있어 장어도 맛있다. 풍천민물장어(532-9334), 일신옥(526-203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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