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창문을 열면 마음이 들어오고. . . 마음을열면 행복이 들어옵니다............국내의 모든건강과 생활정보를 올려드립니다
  • 국내의 모든건강과 생활정보를 올려드립니다.
  • 건강하고 랭복한 하루 되십시오.
등산

[마운스토리] 기암과 승경 자랑하는 충남 最高의 서대산

by 白馬 2022. 3. 29.

3월 ‘마운스토리’ 서대산
아기자기한 형상의 바위 많아…산은 원추형으로 초반부터 오르막

 

서대산 정상에서 장군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서대산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서대산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서대산西臺山(904m)은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산행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주변은 야트막한 산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듯 에워싸고 있어 서대산은 마치 홀로 솟은 봉우리 같다. 그렇다고 북한산이나 설악산같이 우뚝 솟은 건 아니고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새다. 육산인 듯 악산이고 악산인 듯 육산이다. 풍수에서는 육산 중에 악산이 있는 곳, 혹은 악산 중에 육산이 있는 곳을 명당이라 한다. 우리 풍수의 균형감이다. 산행객들에게는 원추형의 산이라 출발부터 정상까지 계속 오르막길로만 올라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탁 트인 조망과 군데군데 나타나는 기이한 바위를 보는 재미는 힘든 산행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산림청은 서대산을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면서 ‘충남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곳곳에 기암괴석과 바위 절벽이 있어 중부의 금강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우며, 산정에서의 조망이 좋은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했다. 용굴, 사자굴, 견우장년대, 옥녀탄금대, 북두칠성바위 등이 유명하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바위가 많다고 하지만 화강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지는 않다. 육산의 모습을 띠다가 군데군데 기암들이 나타나는 형세다. 그 기암들이 다양한 모양새를 보여 준다. 용바위, 마당바위, 선바위, 남근바위, 살바위, 옥녀탄금대 등으로 명명된 바위들은 산행 재미를 더해준다. 특히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옥녀탄금대에는 지성단至誠壇과 함께 영천靈泉 생수가 있어, 이를 7번 이상 마시면 아름다운 미녀가 되어 혼인길이 열리고 첫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지니고 있다.

 

서대산 주변으로는 올망졸망한 산들뿐이고, 조금 멀리 대둔산, 마니산, 민주지산, 덕유산까지 조망이 가능할 정도로 홀로 솟아 있다. 산줄기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 떨어져 독립된 산이라 할 정도로 솟아 비래산飛來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실제로 정상에서 남쪽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같은 장소가 여럿 나온다.

 

서대산은 육산 속에 악산을 띤 형국으로 기암과 폭포가 가끔 모습을 드러낸다. 개덕사 바로 뒤에는 서대폭포 하단이 형성돼 있다.

 
금남정맥 끝자락 대둔산 지맥 줄기

산줄기의 족보를 보여 주는 <산경표>에는 금남정맥 끝자락쯤 대둔산의 지맥으로 나온다. 장안치에서 시작된 금남호남정맥은 노치蘆峙, 성적산, 성수사 등을 거쳐 마이산에서 다시 금남정맥으로 갈라진다. 금남정맥은 주줄산珠崒山~왕사봉~병산屛山~탄현~이현을 거쳐 대둔산에서 계룡산까지 이어진다. 대둔산에서 다시 가지치기를 해서 뻗어 나온 산이 바로 서대산이다. 따라서 대둔산과 서대산은 같은 줄기인 것이다. 지금은 도로 등으로 갈라져 있지만.

예부터 우뚝 솟은 형상은 선비들로부터 시상詩想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선조 때 문신이자 학자였던 백담 구봉령(1526~1586)은 시문집 <백담집>에 칠언율시 두 편을 남겼다. 그중 ‘옥천 가는 길에 서대산을 바라보고 沃川途中望西臺山’란 제목의 시는 다음과 같다.

 

‘빼어난 산세 늠름하고 기둥 위는 둥근데/ 바위 산 아득하게 구름과 안개에 덮였네./ 신선 노니는 골짜기엔 낮에도 복사꽃 숨기고/ 학 기르는 밭엔 봄날에도 지초 감추었네/ 옛날 남쪽 끝에서 눈 돌려 바라보았고/ 오늘 아침 서쪽 둑에서 음편 늘어뜨렸네/ 해마다 나그네 길 이 산의 앞뒤였는데/ 풍진 속에 머리만 백발이 되어 슬프다네.’ 

 

서대산 정상 바로 밑에는 옥녀탄금대 바위가 널찍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중간에는 물이 나오는 동굴이 있어 지성단이라는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또한 묘사한 내용으로 봐서 지금보다 훨씬 자연경관이 뛰어난 듯하다. 그 빼어난 경관을 조선 숙종 때 15년간 이조 판서를 지낸 옥오재 송상기(1657~1723)가 직접 유람하며 ‘서대산기西臺山記’을 남겼다. 그는 송시열 직계 후손의 명문가이면서 외가는 조선 최대 사대부가인 안동 김씨 집안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주인공 김상헌의 손녀가 그의 어머니이고, 김창집·김창협·김창흡 등 이른바 6창이 외종형제이다. 그는 유람기에서 산의 형세와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략) 내가 늘 그 산의 우뚝하고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번 유람하려고 마음 먹은 지가 오래 되었다. (중략) 절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면서 위를 바라보니, 산허리 위쪽으로는 암벽이 마치 깎아지른 듯하여 원숭이나 새도 넘어가기가 어려워 보였다. 1리도 못 가서 길이 더욱 높고 가팔랐으므로 드디어 가마에서 내려 짚신과 지팡이 차림으로 걸어 올랐다. 올라갈수록 길은 더욱 가팔라지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그리고 여러 넝쿨들이 뒤엉켜 있고, 그 속으로 난 좁은 오솔길은 마치 실처럼 좁았다. 두 발을 디딘 곳 외에는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우뚝 선 절벽이 몇 백 장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여서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새나 지나가고 뱀이나 기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한 길이 또 몇 굽이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너무나 험준하여 오솔길도 만들 수 없으므로 승려들이 나무로 잔도棧道를 만들었는데, 아래로 깊은 골짜기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하였다. 이 광경을 굽어보자니 발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략) 신속하게 잔도를 건너니, 또다시 위태한 돌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돌길이 나 있는 골짜기는 구불구불 돌아나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중략) 

 

더욱 용기를 내어 앞장서서 낭떠러지와 절벽을 더듬고 부여잡으며 올라갔다. 가다 쉬기를 반복하며 거의 1리쯤 오르니 다리가 아프고 숨도 차서 더 이상 지팡이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삼끈으로 허리를 묶은 다음 두 승려는 앞에서 당기고 두 승려는 뒤에서 밀게 했으나 도리어 뒤뚱거려 나아갈 수 없었다. 잔도를 건넌 뒤로 처음에는 수십 걸음마다 한 번씩 쉬다가, 조금 뒤에는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쉬었고, 마지막에는 겨우 몇 걸음 옮기다 곧바로 쉬게 되어 땅에 들어붙듯 잔걸음으로 갔는데 입이 굳어 버려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중략) 정상에는 부처를 모신 전각이 두 채 있었으나 승려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아마 너무 높아 살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기이한 봉우리와 우뚝한 절벽이 하늘을 찌르고 허공에 닿을 듯한데 바위의 색깔이 매우 희었다. 그 형상이 마치 창을 늘어세운 것과도 같고 병풍을 펼친 것과도 같으며, 성난 사자나 승천하는 이무기와도 같아 그 모습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중략) 산의 이름을 지을 때 대체적으로 산의 뼈대骨를 위주로 하고 표면에 있는 흙膚은 고려하지 않는데 뼈대 또한 맑고 탁하고 고아하고 속됨의 구분이 없다. 이 산의 경우에는 한 지역에 우뚝이 자리를 잡아 천 길 높이로 아름답게 솟아 있지만, 그 피부는 뼈대에 반도 되지 않는다. 이 산은 산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천지 가운데 있는 하나의 아주 크고 괴이한 돌덩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아마도 조물주가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아니겠는가. (후략)’ 

 

바위는 희고 기이한 봉우리와 절벽은 하늘 찌를 듯

조선 선비의 과장과 엄살이 다소 섞여 있지만 산의 형세와 모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길로 산행이 힘들기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유람기에 살짝 언급하고 지나간 서대산이란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명명된 것일까? 대개 정상 부위가 평평하면 접미어로 ‘대臺’가 붙는다. 백운대, 문장대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서대산도 엎어진 바가지 모양이라 정상 부위는 평평하다. 고지도에서 ‘서대西臺’만 표기된 것들도 제법 있다. 서대산으로 일부 나오는 고지도가 있는 걸로 봐서 대와 산을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동국여지지> 충청도편에는 ‘서대산은 (옥천)군 남쪽 20리, 금산군 경계에 있다. 산 모양이 불뚝 튀어나온 것이 대와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편에 ‘서대사는 서대산에 있다. 옛날에는 상·중·하 세 개의 서대가 있었는데 중서대사는 지금 없어졌다’는 기록으로, 서대사가 있었다 해서 서대산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서대’라는 명칭은 산의 서쪽 기슭에 신라 문성왕 때 무양국사가 서대사를 창건했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쪽 기슭은 낭떠러지에 가끔 평평한 지형이 나타나는 곳이다. 따라서 서쪽 평평한 지형에 사찰을 창건해서 서대사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로는 서쪽으로 커다란 누대처럼 산이 우뚝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서대산을 <삼국사기>제사편에 소사小祀로 지정된 서다산西多山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행정구역 때문이다. 서다산은 당시 행정구역 백해군伯海郡 난지가현難知可縣(전주 벽계군 진안현)에 있는 산으로 표기돼 있다. 

 

역사학자 정구복은 “서대산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진잉을군進仍乙郡(전주 진례군의 옛 지명이며 현재의 충남 금산군)으로 표기되어야 할 것인데, 구태여 그 남쪽으로 인접한 난지가현에 소속시킨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도 백해군 난지가현은 옛 지명으로 지리지에는 백이군 난진가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의 전북 진안군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오인하고 있다. 그가 서다산을 마이산이 아닌 서대산으로 착각하는 결정적 이유다. 아마 서다산의 위치에 대한 착각을 한 것 아닌가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사기> 소사에 지정된 서다산은 현재의 서대산이 아니라 진안의 마이산으로 확인된다. 이는 <고려사>에서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서대산 정상에는 비석과 함께 돌탑을 쌓아 놓고 있다.

 

소사 서다산은 서대산 아닌 마이산

<고려사>지리지 진안현편에 ‘진안현은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峴(월량현月良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장계군의 영현이 됐다. (중략) 마이산馬耳山(신라에서는 서다산이라 불렀고, 소사에 올라 있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세종지리지>진안현편에 ‘명산은 마이산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서다산이라 하여 소사에 실었다’고 나온다. 정구복 박사가 왜 서다산을 서대산으로 오해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을 동시에 봤으면 오인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삼국사기> 소사로 지정된 서다산은 서대산이 아닌 마이산의 옛 지명인 것이다.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로 줄곧 관직을 맡아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남수문(1408~1443)이 금산·진안 지방, 즉 옛 진례현을 둘러보고 편액을 ‘영벽’이라 명명한 <영벽루기映碧樓記>를 남겼다. 여기에 ‘(전략) 군의 산수가 남주의 으뜸이요, 이 누각의 풍경이 더욱 기승奇勝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서대는 북쪽의 진수鎭守이요, 진락은 남쪽을 가리고 있으며, 서쪽은 대둔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높이 솟아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거기에 금천의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서 누각의 뒤에 와서는 물을 끌어 소지沼池가 되니, 산빛과 물빛이 종횡으로 짙고 푸르며, 좌우로 서로 비쳐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누의 승경이 이에 가장 뛰어나도다’라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금산편에도 기록된 내용이다. 정구복 선생은 산수가 빼어나고 우뚝 솟아 예로부터 금산의 북쪽을 지키는 명산이었으니 당연히 서다산을 서대산으로 착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밑에서 바라보는 서대산은 야트막한 산들 중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그 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대산 정상 바로 옆에는 강우측정레이더가 있어 일기예보와 함께 강우량을 측정하는 데 활용된다.

 

결론적으로 서대산은 예로부터 우뚝 솟아 선비들의 눈길을 끌었고, 승경도 빼어나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산으로 확인된다.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주변에 있고,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생가도 이곳에 있는 점도 발길을 찾게 하는 요소이다.

 

서대산 등산로는 금산군에서는 9개 코스를 추천한다. 등산로 정비가 잘돼 있는 서대산드림리조트 방면은 사유지라 입장료 1,000원과 주차료 3,000원을 받는다. 그 외 코스는 무료. 정상까지 편도 코스는 다음과 같다. ▲정상에 있는 강우레이더 관측소를 관리하는 강우레이더 관리동에서 용바위~신선바위~사자바위를 거쳐 정상까지는 2.5㎞로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 ▲강우레이더 관리동에서 용바위~마당바위~사자바위를 거쳐 정상까지는 2.4㎞로 하산까지 4시간가량 소요된다. ▲다리에서 바로 출발해서 두부모대기바위~장선대바위를 거쳐 서대산 정상까지는 1.9㎞로 하산까지 3시간 30분 정도 소요. ▲개덕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비교적 좋다. 서대폭포와 옥녀탄금대를 볼 수 있고, 주차장도 있기 때문. 개덕사~서대폭포~옥녀탄금대를 거쳐 정상까지 1.8㎞로 왕복 약 3시간 30분 소요 예상. ▲서대산약용휴양림에서 출발해서 옥녀탄금대를 거쳐 바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편도 2.4㎞에 2시간  정도 소요. ▲일불사에서 옥녀탄금대를 거쳐 서대산 정상까지는 가장 짧다. 편도 1.5㎞로 1시간 30분가량 소요. ▲동석마을에서 병풍바위를 거쳐 서대산 정상까지는 가장 긴 3.2㎞로 3시간 남짓 소요된다. ▲효심사에서 선녀바위를 거쳐 정상까지는 1.7㎞로 2시간 정도 소요될 듯. ▲흥국사에서 헬기장을 거쳐 정상까지는 일불사 코스와 마찬가지로 가장 짧다. 1.5㎞에 약 2시간 소요. 정상 올라가는 시간에 비해 하산 시간은 3분의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