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라톡BC 트레킹
파키스탄 오지 라톡BC(4,400m)를 향해 걷는 120km 빙하 트레킹
7월 말, 날이 뜨거워지자 발토로Baltoro빙하의 온갖 것들이 쓸려 내려왔다. 수량이 불어난 브랄두Braldu강은 난폭하고도 급하게 흘렀다. 강 위에는 허술해 보이는 다리 하나가 전부였다. 다리 아래에선 강물이 꿈틀대며 거친 침방울을 내뿜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우리는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파키스탄 트레킹에서 만난 다리는 매번 이렇게 인상적이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서야 첫 야영지인 어퍼줄라Upper Jhula(3,218m)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가이드가 병든 닭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 먹는 것도 부실하고, 복통과 설사로 기력이 떨어진 듯했다. 일행한테서 설사약과 영양제를 구해 그에게 전했다. 정서가 다른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터. 가이드가 고생이 많다.
빙하를 따라 한동안 메마른 땅이 이어졌다. 생기라곤 없어 보이는 뾰족한 암봉과 거친 빙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은 거친 땅이었지만 이런 곳에도 꽃이 있었다. 감히 야생 장미 군락을 상상이나 했을까. 어디 장미뿐이랴.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야생화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삭막한 산과 화려한 야생화는 이번에도 나의 상식을 넘어섰다.
문득 궁금했다. 이 꽃들은 어디서 왔을까. 바람을 타고 왔을까. 새가 물어왔을까.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땅. 비는 거의 오지 않고, 유일한 물은 가깝고도 먼 빙하. 그런데도 꽃들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다.
흔히 나약함을 한 떨기 꽃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히말라야에서 만난 꽃들은 그렇지 않았다.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했다. 무엇에도 의존치 않고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했다. 모래바람이 분다고 찌푸리지 않았다. 옆에 더 예쁜 꽃이 피었다고 질투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놀랍고 멋지게 살고 있었다.
꽃과 나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물도 있는 법. 동론바Donglonba(3,647m)는 넓은 야영지로 앞에 개울이 흘렀다. 너무 더워 다들 짐을 내려놓고 개울로 향했다. 비록 흙탕물이었지만 한 일행은 과감하게 등목을 했다. 몇몇은 머리를 감고 땀에 젖은 옷을 물에 헹궜다(고산 적응이 충분히 된 후였다). 뜨겁고 건조한 태양은 뭐든 순식간에 말려버렸다. 빨래가 마르자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머리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음에 미끄러지며 간신히 내려선 곳은 대규모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촉토이Choktoi빙하의 시커먼 얼음덩이가 곳곳에서 우리를 막았다.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흙더미와 돌무더기를 오르내리기를 몇 번.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런 난관에도 포터들은 망설임 없이 빙하를 통과했다. 뒤돌아보니 노새들까지 우리를 따라잡았다. 우리에겐 모험이지만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라미독파Lamidokpa(4,100m)부터는 온통 날카로운 돌무더기뿐이었다. 이곳은 너무 거칠고 황량했다. 어딘가에 잔뜩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 감정이라곤 없어 보였다. 길이 이렇다 보니 등산화가 남아날 리 없었다. 희한하게도 이번 파키스탄 트레킹은 등산화의 수난이 심했다. 40일이 넘는 여정의 절반이 지나가자 일행의 등산화 밑창이 6켤레나 떨어졌다. 여분의 신발을 가져온 일행 덕분에 어찌어찌 해결은 되었지만 참 별일이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등산화를 꼽는다. 다른 장비는 현지에서 그럭저럭 대체할 수 있지만, 등산화는 다르다. 발에 잘 맞는 등산화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길들이는 시간도 필요하다. 더욱이 네팔이면 몰라도 파키스탄에서는 좋은 등산화를 구하기 어렵다. 어쩌다 구할 수 있다 해도 오래 묵은 등산화는 언제 밑창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새 등산화라도 험난한 곳에서 6개월이면 바닥이 닳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나는 몇 달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에 들어가면 아예 등산화를 새로 산다. 등산화만큼은 최고 사양으로, 같은 제품으로 구비한다. 등산화 한쪽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체하기 위해서다.
날카로운 바윗길을 지나 점심 장소에 도착했다. 노새들은 이런 길에서도 초연한 표정으로 무심히 걸었다. 마부가 길을 안내하는 것도 아닌데 저들끼리 알아서 갔다. 길이 없을 것 같은 돌무더기 언덕도 당연한 듯 넘었다. 포터들도 대단했지만, 이곳에서는 노새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요리사가 맞은편 빙하 둔덕을 가리켰다. 라톡 베이스캠프Latok BC(4,400m)였다. 보기에는 금방 닿을 것 같지만 가깝지 않을 게 분명했다. 히말라야에서 걷다 보면 원근감이 무시될 때가 많다. 아무리 걸어도 좀처럼 거리가 줄지 않는 기괴함. 그럴 때면 환상방황을 하듯 같은 지점을 맴도는 것 같다.
오후가 되자 빙하가 빠르게 녹았다. 빙하 수로는 봅슬레이가 지나도 될 만큼 유속이 상당했다. 빠른 물살을 보자 겁이 났다. 수량이 불면서 봅슬레이 수로의 폭도 넓어졌다. 건너다 잘못되면 그대로 떠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포터들은 짐을 지고도 날듯이 뛰어넘었다. 스태프들이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더 위로 올라갔지만, 수로의 폭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한 일행이 적당한 폭을 발견하고 훌쩍 뛰어넘었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서 뛰어넘었다.
빙하 수로 맞은편에 이르자 드디어 라톡산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올라오는 내내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더니.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산은 사진 한 장면을 뚝 떼다 놓은 것 같았다.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주위를 에워싼 침봉들이 각기 다른 신의 모습으로 있는 듯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그 자체로 신성함이 가득했다. 산은 그렇게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빙하 둔덕을 넘으면 베이스캠프가 곧 나타날 줄 알았다. 다시 만난 무지막지한 빙하지대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우왕좌왕했다. 보조 스태프는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더 앞에서 요리사가 길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베이스캠프에는 라톡에 도전하는 독일 원정대가 있었다. 캠프에는 그들이 널어놓은 빨래가 펄럭였다. 몇몇은 바위 주변에 매달리는 등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개월 동안 머물며 훈련하고 적응하는 중이라 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라톡이 무서울 만큼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들은 매일 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저 거대한 벽에 매달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떨리는데.
그렇다고 가이드가 후미만 챙기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후미의 일행이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섭섭했다. 우리에게는 배려였는데 어느 순간 그들에게는 권리가 되어 있었다.
하산 지점인 아스콜리Askoli(3,000m)에 도착하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텐트도 치지 못하고, 허름한 건물 안에서 비를 피했다. 때가 잔뜩 낀 컵에 콜라를 마시며 앉아 있자니 피곤이 몰려왔다.
어느덧 트레킹 한 달째가 되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도 좋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여행하는 것도 즐겁다. 그래도 이런 날이면 집 생각이 간절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집에 누워 휴식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내려오기 위해 산에 오르고, 돌아가기 위해 집을 떠난다.
* 파키스탄 중앙 카라코람Karakoram국립공원의 라톡Latok은 극적인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군이다.
* 라톡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7~8일 여정에 약 120km 거리이다.
* 출발 지점의 고도는 3,000m, 정상 역할을 하는 베이스캠프 고도는 4,400m이다.
* 트레킹 허가를 받아야 하며, 법적으로 가이드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짐꾼과 쿡(요리사)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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