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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낭만야영] 여성 백패커들 1박2일간 아홉 봉우리 넘다

by 白馬 2022. 2. 23.

구봉산 정상 아래 데크에서의 겨울 백패킹

 

구봉산 정상 아래의 전망데크. 오후 5시가 되면 등산객의 발길이 끊어진다. 이때부터 사이트를 구축하고 우리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연일 이어지는 눈 소식에 지인들이 모여 설산 백패킹을 계획했다. 일본 원정 산행을 함께했던 김혜연, 히말라야 트레킹 베테랑인 김정미, 애견과 함께 백패킹을 즐기는 한예진까지 네 명의 여성 백패커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개성도 성격도 강한 넷이서 백패킹을 함께하는 건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어렵게 잡은 약속 날이 다가왔지만, 전국 어디에도 눈 소식은 없었다. 강원도의 그 많던 눈도 따뜻한 날씨에 녹아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밋밋한 육산은 포기하고 바위산으로 가자 싶어 진안 구봉산으로 정했다.

6년 전 김혜연과 백패킹으로 갔었던 구봉산은 멋진 풍경과 9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재미가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그때는 5봉의 구름다리 데크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지금은 야영이 금지되어 있어 한적한 정상 아래 전망 데크로 숙영지를 정했다. 5봉과 4봉 데크에만 ‘야영 금지’ 현수막이 있어 두 봉우리는 피했다.

 

7봉에서 바라본 구봉산 정상과 산줄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자면 무념무상이 된다.

 

서울에서 진안까지는 직통 교통편이 없어 유일한 드라이버인 김정미가 장거리 운전을 도맡아야 했다. 큰 짐을 안긴 미안함과 고마움에, 배낭 짐을 덜어 주기로 하고 출발했다. 신나게 나섰지만 날씨는 흐렸고 미세먼지도 평소의 4배라는 절망적인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임에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오전 11시경 구봉산 주차장에 닿았다.

구봉산(1,002m)은 운장산, 마이산과 함께 진안 고원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9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설이 흥미롭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서예가인 송익필은 서얼 출신이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그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당시 유명했다고 한다.

탁월한 지략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선친의 정변 밀고에 연루되어 유배를 왔고,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운장산에서 숨어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송익필의 자가 운장雲長이고, 호가 구봉龜峰이라서 운장산과 구봉산으로 불린다니 이 또한 설득력이 있다.

 

이른 아침 등산객이 올라오기 전에 사이트를 정리하고, 장난스레 단체 사진을 찍었다.

 

위엄 있는 이름은 둘째 치고, 멀리 보이는 미니 공룡 능선처럼 오밀조밀 이어진 봉우리들이 앙증맞다. 주차장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구봉저수지로 들머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부터 장거리 운전으로 피로가 쌓였을 김정미를 위해 짧은 코스를 택했다.

푹해진 날씨에 저수지에는 그늘진 가장자리만 살짝 얼음이 남아 있었다. 아직 오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주책없는 구슬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된비알이 시작되면서 앙상한 나무에 엉켜 있는 메마른 넝쿨들은 살풍경을 자아냈다. 흔한 새소리조차 없는 조용한 길 위에는 스틱 부딪치는 소리뿐, 어색함마저 감돌았다.

 

결빙구간을 건너고 있는 한예진씨. 겨울에는 눈이 없더라도 아이젠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여성 4인방의 즐거운 하룻밤

한참을 말없이 오르며 가쁜 숨만 내쉬었다. 침묵을 깨고 김혜연이 농담을 던졌다. 매사에 진지한 한예진이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퍼져 텅 빈 나뭇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이지만 불협화음은 기우였다. 멋진 설경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산우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산죽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정오의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시간이었다.

한번 터진 입담은 봇물 터진 듯 쉴 새 없이 이어졌고, 깔깔대며 웃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돌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능선에 가까워지자 거대한 암릉 너머로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난간 너머로 옛길인 듯 중간이 끊긴 철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위로 거대한 고드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빙벽을 좋아하는 김혜연은 배낭을 내려놓고 아이젠을 착용한 뒤 신나게 얼음 위를 기어올랐다. 한예진도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 나도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운전하느라 피곤한 김정미는 남아 배낭을 지키기로 했다. 끊긴 철계단까지 로프가 이어져 있어 얼음 위를 오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녹아내린 하얀 촛농처럼 늘어진 고드름은 메마른 풍경에 질린 우리에게 좋은 눈요기가 되었다. 한바탕 얼음을 즐기고 얼음 위를 내려오는데 한예진이 멈칫했다. 김혜연은 조교마냥 “촥! 촥! 촥!” 소리를 내며 아이젠으로 얼음 위를 차는 시범을 보였다. 그녀의 말투와 행동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구봉산 정상 부근의 멋진 고드름 아래에서 인증샷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무사히 되돌아와 배낭을 짊어졌다. 코가 닿을 듯 가파른 계단은 앞서가던 등산객들을 군데군데 멈추게 만들었다. 쉬고 있던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훈련 중이냐고 물었다. 그 말에 우린 또 한바탕 웃었다. 젊으니까 힘들어도 잘 웃는다며 덕담까지 얹어 주셨다. 

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를 때쯤 야영 터로 찜한 정상 직전의 전망데크가 보였다. 마지막 계단이다. 데크에 올라서자 김혜연과 한예진은 배낭을 멘 채 익살스럽게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구봉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아찔해 보였다. 우리는 몸이 식기 전에 배낭을 내려두고 서둘러 정상을 다녀왔다. 가파른 경사면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엉겨 붙어 있어 아이젠을 착용했음에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정상 아래의 데크로 돌아와 방한복을 챙겨 입고 등산객의 발길이 끊어지길 기다렸다. 조금 전 덕담을 해주셨던 노부부가 올라왔고, 아이젠 두 개를 빌려드렸다. 정상을 다녀온 노부부는 장수에 오면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명함을 주었다.

이후로도 아이젠이 없어 망설이는 분들께 기꺼이 빌려드렸다. 의도치 않게 무료 아이젠 대여소를 차린 것. 더 이상 올라오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텐트를 쳤다. 비로소 쉘터에 모여 앉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

긴 저녁을 수다로 채웠고, 코로나는 여전히 뜨거운 화두였다.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하늘길이 열리면 어디를 먼저 갈지 행복한 고민을 나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밤이 되어 야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멀찌감치 떨어져 카메라를 세팅해 놓고 어둠 속에서 빛이 담길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오렌지색 쉘터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이따금씩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진 속에 이 즐거운 소리까지 담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밤이었다.

 

구봉산 정상 부근 전망대에서 본 여덟개의 봉우리. 구봉산 주위로 능선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여군 훈련 왔냐?”

다음날 아침, 일출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휴대폰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데크 끝에 자리 잡은 김혜연이 문을 열고 찍은 풍경사진이었다. 화이트아웃이었다. 1봉에서 8봉으로 이어지는 연봉 너머로 솟아오르는 일출을 기대했건만 실망이다. 그래도 멋진 능선을 타기 위해 서둘러 철수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데크로 올라오는 등산객이 있었다. 빨리 철수해서 다행이다. 배낭을 짊어지고, 사다리 같은 계단을 내려섰다.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 8봉 갈림길인 돈내미재에 도착했다. 구봉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제법 많았다. 큰 배낭에 놀란 어르신들이 “군인이냐? 훈련 중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이런 질문이 반복되는 건 국방색 옷으로 무장한 김혜연 탓이라며 우리는 장난스레 놀렸다.

미세먼지가 자욱해 경치는 포기했었는데, 우뚝 솟은 8봉 너머로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봉우리가 절경을 이루었다. 6년 전 왔을 때는 로프를 잡고 올랐던 산길에 나무 계단이 놓여 있었다.

등산객이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권리와 자연경관을 해치는 인위적인 구조물에 대한 거부감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는 편이다. 이미 만들어진 계단을 뭐라 하긴 어렵다. 

좋게 말해 구봉산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면 봉우리마다 이어진 계단도, 4봉과 5봉을 잇는 빨간 현수교도 멋스럽게 느껴진다. 덕분에 나의 관절이 잘 버텨준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어제의 노부부처럼 느리지만 느긋하게 멋진 구봉산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구봉산의 하이라이트인 5봉, 우리는 100m 현수교를 신바람 나게 걸었다. 궂은 날씨에도 우리의 텐션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4봉에서 두 개의 봉우리를 지나 하산 갈림길에 배낭을 내려두고, 1봉을 다녀왔다. 9개의 봉우리를 모두 찍고 하산했다. 메마른 풍경뿐이었지만, 어찌 산이 항상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으랴. 자연보다는 멤버 모두가 잘 어울려 즐거움이 풍성한 1박2일이었다.

 

7봉에서 6봉으로 향하는 길 위의 김혜연씨. 국방색 옷을 즐겨 입어 종종 "여군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산행 정보

1일차 구봉산주차장(300m) ~ 구봉저수지 ~ 돈내미고개 ~ 전망대 데크(945m) ~ 구봉산 정상(1,002m) ~ 전망대 데크 <4.2km, 3시간 30분 소요>

2일차 전망대 데크 ~ 8봉 ~ 7봉 ~ 6봉 ~ 5봉(680m) ~ 4봉 ~ 3봉 ~ 2봉 ~ 1봉 ~ 구봉산 주차장 <3.3km, 2시간 30분 소요>

대중교통 정보

서울 출발 시 전주를 경유해 진안으로 이동 후 군내 버스 이용.

 

8봉과 7봉을 잇는 구름다리. 깎아지르는 절벽과 암릉이 어우러진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