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들고 북한산 가볼까?
북한산 만경대의 노을. 서울의 명승 북한산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엿본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던 시인이 있었다. 내게도 비슷한 취향이 있는데, 내 경우엔 바퀴 대신 책이다. 책을 굴리고 놀겠다는 건 아니다. 재미난 책 제목을 보면, 그걸 패러디해 나만의 원고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지 모를 편집자가 뽑았을 짧은 카피에 순간적으로 반해, 바퀴를 굴리듯 찬찬히 펜을 굴린다…. 이건 좀 멋진 일 아닐까? 얼마 전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란 인문서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주역 한 권 들고 북한산 가볼까?’란 원고를 써보면 어떨까 상상했다. 지금 바로 써보려고.
<주역周易>이 뭔지 궁금한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구구한 설명들이 많지만, 간략히 말하면 서양의 타로카드를 책으로 묶어 놓았다고 보면 된다. 카드 몇 장의 조합으로 미래를 포착해 주는 그 타로카드 말이다. 타로에는 그림만 그려져 있지만, 주역에는 그림 대신 추상적인 기호 64개가 마련돼 있고 각각의 기호엔 예언과 같은 메시지들이 붙어 있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 희한한 책으로 점도 치고 마음공부도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주역은 이 세상 다양한 풍경의 모음이기도 하다. 이 길로, 저 산으로 헤매고 다니길 좋아하는 내가 주역을 좋아하는 이유다. 주역의 64개 기호와 행간엔 삶의 풍경이,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애매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묘사돼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64개의 기호 중엔 ‘산화비山火賁’라는 게 있는데, 이건 위에 산, 아래 불이 있는 모양을 글로 나타낸 것으로 ‘무언가를 장식하고 꾸민다賁’는 뜻이다. 오래전, ‘산화비’란 기호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위로 산, 아래로 불? 이게 왜 꾸민다는 뜻이지?
‘사지사지귀신통지思之思之鬼神通之’란 옛말이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과 통한다는 뜻이다. 귀신과 통하고 나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된다. 몰입의 힘이 그렇게 대단하다. 그런 지독한 몰입을 꿈꾸며 ‘위로 불, 아래로 물’을 궁구하고 또 궁구했더니 마침내 귀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늦은 오후, 서울 모처에서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이었다. 일몰과 석양의 시간이었다. 붉은 태양이 산 뒤로 넘어가는 순간, 북한산과 하늘 전체가 붉고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저거였구나! 산 아래로 내려간 불덩이가 세상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광경. 꾸민다는 건 바로….”
사전에도 없는 ‘주역연구가’를 참칭하며 정치·시사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이런저런 잡지에 늘어놓곤 한다, 와중에 사람들이 물어온다.
“주역으로 말하고자 하는 게 도대체 뭐예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타로카드의 비유를 넘어선다. 묻는 이는 말하자면, 동양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주역의 비밀스러운 뜻 같은 걸 내놓길 요구하는 중이다. 어려운 질문이다. 선가禪家에서 초심자初心者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을 떠올려 보자.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유는 뭔가요?”
불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소리인데, 불교적 선禪의 1500년 역사를 털어 직설적인 답을 해준 선사는 한 명도 없다. 그저 “차나 한잔 하지!”나 “뜰앞에 잣나무!” 같은 횡설수설로 입을 막았다. 선사의 배려를 아랑곳하지 않고 답을 내놓으라, 막무가내로 덤벼들면 큰 소리로 혼쭐을 내거나(할), 몽둥이로 제압도 했다(방).
사상의 계통은 달라도 주역이라고 선에 못 미칠 게 없으니 비싸게 굴어야 마땅하지만, 이번만 과감하게 주역의 진리를 요약·정리하고 산山 얘기로 이어갈 참이다. 세상사를 상징하는 64개의 기호를 통해, 주역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세 개다.
1. 흔들린다, 무너지지 않는다.
2. 끊임없이 암시한다.
3. 바라본다, 흘려보낸다.
64개의 기호가 상징하는 우리 삶의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주역의 추상 기호들도 우리 삶만큼 흔들리는데, 흔들린다고 무너지진 않는다. 대신 쉬지 않고 모양을 바꿔가며 새로운 기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1). 주역으로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역은 확정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암시만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쉬지 않고 암시한다(2). 주역 공부는 기호와 메시지의 현란한 64개 조합을 명상하듯 관조하는 일이다. 사고思考 실험을 통해 현실의 다양성을 간접 체감한다고나 할까. 명상과 관조를 통해 삶의 비애와 흥분을 흘려보낸다(3).
세상도, 주역도, 산도 중중첩첩
주말이면 오르는 서울의 명승名勝 북한산에서 주역 또는 세상의 속내를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나한, 나월, 용혈, 용출봉으로 이어지며 북북서北北西로 위태롭게 치달아 내려가는 의상능선을 멀리 두고선,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융통과 집요를 봤다.
진달래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에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가을로 향하는 나뭇잎들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세상이 보내 주는 미묘한 징조들을 이제는 알아차릴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엊그제, 문수봉 정상에 앉아 골격 허옇게 드러낸 겨울의 보현봉을 쳐다보면서는,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 따위 흘려보내자, 날려보내자 마음먹었다.
몇 해 전 세상이 막막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근교 산에 올라 해발 500~800m쯤의 친숙한 고도를 나만의 천상天上으로 여기며 걷고 또 걷고 나면 마음이 후련했다. 그보다 한참 전에 주역을 뒤적거리기 시작할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사는 게 막연해 옛날의 경전 속을, 깊은 계곡을 헤매고 다니듯 파고들었다. 그런데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세상이나 주역이나 산이나 모두 비슷하게 중중하고 뒤지지 않게 첩첩하다. 되지도 않는 질문이지만 그렇게 중중첩첩한 것들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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