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백화산
옛날 옥동서원 유생들이 휴식을 위해 올랐다는 벡옥정은 사방이 훤히 트인 전망대다. 전함처럼 웅장한 백화산의 위용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예년에 비해 늦게 시작된 장마가 끝나고 이제 무더운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이때쯤이면 우리 선조들은 술과 음식을 마련해 산이나 계곡을 찾아 더위를 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매한가지다. 시원하게 휘도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바라보며 등줄기에 흐른 땀을 산바람으로 식혀 보자.
경북 상주의 백화산白華山을 올랐다. 백화산은 높고 험한 산세로 인해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공격과 방어 기지로 이용돼 상주지역에서는 ‘호국의 산’으로 일컫는다.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발원한 구수천龜水川이 수봉리마을에 이르러, 백화산과 헌수봉 사이로 굽이굽이 여울지며 산태극수태극을 이룬다. 이 물길을 따라 충청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넘나든 길은 그 세월이 1,000여 년. 그래서 지금도 ‘천년 옛길’로 불린다. 상주시가 2012년 이 옛길을 충북 영동과 경계가 되는 반야사 옛터까지 5.1km를 다듬어 ‘백화산 호국의 길’로 이름 붙였다.
산행코스는 ‘백화산 호국의 길’ 일부 구간을 연계한 옥동서원이 기·종점인 원점회귀다. 모동면 수봉리마을의 옥동서원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옥동서원은 1518년(중종 13) 황희 정승과 황맹헌, 황효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2호이다.
독재골 산장’을 지나면 80m 길이의 출렁다리를 건넌다
서원에서 백옥정까지 길은 두 가닥이다. 농로를 따라 걷다가 정자를 향해 나무 데크로 오르는 길과 옥동서원 왼쪽 오솔길로 진입해 산릉을 따라가는 길이다.
산등성이 끝에 자리한 백옥정을 바라보며 서원 왼쪽을 돌아 산릉을 따라간다. 오솔길로 곧장 이으면 헌수봉 능선이 구수천에 맞닿은 곳에 백옥정이 있다. 옛날 옥동서원 유생들이 휴식을 위해 올랐다는 정자는 사방이 훤히 트인 전망대다.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구수천 물길과 수봉리의 들판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전함처럼 웅장한 백화산의 위용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백옥정에서 호국의 길은 다시 두 갈래. 데크 길로 내려서서 구수천 징검다리를 건너 보현사 입구를 이어가는 길이 있다. 그러나 지나온 능선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임천석대(3.13km) 방향으로 향한다. 짙은 숲길로 내려서면 ‘洗心石세심석’이라 음각된 커다란 바위를 만난다. 선비 이재와 황익재가 ‘세속의 마음을 씻어낸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세심석을 지나면 옆구리 가까이 다가온 구수천 물줄기가 시원하고 우렁차다.
구수천은 금강의 상류로 영동 쪽에서는 석천石川, 상주 쪽에서는 구수천 또는 중모천이라 한다. 반야사 방향으로 세찬 물살을 따라 사담, 세심석, 명경대, 병풍바위, 저승폭포, 전투갱변, 난가대, 임천석대 총 8곳의 여울을 뜻하는 ‘구수천 팔탄八灘’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풀어놓는다. 물길과 나란히 가는 길은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당단풍나무 등이 하늘을 가리는 숲길이다. 신라시대에는 물길 따라 석축을 쌓고 길을 개설해 기마병들의 훈련장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절벽 아래 나무 데크를 지나 암굴 속에서 미소 짓는 앙증맞은 불상도 만난다.
구수천은 ‘구수천 팔탄’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풀어놓는다.
일제에 뺏긴 주봉 이름 2007년에 되찾아
흐르는 강물 따라 인적 드문 ‘독재골 산장’은 스치듯 지난다. 회양목 군락지를 만나고 뒤이어 80m 길이의 출렁다리를 건넌다. 백화산 자락을 따라온 물길과 만나 몇 발짝 발걸음을 옮기면 난가벽欄柯壁을 볼 수 있다. 건너편 헌수봉 자락의 물가에 병풍처럼 이어진 바위벼랑은 구수천 팔탄 중 돋보이는 경치다. 이어 곧 저승골 입구에 닿는다. 표석에 새긴 빨간색 글씨만큼이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승골은 1254년 침입한 몽고군이 고려 승병들에게 쫓겨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이제 호국의 길을 벗어나 저승골로 들어서며 산행을 잇는다. 입구부터 임도 같은 널찍한 길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속이다. 길가에는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의자도 설치돼 있다. 연리목을 지나면 옛 진불암 터다. 차츰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좁다란 산길로 접어든다. ‘소원탑’이라 쓰인 팻말을 지나 너덜길을 오르면 로프가 설치된 비탈길. 전망이 트이며 지나온 저승골과 산골짜기를 헤집고 흘러가는 구수천이 뱀처럼 구불거린다. 건너편에는 만경봉과 헌수봉, 그 너머로 지장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1254년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이 승병들에게 쫓겨 떼죽음 당한 저승골 입구.
발걸음을 옮기면 이내 동릉 갈림길(한성봉 0.8km, 백화산 주차장 4.8km)이다. 100m쯤 진행하면 안부에 금돌성今突城 우물 터를 만나고 다시 산릉을 타고 오른다. 거칠고 험준한 능선 따라 무너진 성의 잔해가 어지럽다. 가파른 산길에 때로는 짧지만 로프가 걸린 까다로운 암릉을 만난다. 전망이 좋아 남쪽으로 뻗어 내린 주행봉 능선의 걸출함과 산태극수태극을 그리며 흘러가는 구수천의 모습이 장관이다. 반야사 갈림길 이정표를 만나면서 경사가 누그러지고 곧 한성봉에 닿는다.
백화산은 주봉인 한성봉과 남쪽의 주행봉(871.4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백화산맥이라고 부를 만큼 걸출한 산세를 자랑한다. 한성봉恨城峰은 금돌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몽고군이 물러가며 ‘한을 남긴 성과 봉우리’라는 뜻이다. 일제가 ‘백화산의 기를 사로잡는다’는 의미로 포성봉捕城峰으로 바꾼 것을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2007년 이름을 되찾았다. 산정에는 보기 드문 1등 삼각점(관기 11)과 3개의 표석, 이정표 등이 있다. 주변 풍경은 잎이 무성한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산은 북릉 금돌성 방향이다. 능선을 따라 내닫던 숲길은 922m봉을 지나면 칼날 같은 암릉을 만난다. 전망도 시원해 정면에 장군바위가 가깝고 그 뒤 왼쪽에 팔음산, 멀리 구병산이 희미하다.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한 굽이 살짝 내려섰다가 올라서면 장군바위다. 동쪽과 남쪽의 풍광이 막힘없이 시원하다. 남쪽에는 한성봉 산릉 뒤로 주행봉이 얼굴을 살짝 내민다. 동쪽에 보문골과 봉화대 능선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헌수봉, 만경봉 뒤로 지장산이 선명하다. 모동면 들판 너머로 멀리 속리산에서 황악산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도 아슴푸레하다.
대궐 터는 신라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전쟁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머무른 행궁 터다. 이끼 낀 석축에서 1,300여 년 세월의 흔적이 배어난다.
고려·조선시대 호국항쟁의 흔적 많아
능선 따라 이정표가 서 있는 득수초등 갈림길을 만나고, 허물어진 성터를 밟고 내려서면 금돌성이다. 이 산성은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과 태종무열왕(김춘추)이 백제 정벌을 위해 전진기지로 사용했고, 고려시대 몽고의 6차 침입(1254년) 때 황령사 승려인 홍지洪之의 지휘 아래 상주의 백성과 승병들이 자랄타이車羅大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곳으로 1978년 성벽 80m를 복원했다. 옥류대 갈림길 안부에서 대궐 터 쪽으로 향한다. 산행길 곳곳에 이정표가 설치돼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무너진 석축과 흩어진 돌무더기가 산재한 보문암 터에 이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뒤로하고 산허리를 돌아들면 대궐 터. 신라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전쟁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머무른 행궁 터다. 이끼 낀 석축에서는 1,300여 년 세월의 흔적이 배어나고, 무너진 샘터에서 솟는 샘물이 옛 역사를 말없이 전해 준다. 샘물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용추폭포는 볼품은 없지만 넓은 소沼에 담긴 물빛이 푸르다.
길은 다시 내성을 지나 계곡 길과 갈라진다. 계곡 길을 따라가도 나중에 임도와 만나게 된다.
한동안 계곡과 멀어지던 산길은 외성을 지나 가파르게 떨어지다가 계곡에 걸린 목교를 건넌다. 널찍한 산길에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 승용차도 다닐 수 있는 임도를 따르면 용추폭포 이정표를 만난다. 길에서 30m쯤 떨어진 계곡에 용추폭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주민들 중심으로 조직된 의병이 주둔하던 곳으로 용초 고모담이다. 폭포는 볼품이 없지만 넓은 소沼에 담긴 물빛은 푸르다.
보현사 절집을 지나 백화산 관광안내판과 화장실이 있는 입구에 다다르면 구수천 건너 백옥정이 보인다. 백옥정 아래 징검다리를 건너 옥동서원 주차장으로 돌아와 산행을 갈무리한다.
한성봉 동릉은 가파르지만 전망이 좋아 남쪽으로 뻗어 내린 주행봉 능선의 걸출함과 산태극 수태극을 그리며 흘러가는 구수천의 모습이 장관이다.
장군바위에 서면 동쪽 모동면 들판 너머 멀리 백두대간이 아슴푸레하다.
산행길잡이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옥동서원 주차장~백옥정~세심석~독재골 산장~출렁다리~저승골 입구~저승골(진불암 터)~소원탑~동릉 갈림길~옛 우물터~백화산 정상(한성봉)~장군바위~금돌성~옥류대 갈림길~보문암 터~대궐 터~임도~용추폭포~보현사 입구~징검다리~옥동서원 주차장 <약 14.5㎞. 6시간 30분 소요>
교통
산행 기·종점인 옥동서원이 있는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는 대중교통편이 불편하다. 수봉리마을은 상주시 서쪽 끝으로 상주 시내버스는 운행시간이 길고 운행 편수도 많지 않다. 여러모로 택시(황간택시 043-742-4242)를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요금은 2만 원 정도.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2길 29 옥동서원’을 목적지로 하면 된다. 옥동서원 앞에 무료주차장이 있다.
숙식(지역번호 043)
영동군 황간읍에서 숙식을 해결하는게 좋다. 황간역 인근에 힐탑모텔(744-9173)과 비취파크모텔(742-6001)이 있다. 황간의 먹거리로는 ‘올뱅이국밥’이 유명하다.
된장을 풀어 구수하고 시원하면서 얼큰한 국물에 올뱅이(다슬기의 사투리)와 시래기, 수제비를 듬뿍 넣어 내놓는다. 황간 우체국 인근 원조동해식당(742-4024)과 황간역 앞 안성식당(742-4203)이 많이 알려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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