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
은퇴 앞두고 귀향해 순창 백일주 복원… “누군가는 계승해야지 않겠습니까?”
다정한 부부가 빚는 술은 향기롭다. 도시 생활을 하던 임숙주&김수산나 부부는 순창으로 내려와 좋은 술을 빚으며 ‘인생 제2막’을 살고 있다.
전북 순창은 고추장의 고장이다. 고추하면 청양도 있고 영양도 있고 괴산, 음성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고추장’에서만큼은 순창이 독보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해답은 ‘발효’에 있다. 순창은 섬진강을 끼고 있는 분지 지역이다. 연중 기온 편차가 작고 일조량이 풍부한 반면, 습한 기후를 갖춰 장류 발효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식초 만들려다 전통주에 관심
“발효가 잘 되니 술도 좋을 수밖에요.”
‘지란지교’란 브랜드로 순창에서 전통주를 생산하는 ‘농업회사법인 친구들의 술’ 임숙주(65) 대표는 ‘어머니의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지금 이 양조장 자리가 제가 태어나 20대까지 자란 곳이에요. 어머니는 직접 누룩을 띄우고 식초를 만드셨어요. 누룩을 만들면 효모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효모라는 놈은 딱 집 안에만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가면 똑같은 재료와 방식으로 누룩을 만들고 술을 빚는다고 해도 맛이 달라져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만드는 술은 곧 ‘어머니의 효모로 빚은 술’인 셈이지요.”
처마 밑에서 잘 말라가는 누룩. 어머니의 손맛이 이어지는 비결이다.
임 대표는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 경기도 수원에서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정년퇴직을 몇 해 앞두고 그는 순창으로 귀향을 결심했다.
처음부터 술을 빚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2013년 귀향해서는 무화과 농사를 지었다. 순창에서 무화과라? 무화과는 해남, 영암 등 남쪽에서 주로 하는 재배하는 과일이다. 좀 의외다.
“남들과 다른 작물로 농사를 짓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무화과는 겨울 추위만 이겨내면 순창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순창에서는 처음으로 무화과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임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비닐하우스 3동에 1,000주의 무화과나무를 재배해 다른 남쪽 고장들보다 일찍 시장에 출하한 것이 주효했다. 지금도 순창에서 무화과 농사를 짓는 이는 임 대표가 유일하다.
무화과 농사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선 후 임 대표는 무화과로 식초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2015년, 순창전통고추장 민속마을에 있는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에서 시행하는 누룩제조과정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누룩으로 식초를 만드는 과정과 술 빚는 과정이 같았다. 자연스레 목표가 식초에서 술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순창 백일주를 배우기 위해 지역 주민들을 만났으나 문서로 기록된 ‘주방문酒方文(술 빚는 방법)’이 따로 없고, 구전으로 전하는 제조법도 제각기 달라 제대로 된 기술을 전수받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때는 집집마다 술 빚는 방법이 다르고 술 맛도 달랐어요. 술 빚는 비법을 절대 다른 집에 알려 주지 않았죠. 그래서 술 빚는 법은 가문에서만 비밀스럽게 전해졌고, 그나마도 일제 강점기에 많이 사라져 버렸죠.”
술 빚은 지 1년 만에 큰 상 받아
임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백일주를 빚어 봤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식초며 술 빚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자랐으니 완전 백지는 아니었어요. 술 빚는 DNA가 몸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임 대표는 기어코 ‘설주舌酒’라는 이름의 백일주를 만들었다. 설주는 ‘혀로 맛보며 풍류를 즐기라는 뜻’으로 직접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설주가 큰일을 냈다. 이듬해인 2016년, 대한민국명주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술 빚은 지 1년밖에 안 된 ‘초짜’가 대상을 받았으니 다들 깜짝 놀랐죠. 대한민국명주대상을 주관했던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님이 직접 순창에 내려오셨어요. 아마 진짜로 제가 술을 빚은 게 맞나 확인해 보려는 뜻이었을 거예요.”
박록담 소장은 양조장에서 임 대표와 아내 김수산나(59)씨가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며 행복하게 술을 빚으며 사는 모습을 보고 “이런 집에서 좋은 술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설주’라는 이름 대신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로운 사귐’이라는 뜻의 사자성어 ‘지란지교芝蘭之交’를 추천했다. 그렇게 양조장의 ‘지란지교’ 브랜드가 탄생했다.
임 대표가 만드는 술은 약주와 탁주, 무화과 약주와 소주다. 백일주를 복원한 약주는 순창에서 나는 찹쌀과 멥쌀, 직접 만든 전통누룩과 지하 791m에서 뽑아 올리는 천연암반수를 쓴다.
“전통누룩을 썼기 때문에 단맛, 신맛, 쓴맛에 더해 떪은 맛과 향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정제된 배양균인 입국을 쓰는 일본 사케가 주로 단맛과 신맛, 쓴맛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교되죠.”
지란지교는 멥쌀로 죽을 쑤어 식힌 후 누룩과 물을 부어 밑술을 만들고 찹쌀죽으로 만든 덧술을 혼합하는 이양주다. 막걸리와 약주는 100일 동안 발효하고 90일 동안 숙성시킨다. 술이 나오기까지 대략 6개월이 걸리는 것이다.
약주를 입에 머금는다. 신맛으로 시작되어 목 넘김 이후 단맛으로 입안에 남는다. 쓴맛과 떪은 맛도 여운을 남긴다. 충주의 청명주, 청주의 풍정사계와 마찬가지로 고급 화이트 와인의 느낌이 난다. 모두 쌀과 누룩, 물로만 빚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박록담 소장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주계에서는 ‘박록담류流’로 불린다.
무화과 탁주도 만들었다. 붉은색 술을 카네이션과 연관시켜 가정의 달 5월에 처음 선보였는데, 1,000병가량이 금방 동날 만큼 인기가 좋았단다. 보통 탁주보다 조금 더 달고 무화과의 향도 느낄 수 있어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단다.
임 대표는 가족의 화목을 기원하며 ‘가화당家和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강아지 때 부부를 따라 함께 귀농한 ‘꼬미’와 함께.
전통 질그릇 소줏고리로 내리는 소주
임 대표 부부는 모든 술을 수작업으로 만든다. 어느 것 하나 부부의 손길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기계를 사용하면 편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술에 들이는 정성이 줄어들 거란 생각에서다. 심지어 소주도 전통 소줏고리로 내린다. 스테인리스와 동으로 만든 대형 증류기가 보편화된 요즘, 우리나라에서 전통 질그릇 소줏고리로 내리는 곳은 제주 고소리주와 지란지교 소주 정도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누군가는 옛 방식을 계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종일 소줏고리 앞에 쪼그려 앉아 온도를 맞춰 가며 내려 봐야 겨우 몇 리터 나올 정도로 귀한 술이라 그런지 임 대표의 소주 사랑은 특별하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소주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립니다. 자연에서 난 곡물의 향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해요. 위스키 같은 양주는 오크향으로 술 본연의 맛을 감춰요. 술 본연의 맛을 음미하기에는 우리나라 소주만 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소주를 세계에 알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임 대표가 준비하고 있는 ‘비장의 무기’는 심혈을 기울여 내린 소주다. 판매용 소주에 비해 몇 배나 더 공을 들였다. 그야말로 장인정신으로 빚은 ‘작품’이다.
“세계술대회에 출품할 계획입니다. 대회에서 수상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전통 소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 자신도 있고요.”
양조장 한켠 항아리에서 잘 숙성되고 있는 이 소주는 귀한 것도 귀한 것이지만 대회에 필요한 양만큼만 빚어놓아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번에만 특별히’ 시음해 본 소주는 ‘술이 입에서 춤추고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무엇보다 입안에 풍기는 향이 이제까지 마셔본 소주 중 ‘역대급’이었다. 임 대표의 말대로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소주”다.
“저런 소주를 다시 만들어 판매하라면 그 가격도 매길 수 없거니와 너무 힘들어서 못 할 거 같아요. 하하”
현재 양조장이 있는 곳은 임대표가 나고 자란 곳이다. 건물은 새로 지었지만 어머니의 효모가 가득한 술도가다.
이웃과 정을 나누는 매개체 되길
임 대표는 “애초에 술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판매보다는 전통주를 계승하고 전통주를 빚는 문화 확산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 그가 순창 백일주 교육에 강사로 나서고, 백일주 제조법을 일일이 일기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술 빚는 재료의 비율과 방법은 물론, 그날의 기후와 온도, 습도 등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어떤 조건에서 술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지요. 이런 기록을 토대로 전통주 만드는 법을 과학적으로 정립할 수 있죠.”
임 대표는 “술도 음식문화의 하나”라며 “음식 만드는 법을 공유하는 것처럼 전통주 빚는 법도 세상에 다 공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술은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매개체입니다. 앞으로 전통주 문화가 더욱 확산되고 발전되어 지란지교의 매개체가 되길 기대합니다.”
친구들의 술 양조장
4인 이상부터 전통주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현재 코로나 시국으로 체험 가능 여부를 미리 문의할 것. 지란지교 제품은 네이버쇼핑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가격 지란지교 약주 17도(375㎖, 2만 원), 지란지교 탁주 13도(375㎖, 1만5,000원), 지란지교 무화과 탁주 12도(375㎖, 1만5,000원), 지란지교 소주(375㎖, 15만 원)는 물량이 확보되면 다시 판매할 예정.
문의 010-9533-1478.
양조장 지란지교 주변 산행지 아미산
다섯 명의 재상이 나올 명산…산세 작지만 바위 능선 지나는 재미 쏠쏠
아미산 정상부의 단일 화강암은 마치 인수봉을 축소해 놓은듯 비슷하게 생겼다.
양조장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아미산峨嵋山(515m)이 있다. 아미산은 정상부의 우뚝 솟은 단일 화강암봉이 마치 북한산 인수봉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아미산은 ‘다섯 명의 재상宰相이 나올 명산’이라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한 일본인들이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미산은 완주 대둔산의 삼선계단처럼 철재계단을 타고 암봉을 오르는 짜릿함이 있다. 작은 산세에 비해 능선에 바위가 많고 소나무 숲도 울창해 걷기에 좋다. 산행 들머리로 인기가 좋은 곳은 상죽리 또는 모토고개(못도고개)다. 두 들머리 모두 암봉을 올려다보며 오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경사도는 상죽리에서 오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상죽마을에서 신선바위 삼거리까지는 1.5km로 50분 정도 걸린다. 이곳에서 우측 0.5km 지점에는 배미산이 있다. 아미산의 작은 봉우리 정도인 배미산 정상은 특별한 것은 없으니 굳이 다녀올 필요는 없다.
삼거리에서 아미산 정상 방향으로 50m 정도 진행하면 거대한 신선바위가 있다. 여기서부터 바위지대가 시작되고 아미산의 매력이 발산된다. 너럭바위와 너덜바위 사이로 명품 소나무들이 고운 자태를 뽐낸다. 사다리 수준의 철재계단을 오를 때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짜릿하다. 발 아래로 보이는 대궐 같은 한옥단지는 순창의 대명사인 고추장마을이다.
고인돌바위를 지나면 금방 아미산 정상에 닿는다.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뚫려 순창의 진산 금산(433m)을 비롯해 회문산(837m), 용궐산(647m), 호남정맥 광덕산(584m), 섬진강 물줄기 너머 동악산(701m), 지리산까지 바라다 보인다. 하산은 ‘내동리, 고례리’ 방향으로 내려가면 금과전원주택단지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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