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너무 바쁜 나머지 이 문제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틈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중년기에 들어서면 알게 모르게 이런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한다고 칼 융(Carl G. Jung)은 말한다. 공연히 삶이 쓸쓸해지고, 허무하게 느껴지고, 하는 일이 의미가 없어지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강한 힘을 가지고 나의 중심으로부터 치솟아 오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화두로 삼고 바라보노라면, 이 문제는 자아정체성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외부의 환경에 반응하는 나의 성격에 관한 문제, 절대자(神)의 문제 등으로 한없이 확장되어 간다.
나는 누구일까?
육체가 나일까? 그렇다면 젊은 시절의 건장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나일까? 늙어서 쇠약하고 쪼그라든 육체가 나일까? 아니면 죽어서 흙이 되어 흩어져버린 먼지가 나일까? 아름다운 미인도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살이 깊게 파이고, 젊은이의 아름답고 강한 육체도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늙고 힘이 없어진다. 죽은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육체가 나의 일부분인 것은 확실하지만 본질적인 모습의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나일까? 어떤 사람들은 육체보다 생각이나 정신이 더 본질적인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나의 참된 생각일까? 어제의 생각은 오늘의 생각과 다르며 또 내일의 생각과도 다를 것이다. 생각도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항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참 나의 생각일까?
지금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사실 나의 본질적인 모습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진공 속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부모 형제라는 환경이 있고, 사회 문화라는 환경이 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주는 인생관, 가치관, 이념, 종교 등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소화하여 나의 에고(ego)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에고’는 참 나가 아니며 만들어진 ‘나’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만들어진 ‘에고’가 형성한 이념과 종교적 신앙과 욕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싸우고 있다. 본래의 내가 아닌 ‘만들어진 나’에 집착하여 고민하고 번뇌하고 싸우며 발버둥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바르게 명상하는 사람들은 ‘만들어진 나’를 벗어나서 ‘참나’는 누구인가를 성찰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생명도 자연의 순환 가운데에서 드러나 순간적인 삶을 살지만 이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만들어진 나’라고 할 수 있는 ‘에고’에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깨닫고 보면 사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라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에고의 욕구에 따라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에고의 집착과 욕구를 벗어나면 날수록 더 자유롭고 더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에고의 집착과 욕구에서 벗어나면, 어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있으나 없으나 웃으며 사세’라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명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바르게 명상하는 사람들은 만들어진 나의 모습인 에고를 벗어난 ‘참나’는 누구인가 하는 명제를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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