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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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다녀온 지 보름 만에 삼각산 찾아… 삼각산 기록은 많지 않아
1. 오랜 유람의 약속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산봉으로서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봉우리가 뾰족하게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각산은 산세가 수려해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쥐라기 말의 대보화강암(흑운모 화강암 또는 화강섬록암)으로 되어 있으며, 형상을 달리한 화강암 돔(granite dome)으로 되어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여 준다. 돔을 형성하는 산 사면의 경사는 대체로 70도 이상에 달한다.
백운대는 북한산(北漢山)의 최고봉이다. 이곳의 정상은 수백 명가량의 사람이 앉아서 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넓다. 서울 근교에 있어 도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인수봉은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된 경승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암벽등반 대상이다. 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라 호칭되었으며, 북한산을 대표하는 세 봉우리 중에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만경대 정상부에는 수평·수직절리 발달에 따른 토르가 형성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각산은 이정귀가 그랬듯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갔다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많은 사람이 산행을 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그리 흔치 않다. 이정귀의 <유삼각산기 <遊三角山記>를 제외하면, 이에 대한 기록은 성호 이익의 <삼각산 유람기>(성호전집 제53권)가 가장 자세한 편이다.
이익은 실학자답게 그의 글에서 삼각산의 산세와 모습을 소개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삼각산 백운봉의 남쪽에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중 인수봉은 더욱 깎은 듯이 가파르게 우뚝 솟아서 사람들이 기어오를 수 없고 바라보매 가장 빼어난 절경인데, 실로 오른쪽 두 봉우리와 나란히 우뚝하여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노적봉(露積峯)이고, 봉우리의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인데 중흥사(中興寺)가 거기에 있다’고 했다.
<유삼각산기>의 작자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인으로 자가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이명한(李明漢)은 그의 아들이다.
1600년 10월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5월 병으로 체직되었다. 8월, 다시 예조 판서가 되어 지의금부사, 도총관, 경서교정청 당상(經書校正廳 堂上)을 겸했다. 10월에 양관 대제학이 되었고, 11월에는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나오자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막후로 박동설(朴東說), 이안눌(李安訥), 차천로(車天輅) 등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도성을 나와 예조 판서를 사직해 체차되었고, 바로 이어 우참찬이 되었다. 1602년 3월에 평양 영위사(迎慰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대제학을 사직해 체차됐고, 8월에는 다시 예조 판서가 됐다.
1603년 8월에는 예조판서로서 함흥부 화릉의 수개 역사 (修改 役事)를 봉심하고, 그 참에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했다. 이때 그와 가까운 한호(韓濩)가 흡곡현령(歙谷縣令), 최립(崔岦)이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있었다. 이정귀가 금강산을 다녀온 기록인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상,하는 그의 문집인 <월사집> 권38(한국문집총간 제70책)에 수록됐는데, 그는 여기에서 금강산을 다녀온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 나라 안의 명산을 많이 유람했는데, 유독 관동(關東) 지역에는 발자취가 미치지 못했다. 벼슬이 급작스레 높아지고 나이가 점점 노쇠해지며 몸도 자유롭지 않으니, 오랜 염원은 더욱 더 어긋나 평소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계묘년(1603)에 함흥부(咸興府)의 화릉(和陵)을 보수하고 고치는 일이 있었는데, 반드시 예관(禮官)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陵)을 보살피고 일에 임해야 했다. 이때 나는 예조 판서(禮曹判書)였는데 가겠다고 매우 힘써 요청하니, 조정의 의론도 말리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안변(安邊)에서 흡곡(歙谷)과 통천(通川)을 지나 총석정(叢石亭)과 삼일포(三日浦)를 두루 유람하고, 이어서 유점사(楡岾寺)를 거쳐 금강산의 내산과 외산을 다 가보고자 했다.
석봉(石峯) 한경홍(韓景洪) 또한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어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함께 동문(東門) 밖에서 묵었다.(이하 원문번역은 고전번역원의 것을 이용함)
이정귀는 예조판서로서 화릉을 보수하는 일을 위해 관동으로 갔고, 간 김에 오랜 염원인 금강산 유람도 하게 됐던 것이다. 그가 금강산을 다녀온 날짜는 1603년 8월 1~30일이었고, 삼각산을 유람한 것은 1603년 9월 15일이었으니, 보름 만에 다시 삼각산을 찾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보고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서울의 명산 삼각산을 유람했던 일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이정귀의 삼각산 유람록인 <유삼각산기>는 그의 문집인 <월사집> 권38 기하(記下)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가 금강산을 유람한 직후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과 관직에 매여 있는 답답함을 삼각산을 다녀와서 달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서울에 사는 사람이 일상에 찌들어 있다가 훌훌 털고 삼각산에 올라 심신을 재충전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삼각산 유람이 부득이하게 혹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래된 약속을 그제야 실천하는 자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이정귀의 삼각산 유람은 특별한 것이었으니, 그의 유람록 첫머리에는 유람의 목적, 동기가 소개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로 나의 심정이 쓸쓸하여 즐겁지 않으니, 참으로 당(唐)나라 사람이 이른 바 “고개 돌려 현산을 바라보니, 마치 고향을 이별한 사람 같구나[峴山回首望, 如別故鄕人]”라는 격이었다. 한 해 동안 예부(禮部)에서 문묵(文墨)의 일을 접응하노라니 더욱 마음이 답답하기에, 연이어 세 차례 상소하여 해직(解職)을 청했다.
이정귀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에 금강산을 잊지 못해 마치 고향을 떠나온 사람처럼 심정이 쓸쓸하고 즐겁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맡고 있는 예조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답답해 세 차례나 해직을 청할 정도였다. 금강산에 다녀온 후유증이 매우 심각했고 이를 달래기 위해 삼각산 산행을 결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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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석에서 꾸려진 일행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답답해하고 있을 때, 마침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중흥사의 노승 성민(性敏)이 사미승(沙彌僧) 천민(天敏)을 보내 와서 삼각산의 단풍이 아름다우니 한 번 다녀가라는 전갈을 했다. 성민은 이정귀의 공문(空門)의 벗으로 삼각산 중흥사에 묵고 있는 노승이었는데, 그와 삼각산을 한 번 유람하기로 약속을 한 지가 오래됐다.
그는 금강산에 다녀온 지 달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삼각산 유람을 즉시 결정했던 그의 마음은 “내가 바야흐로 멀리 봉래(蓬萊)를 생각하며 신선처럼 표연(飄然)히 유람하고 싶던 터라, 이 서찰을 받자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즉시 신발을 손질하여 신고 서둘러 출발하기로 했다”라는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이정귀의 삼각산 유람은 즉흥적으로 이뤄졌고, 이에 따라 그 일행도 즉석에서 꾸려졌다. 그런데 금강산 유람할 때의 동반자가 적공(篴工) 함무금(咸武金), 아전 장응선(張應善), 화공(畫工) 표응현(表應賢), 예조 좌랑(禮曹佐郞) 이형원(李馨遠) 정도였으며, 나머지는 간성군수인 최립 등에 의해 현지에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각산 유람은 자신이 직접 불러 모았다. 유람의 동반자는 성민, 천민. 신응구, 적노 억량(億良), 계성도정(桂城都正) 자제(子齊), 박대건(朴大健), 이산수(李山守), 월사의 종자, 금수(琴手) 박모(朴某), 이용수(李龍壽) 등이다. 이 가운데에는 자신을 부른 중흥사의 중 성민과 그 사미승 천민을 비롯해 악사들이다. 악사들이 가지고 갔던 악기는 거문고, 젓대 등이다.
홀로 가자니 몹시 적적하여 한창 벗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신장 자방(申丈子方: 신응구(申應榘))의 서찰이 마침 당도하였기에, 내가 답장을 보내기를, “산승(山僧)이 단풍과 국화를 구경하자고 나를 초청하여 나는 이제 가니, 그대도 생각이 있으시거든 홍제교(弘濟橋)에서 서로 만납시다. 그리고 산중에 젓대가 없어서는 안 되니, 그대 집안의 적노(笛奴)를 데리고 오면 좋겠소”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젓대 잘 부는 하인이란 바로 억량(億良)으로, 젓대를 잘 불기로 장안에서 으뜸이며, 나와도 잘 아는 사람이다. 답장을 보낸 다음 생각하니 신장(申丈)이 나에게 서찰을 보낸 것과 내가 신장에게 가자고 요청한 것은 모두 미리 약속해 둔 것이 아니므로 신장이 꼭 온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이웃에 계성도정(桂城都正) 자제(子齊)가 있으니, 매우 풍류가 있는 공자(公子)이다. 그에게 같이 가자고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즉시 허락하고 심부름꾼과 함께 왔으며, 박생 대건(朴甥大健)도 따라왔다.
천민이 길을 인도하고 나와 자제는 각자 술 두 통을 가지고 필마(匹馬)와 아이 종 하나를 데리고 얼굴을 가리고 가니, 아무도 알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길에서 종자(從者) 한 사람을 보내 적공(笛工) 이산수(李山守)를 불러오게 했더니, 종자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악사(樂師) 이용수(李龍壽)에게 물으니, 산수(山守)가 없다고 하더이다” 했다. 나와 자제가 서운한 마음으로 길을 가다가 홍제교에 이르니 자방도 오지 않았기에 또 서운했다. 중흥사의 석문(石門)에 이르니, 자방이 바위에 앉아 있다가 맞이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오는 것이 늦었소? 우리가 기다린 지 오래요. 아쉽게도 적노는 남을 따라 잔치에 불려 갔다 하니, 그대의 서찰이 늦게 온 게 한스럽구려” 했다. 나는 뜻밖에도 자방을 만난 것이 다행스러워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이정귀가 산행의 동반자를 구함에 가장 중시한 것은 풍류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맨 처음 신응구에게 편지로 삼각산에 함께 갈 것을 청한 것은, 그가 마침 편지를 보내 와서 답장을 하는 김에 산행을 요청한 것이라 했지만, 신응구와 산생을 함께하려 한 실질적인 까닭은 사실 그의 종 가운데 장안에서 젓대를 제일 잘 부는 억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는 유람을 함에 있어 젓대를 부는 사람을 동반하려고 했으니, 그는 “산중에 젓대가 없으면 안 된다”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이정귀는 금강산에 갈 때에도 “나는 종은 데리고 가지 않고 단지 적공(篴工) 함무금(咸武金)만 데리고 갔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서로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지의 전달이 늦어져 신응구가 합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계성도정 자제에게 함께 가자고 했는데, 그가 매우 풍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그가 산행을 함께할 사람을 정함에 있어 풍류 있는 사람을 애써 골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피리 부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다고 여겨 악사 이용수 밑에 있는 적공 이산수를 불러오게 했던 것이다.
이정귀는 자신과 함께 간 노악사 이용수를 당(唐)나라 때의 이름난 악공(樂工)인 이귀년(李龜年)이라 했다. 두보(杜甫)는 ‘강남봉이귀년(江南逢李龜年)’이란 시에서 이귀년에 대해 “기왕의 댁에서 늘 보았더니, 최구의 집 앞에서 몇 번이나 연주소리 들었던가. 바야흐로 강남에는 풍경이 좋으니, 꽃이 지는 시절에 또 그대를 만났도다(岐王宅裏尋常見, 崔九堂前幾度聞. 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라고 노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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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류가 넘치는 산행
악사 이용수 아래에 있던 적공인 이산수는 다른 사람의 연회에 이미 초대되어 갔다 하여 포기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산수가 뒤늦게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금수인 박모도 함께 데리고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악사와 이산수, 그리고 거문고 타는 박아무개까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멤버가 더 늘어나 그 삼각산 유람은 더욱이 풍류가 넘치는 산행이 됐다.
신응구의 적노인 억량이 신평천 등과 술자리에 참석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자는 뜻을 전했다. 다른 사람들과 이미 어울리고 있던 억량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가 과연 그 모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온다 하더라도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정귀가 산문(山門)에 도착하여 월대(月臺)에 앉아 있노라니 어디선가 젓대소리가 들려 왔다고 했다. 바로 적량이 부는 피리 소리였던 것이다. 적량은 함께 산행을 가자는 이정귀의 말을 전해 듣고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샛길로 왔노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정귀의 풍류가 넘치는 산행이 이루어졌다.
가다가 민지암(閔漬巖) 동구에 이르자, 젓대 소리가 시내 쪽에서 들려오기에 자세히 들어 보니 억량의 소리 같았다. 종자가 가서 보았더니 과연 그였는데, 바야흐로 신평천(申平川) 등 제공(諸公)을 따라 술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종자를 보내 같이 가자고 일러두고 떠났다.
산문(山門)에 도착하니 해가 막 저물었다. 성민이 중들을 데리고 단숨에 달려와 반갑게 맞이하기에 그의 인도를 받아 월대(月臺)에 앉았다. 자제가 몹시 목이 말랐는지 술통을 열고 맑은 술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내게도 권하기에 함께 마셨다. 이때 어디선가 젓대 소리가 멀리서 가까이 오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와서 절하기에 보니 억량이었다.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느냐고 물으니 “종자의 전갈을 듣고 감히 늦을 수 없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샛길로 왔습니다” 했다. 나와 제군들이 몹시 기뻐 손뼉을 치고는 즉시 한 곡조 불게 하고,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상으로 주었다.
억량이 뜻밖에 산행에 합류하자 즉시 피리를 불게 함은 물론 술을 마시고, 등잔불을 밝히고 얘기를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흥이 더하자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고 했다. 그리고 젓대만이 아니라 거문고도 연주했는데, 젓대에 거문고가 어우러진 소리는 천고에 드문 소리라 했다.
취기가 오르자 더욱 즐거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으며, 거문고와 젓대가 어우러져 맑고 미묘한 음악을 연주하니 모두 천고에 드문 소리였다. 자방이 말하기를, “세 사람은 진실로 국수(國手)인데 오늘은 연주가 더욱 더 청절(淸絶)하기 이를 데 없으니, 어찌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그러한 것이 아니겠소” 하니, 세 사람이 말하기를, “경치만 빼어날 뿐 아니라 오늘 다행히 신선들의 모임을 만났으므로 저희들은 정취가 일고 음조(音調)가 절로 높아져 마치 귀신이 도운 듯했습니다” 했다. 해가 저물자 모두 일어나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었고, 술이 취한 뒤 길에서 말을 몰아가면서도 젓대 소리는 끊이지 않고 거문고 소리도 때로 연주되니, 행인들이 바라보고 신선인 양 여겼다.
이윽고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르자, 우리는 다시 흥이 일어 말 위에서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셨다. 황혼녘에 사령(沙嶺)에 올라 사람을 먼저 보내어 성문을 조금 뒤에 닫으라고 전갈했다. 성 밖에 이르니 장안 만호(萬戶)에 인적이 없고 달빛은 대낮처럼 밝았다. 동이에 술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니 아직도 많다기에 문장(門將)을 불러내어 자리에 이끌어 앉히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랐다. 흥겨운 음악이 몇 곡조 연주되고 우리는 취해서 돌아갈 줄 모르다가 집에 당도하니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었다.
이러한 풍류스런 자리는 날이 저물도록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날이 저물자 모두 일어나 춤을 추었다. 길에서 말을 몰아가면서도 젓대소리나 거문고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이정귀 일행을 보고 여러 사람들도 또한 신선인양 여겼다고 했다. 이토록 흥겨운 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지만,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산을 내려올 때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연주를 함께한 세 사람의 연주자, 즉 적노 억량, 적공 이산수, 금수 박모이다. 이들은 자방이 모두 국수라 추켜세운 뒤 경치가 좋은 데에서 연주하니 소리가 더욱 청절하다고 했다. 그러자 세 사람은 모두 자리가 신선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라 했다.
위에서 “유안(劉安)의 닭과 개가 흰 구름 속에서 울음소리를 내는 것과도 같았다”고 한 것은 <신선전(神仙傳)>에 ‘회남왕(淮南王) 유안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丹藥) 그릇을 뜰에 놓아 두었더니, 닭과 개가 핥아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조금 지나니 달이 앞 봉우리에 떠오르고 가을 하늘은 공활(空豁)하여 구름 한 점 없었다. 산은 텅 비고 골짜기는 고요하여 만뢰구적(萬籟俱寂)한 때에 맑게 울려 퍼지는 젓대 소리는 마치 구령(緱嶺)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밤이 이슥하여 제군들과 승방(僧房)에 함께 묵으며 등잔불을 밝히고 얘기를 나누노라니 함께 절에서 글을 읽던 소년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위에서 구령(緱嶺)은 구씨산(緱氏山)을 가리키는데,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왕자교(王子喬)는 생황을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냈는데, 신선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으로 들어가 도술을 배운 지 30여 년 후 백학을 타고 구씨산 마루에 올라가 며칠간 있다가 떠나 버렸다고 한다.
이정귀는 이때의 모임이 풍류가 넘쳐흘러 마치 신선세계에서 노니는 것과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신선의 흥취가 있었음을 “산은 텅 비고 골짜기는 고요하여 만뢰구적(萬籟俱寂)한 때에 맑게 울려 퍼지는 젓대 소리는 마치 구령(緱嶺)에서 들려오는 듯했다”고 마치 현실세계의 일인양 생생하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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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수세계(錦繡世界)의 유람
삼각산은 바로 도성 가까이에 있는 산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놀이도 신선세계에서의 놀음과 같다고 자타가 인정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정귀는 또한 그곳의 물소리와 기암괴석, 그리고 푸른 소나무 속에서 술을 마시고, 물고기를 잡는 등 매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결에 잔을 띄우고, 단순히 단풍을 즐기고 국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풍을 꺾어 머리에 꽂았고, 국화꽃을 따서 술잔에 띄웠다.
그때 삼각산의 산수가 매우 빼어나 사람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단풍은 단풍대로 더욱 곱고 아름다웠다. 이정귀는 지금 단풍이 한창이니 놀러 오라는 삼각산의 중 성민의 편지를 받고 불현 듯 산길을 결행했던 만큼 그곳의 단풍에 매료됐다. 그곳의 경치, 특히 단풍이 든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정귀는 이를 금수(錦繡)의 세계라 일컬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산영루(山映樓)의 옛터로 내려왔다가 이어 향옥탄(響玉灘)으로 갔다. 때는 첫서리가 내린 지 겨우 몇 밤이 지난 터라 단풍은 성성이의 피로 물들인 듯 붉고 푸른 솔과 노란 국화가 시냇가 골짜기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참으로 금수(錦繡)의 세계였다. 내가 자방에게 “성민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려” 하니, 자방이 웃으며 “그대가 나를 속이지 않았구려” 하기에, 내가 “그대도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구려” 하고는 서로 한바탕 웃었다.
이는 산영루 가까이에 있는 향옥탄 주변의 단풍을 묘사한 말이다. 이처럼 골짜기의 단풍을 만끽한 다음에는 산의 정상에 오르고자 했다. 인수봉은 오르는 것이 불가능해 백운대에 오르고자 했지만, 그곳도 길이 없어져 오르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노적봉이었다. 노적봉은 이익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삼각산의 세 봉우리는 아니지만, 삼각산 가까이에 있는 봉우리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노적봉도 오르기 어렵다고 그곳의 중이 말했는데, 박생이 노적봉을 오른다고 하니 이정귀가 이를 따랐고, 이정귀보다 열 살이나 많다며 오르지 않겠다고 했던 신자방도 훗날 이정귀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겠다며 함께 올랐다.
우러러보니 삼각산이 푸른빛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중을 불러 백운대(白雲臺)로 가는 길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난리 뒤로 왕래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 길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그쪽에는 거주하는 중도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노적봉(露積峯)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으나 봉우리 위쪽으로 올라가기는 어렵습니다” 했다. 내가 자방에게 “우리는 모두 이미 백발이 되었고 이번 길도 우연히 오게 된 것이니, 지금 와서 한 봉우리를 오르지 않는다면 뒷날을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자방이 “나는 그대보다 열 살이나 많으니, 가파른 봉우리를 오를 엄두나 낼 수 있겠는가”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 뒤의 작은 암자에 올랐다. 박생(朴甥)이 작은 길을 찾아서 노적봉을 오르려고 하기에 나도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랐다. 자방이 자제에게 “우리 두 사람만 뒤에 남아서 차마 월사(月沙)에게 놀림을 당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괴석(怪石)이 이리저리 길에 솟아 있어 열 걸음에 아홉 번 넘어지면서 봉우리 아래 당도하니, 가파른 바위틈으로 길이 비스듬히 나 있어 전혀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천민과 두 중이 먼저 올라가 바위 구멍으로 나무를 넣어 사닥다리를 만들고 띠를 늘어뜨려 사람들의 몸을 묶어서 끌어올렸다. 그러고서야 가장 정상에 오르니, 정상은 비좁아 겨우 10여 명이 앉을 수 있었고 정신이 아찔하여 아래를 굽어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서로 부축하고 의지한 채 조금 쉬고 바라보니, 서남쪽으로 대해(大海)가 멀리 펼쳐져 있고 뜬구름과 지는 해에 은세계(銀世界)가 망망하여 시력은 끝이 있을지언정 전망은 가없었다.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수락(水落), 아차(峨嵯), 관악(冠岳), 청계(淸溪), 천마(天磨), 송악(松岳), 성거(聖居) 등의 산들이 불룩불룩 자그마한 언덕처럼 솟아 있고 월계(月溪) 갈라진 골짜기로 세찬 물결이 서쪽으로 쏟아지고 한 가닥 한수(漢水)는 마치 흰 얼음이나 깁을 펼친 듯 완만히 굽이쳐 왕도(王都)를 감싸 흐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먼 봉우리와 들쭉날쭉한 섬들이 구름 사이로 은은히 보이는데, 노승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내게 보여 주며 “저것은 무슨 산이고 이것은 무슨 물”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때 정신이 황홀하여 분간하지 못하고 그저 “예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여기에서는 삼각산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묘사했다. 서쪽으로 큰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을 아득한 은세계라 표현했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이름난 산들을 소개했는데, 서울의 수락산, 아차산, 관악산, 청계산은 물론 개성의 천마산, 송악산, 성거산 등이 자그마한 언덕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물길로는 월계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것과 한강이 한성을 감돌아 흐르는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이밖에 구름 사이에 보이는 산과 물에 대해서도 그곳의 노승이 이야기해 주었으나 대답만 할 뿐 제대로 인지할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정신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정신을 빼앗은 것은 아마도 뛰어난 경치이기도 하겠지만, 한눈에 왕도를 굽어보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감흥을 그가 “도성 백만 호의 집들은 매우 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고, 보이느니 발아래 자욱한 저녁 연기가 한 폭의 생동하는 그림을 연출하는 것뿐이었으며, 구름 사이로 상투 같은 모습을 조금 내보이는 것은 종남산(終南山)이 틀림없었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이정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그때 이정귀의 모습은 예나 이제나 이 산을 찾아 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라 하겠다. 삼각산은 고금을 따질 것 없이 서울 사람들에게 지친 심신을 달래 주는 금수의 세계이고, 신선의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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