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고찰의 퇴락을 본 적 있는가
국보와 보물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 기행 6km
폭염을 가라앉힌 건 고요였다. 절에 들면 묘한 고요함이 시원한 물살처럼 밀려와 피부를 투명하게 감쌌다. 천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압도적으로 시원한 고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염보다 더 깊은 무게로 정갈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퇴계의 마중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속 시원하게 쏟아지는 흰 물줄기 옆에 예스런 정자가 있다. 정자 옆으로 폭포가 있어 원래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다. 허나 퇴계는 이를 문학적인 이름으로 바꾸었다. ‘물이 쏟아지는 정자’라는 일차원적인 이름에서 ‘옥구슬 소리가 나는 정자’란 의미의 입체적인 이름인 명옥대(鳴玉臺)로 바꾼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함께한 이는 천등산 입구가 고향인 안동 봉정사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김대기(48) 사무국장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명옥대에선 빨래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서 빨래하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처녀가 있었는데, 이후 명옥대에서 더러운 걸 빨면 불상사가 생긴다는 속설이 생겼다고 한다.
김대기씨는 인천에서 20년을 살다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 세미나와 숙박, 식당을 겸한 농촌체험센터를 짓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농사를 지으며 매년 가을 열리는 천등산 국화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가을이면 1만 평이 넘는 땅에 노란 국화가 만발해 장관을 이뤄 국화꽃 따기 체험과 국화차 시연을 할 수 있다. 국화차는 꽃을 따서 씻고 네 번을 쪄서 말리길 반복해야 하는, 손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한다.
안동을 대표하는 명찰인 봉정사. 1680년(숙종 8)에 세워진 만세루에서 경치를 바라본다.
능인스님이 수행했다는 천등굴.
퇴계가 후학을 가르친 명옥대 앞의 작은 폭포.
퇴계의 마중으로 격조 있는 산행이 시작된다. 웅장한 소나무숲을 따라 천등산에 든다. 김 국장이 어릴 적부터 있던 소나무들이니 최소 50년은 넘은 것들이라 일러 준다. 원래 천등산은 이곳 주민들에겐 송이명산이었다. 가을만 되면 집집마다 송이를 캐러 매일 산에 들었다고 하는데 기후변화 때문인지 5년 전부터 송이 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봉정사 일주문에서 절로 들지 않고, 우측 산길로 빠진다. 봉정사는 2점의 국보와 4점의 보물을 간직한 보배로운 사찰이지만, 하산길에 둘러보기로 한다. 빽빽한 소나무숲을 따라 오른다. 땀이 흥건해질 즈음 문득 시야가 트이며 개망초 초원이 나타난다. 개목사(開目寺)에 닿은 것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은 흥국사였다. 조선 초기의 재상인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서 보니 안동의 지세가 눈병 환자가 많을 형상이어서 개목사(開目寺)로 이름을 바꾸었더니 소경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가 10년을 머물며 공부했다는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원통전이 있다. 최근에 칠을 새로 하여 얼핏 봐선 예스런 모습은 없다. 허나 자세히 보면 지붕의 독특함을 알 수 있다. 뒤쪽 처마보다 앞쪽 처마가 더 긴 비대칭이다. 간결하고 단정하면서도 과감한 건축물인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봉정사 대웅전의 수려한 처마.
봉정사의 종.
과거 99칸의 큰 절이었던 개목사는 지금은 원통전만 명맥을 잇고 있다. 땀내 진동하는 산객을 인자한 미소로 형공 주지스님이 맞아 준다. 차 맛 또한 절을 따라가는지 단정하면서도 깊은 맛이 감돈다. 10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형공(炯空)스님은 “구경거리가 있다기보다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등산객들이 잠깐 쉬어 가는 곳”이라 낮추어 이야기한다.
개목사 오른편 능선에는 이곳 주민들의 해돋이 전망대가 있다. 천등산에 온 후 처음으로 먼 산들이 드러난다. 과거의 절터가 너른 개망초 꽃밭으로 바뀌어 시원한 경치를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개목사 덕분에 소경들이 없어졌다 하지만, 눈을 뜨고 있어도 실상을 보지 못하면 여전히 소경임을 개목사가 일러 준다.
다시 오름길로 돌아와 땀을 쏟아내면 능인(能仁)스님이 득도했다는 천등굴이 나온다. 의상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이곳 바위굴에서 수도할 때 천녀가 내려와 불을 밝혀 수련을 도와 득도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후 산 이름을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산(天燈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천등굴을 능인스님 대신 산신령 조각이 지키고 있다.
천등굴을 지나자 드디어 주능선을 만나고, 곧장 정상이다.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고 나무가 둘러싸 특별한 경치는 없다. 참싸리의 핑크빛 꽃망울이 로맨틱한 인사를 건네며, 경치의 즐거움을 대신한다.
국보 15호로 지정된 봉정사 극락전. 고려시대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개목사 옆 절터에서 본 안동 일대 풍경.
주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방향을 꺾어 하산길로 접어든다. 봉정사로 가기 위함이다. 급히 고도를 내려 절집으로 향한다. 척후병처럼 봉정사의 암자인 영산암(靈山庵)이 먼저 나와 반긴다. 암자에 들어서자, 밀도 높은 마당의 미학에 제압당한다. 이런 암자는 처음이다. 귀품 넘치는 반송이 있는 네모난 마당의 풍경은 아리따운 화폭 속에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비구니 스님의 염불 소리가 울리고 황금비율의 반송에 황금색 햇살이 와 닿는다.
매혹적인 나비가 나는 암자
매혹적인 무늬의 나비가 원추리꽃 사이를 미묘하게 날아다니는 작은 마당에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수백 년 된 목조 건물이 둘러싼 마당의 힘에 빨려든다. 다른 우주로 공간이동 하듯 여유롭게 퇴락해 가는 아름다운 공기에 말려든 것이다. ‘공간이 이렇게 곱게 늙을 수 있구나’ 독백을 내뱉고야 만다.
염불을 마친 비구니 스님이 단아한 미소로 맞아 준다.
“절이 특이하지요. 절집 양식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집 양식으로 지은 절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 오면 살고 싶다고 해요. 일본 사람들이 오면 며칠 묵고 싶다는 요청을 많이 해요. 과거에 한국 여인과 결혼한 일본 스님이 오래 머무른 적도 있어요. 소나무는 바위 사이에 싹을 틔운 것이 지금껏 자랐어요. 조선시대에 지어진 절인데 그때도 있었던 나무이니, 오래되었죠. 이곳에는 석가모니불과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나한이 다 있으니 과거와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 다 모셔져 있는 셈이지요.”
봉정사 입구에는 수령 50년이 넘은 우람한 소나무가 많다.
퇴계가 후학을 가르쳤다는 명옥대.
목조건물의 박물관이라는 봉정사(鳳停寺)에 들어선다. 국보와 보물이 수두룩하지만 단정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다.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를 것처럼 날개를 편 지붕의 대웅전과 절제의 미학을 담은 극락전이 눈길을 끈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하다. 극락전 앞에는 꽃으로 둘러싸인 탑이 있어 극락전의 수수함을 보완해 준다. 대웅전 앞에는 만세루가 있어 창을 통해 경치를 보는 듯 우아한 모양새다.
훤칠한 용모의 스님이 밭을 갈다 나온다. 주지 자현스님이다.
“능인스님이 여기서 공부할 때 천녀가 내려와 밤에도 공부에 지장 없도록 등불을 밝혔다 해서 천등산입니다. 국보와 보물이 여러 점이라 발 뻗고 못 잘 정도로 관리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요.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고 산다는 보람이기도 하고요.”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돼 이곳에 내려 앉아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자현스님은 이는 잘못된 것이라 얘기한다. 부석사보다 4년 먼저 창건되었기에 이치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목조건물의 역사 또한 200년 이상 오래되었다고 일러 준다.
절의 깊은 기운 덕분인지 주변 나무들도 연륜이 있다. 수령 470년이 넘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가족과 바위 위를 완전히 점령한 느티나무 가족, 200년이 넘은 소나무 등 전설 몇 개쯤 예사로 지녔을 법한 고목이 널렸다.
봉정사 일주문을 빠져 나간다. 산행을 한 것인데, 몸에서 땀 냄새보다 향냄새가 난다. 천년 세월을 빠져나와 속세로 든다.
산행 길잡이
산행보다는 고찰 문화재 투어에 가깝다. 높이 575.5m의 천등산은 수더분한 육산이라 화려한 볼거리는 없다. 다만 국보와 보물이 수두룩한 유서 깊은 사찰 문화재를 둘러보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여느 산보다 깊이 있는 산행이 가능하다.
긴 산행을 원한다면 정상에서 상산까지 종주하기도 하지만, 개목사와 영산암, 봉정사를 모두 둘러보는 짧은 원점회귀 산행이 일반적이다. 봉정사 주차장에서 문화재 관람료 매표소를 지나 봉정사로 들어서면 된다. 문화재관람료는 2,000원이며 65세 이상은 무료다.
매표소를 지나 왼쪽 계곡으로 들면 명옥대가 있다. 봉정사 일주문 앞에서 오른쪽 산길로 들어 개목사 방향으로 간다. 개목사에서는 우측 길로 조금만 가면 시야가 트인 너른 전망 터가 있다. 산행 중 유일하게 시야가 깨끗하게 열리는 곳이다. 개목사에서 다시 능선으로 돌아와 오르면 천등굴에 닿고 여기서 정상이 지척이다.
정상에서 상산 방향으로 능선을 따르다 파란색 천막을 지나 ‘수릿재’ 이정표에서 하산길로 들어서면 영산암에 닿는다. 영산암과 봉정사는 붙어 있다. 총 산행거리는 6km이며 문화재 관람시간에 따라 소요시간은 천차만별이지만 산행만 놓고 본다면 3시간이면 충분하다.
교통
안동버스터미널에서 봉정사행 51번 버스가 하루 7회(06:10, 08:25, 10:40, 12:50, 14:50, 17:20, 19:00) 운행한다. 봉정사에서 안동버스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 역시 하루 7회(06:50, 09:20, 11:30, 13:40, 15:40, 18:00, 19:20)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54)
봉정사 입구에 식당이 여럿 있다. 별천궁(857-4168)은 안동간고등어정식(1만 원) 전문점이다. 봉정사 매표소 앞 황토집손두부(855-3263)는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손두부 요리를 내어놓는 서후면 면서기가 추천하는 맛집이다. 생선과 해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민경씨 부부가 가꾼 농산물로 식탁을 차린다. 주메뉴는 두부전골로 대파, 양파 등 다양한 채소를 푸짐하게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팽이버섯, 느타리, 표고, 사리버섯, 새송이와 두부와 양념을 더해 육수를 넣고 끓인다. 버섯향과 손두부 특유의 구수함이 어우러져 맛이 깊고 깔끔하다.
숙소는 팔각형 목조건물이 인상적인 만휴게스트하우스(855-2268)와 봉정사길200(010-8854-5602), 죽헌고택(010-5217-2174) 등이 있다.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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