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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설악산 속살 들여다보기 | 한계산성

by 白馬 2016. 7. 29.

설악은 사람도 살려냈다

 

 

설악산명승학교 첫 답사… 몽골 침입 막아낸 한계산성 찾아

설악산은 대한민국에서 산세와 풍광이 가장 빼어난 산이라 해도 이의를 달 이 한 명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한계령에서 서북릉을 거쳐 공룡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큰 축으로 중청에서 귀때기청봉을 거쳐 안산으로 이어지는 서북릉, 대청봉에서 권금성이나 송암산으로 이어지는 화채릉, 마등령에서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북주릉’ 등 힘차면서도 경관 빼어난 능선을 동서남북으로 뻗고 있다. 여기에 천화대 암릉, 칠형제봉, 용아릉 등 곁가지 친 수많은 암릉이 산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 주고 있는 것이다.

설악은 단지 이러한 아름다움만 지니고 있는 산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산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민초들은 서북릉 서쪽에 안산(鞍山,430m) 남쪽 성골 일원의 험난한 바위능선과 암벽을 인위적인 성과 연결해 산성을 구축하고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 한계산성(寒溪山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의 둘레가 6,278척(1,902m), 높이 4척(1.3m)이라 기록, 제법 규모 큰 산성이었음을 가늠케 한다.

한계산성에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신라 경순왕 때 고려와 후백제군이 대치해 혈전을 벌였고, 경순왕이 성 안의 망경대에서 망해 가는 신라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다. 사실적인 기록도 전해진다. <고려사> ‘조휘열전’에는 고종 46년(1259) 몽골군과 조휘(趙暉)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 성을 공격했으나, 산성방호별감 안홍민(安弘敏)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출격해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계산성은 1973년 강원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사적 승격지정을 준비 중에 있다.

천제단에서 기념촬영한 한계산성 답사팀.

천제단에서 기념촬영한 한계산성 답사팀.

 

몽골군 침략에 대비해 쌓은 입보산성

5월 28일 지역주민,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 기자 등이 참가한 한계산성 답사는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김남돈 학예연구사가 해설을 맡고, 인제군청 윤형준(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씨가 동행하며 참가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옥녀탕(玉女湯)은 한때 설악산 최고의 관광명소 중 하나였으나 1994년 탐방로 폐쇄 이후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계곡 길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단지 산성 발굴팀과 보수팀들이 답사와 공사를 위해 다닌 길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주차장을 출발해 10분쯤 올랐을까, 물줄기 왼쪽 사면에 온전한 형태를 갖춘 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줄기 건너 사면으로 올라서자 모습을 드러낸 성벽은 한가운데 성문도 있었다. 골짜기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문인 남문(南門)이었다.

1 하성 남문 앞에서 한계산성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김남돈 학예연구사. 2 답사 산행에 앞서 옥녀탕주차장에서 민병준 총괄대장이 개념도를 보면서 한계산성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 하성 남문 앞에서 한계산성의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김남돈 학예연구사. 2 답사 산행에 앞서 옥녀탕주차장에서 민병준 총괄대장이 개념도를 보면서 한계산성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계산성은 안산을 중심으로 서북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암릉을 자연성 삼고, 성골을 가로지른 인위적인 산성을 이은 산성이다.

“1984년 조사 때 상성과 하성 둘로 나뉘어 조성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산아래 마을주민들이 ‘대궐터’라 일컫는 곳이 상성인데, 하성보다 먼저 축성됐습니다. 산성 축성의 정확한 역사를 찾아내려면 성벽 바닥부터 들쳐봐야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김남돈씨는 하남 이성산성을 예로 들면서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측하고 12년 동안 발굴조사를 해왔는데 실제로는 신라와 고구려 유물만 발견됐다”며 “아직도 이성산성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인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어 “한계산성은 신라 때 처음 쌓았으리라 추측되는데, 몽골 침입 때 급히 험한 곳까지 올라가 상성을 쌓고, 하성도 제대로 구축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성벽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남문을 지나지 않고는 성 안으로 들어서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남문은 문을 달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고, 문 뒤쪽 커다란 바윗덩이는 적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경우에 대비해 어디선가 옮겨 놓은 듯했다. 김남돈씨는 “고려 때 산성이지만 신라 통일신라 때 축성 양식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남한산성은 생활이 가능하게 대장간까지 갖추고 있지만, 한계산성은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식량과 생활도구 등을 챙겨 산성 안으로 들어가 적들이 물러갈 때까지 주둔하면서 방어 하는 입보(入保)산성이에요. 잠시 피신해 있는 곳이었던 게죠.”

김남돈씨는 1231년 즈음 몽골 침입에 견디다 못해 조정을 강   화도 고려성으로 옮기면서 각 지역 주민들에게 산성으로 피란할 것을 명했다”며 “그때 방성사를 파견해 성을 쌓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고 보충설명해 주었다.

김씨는 “한계산성은 아름다우면서도 험난한 자연 조건과 인위적인 산성을 잘 연결시켜 만든 산성”이라며 “용인 처인성과 충주성을 포함해 몽골의 침입을 이겨낸 몇 안 되는 산성”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1 상성의 망루에서 서북릉을 바라보고 있다. 2 천제단 직전 자연성벽을 오르고 있는 답사팀. 인제군청 윤형준씨가 앞장서 안내하고 있다.

1 상성의 망루에서 서북릉을 바라보고 있다. 2 천제단 직전 자연성벽을 오르고 있는 답사팀. 인제군청 윤형준씨가 앞장서 안내하고 있다.

 

한계산성은 1990년대 초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복원 및 보수 공사를 해왔다. 특히 2006년 설악산 일원을 강타한 집중폭우 때는 남문에 흙이 가득 찼고 붕괴된 성도 여러 곳이었다. 이후 보수를 여러 차례했지만 작은 자연재해에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돈 받고 일하는 인부가 만든 성과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만들어진 성이 같을 수 있겠어요? 축성 이후 7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몽골군이 얼마나 흉악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안전요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명승학교에서 준비해 온 안전벨트와 헬멧을 착용한 참가자들은 민병준 총괄대장의 인솔에 따라 상성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릉을 거슬러 오르자 기암괴봉과 절벽이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는 안산 남쪽 일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계천 너머 가리봉도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정말 대단한 경치 아니에요? 치마바위, 안산, 고양이바위가 다 보이잖아요. 저게 다 한계산성이에요. 저길 어떻게 넘어올 수 있었겠어요.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설악행각>에 십이선녀탕에서 안산을 넘어 성골로 내려섰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안산 뒤편으론 그래도 산세가 유순한가 봐요. 아무튼 한계천 방면에선 산세가 험해 어림도 없는 일이죠.”

김남돈씨의 산성 해설에 이어 윤형준씨는 설악산 지명의 변천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윤씨는 “‘한계산’, ‘가리봉’이란 지명이 조선시대 지도에 크게 나와 있다”며 “설악산이란 지명은 1910년 이후 지명이며, 옛날 선비들은 ‘한계산’, 지역 주민들은 질마산이라 불렀다”고 전해 주었다.

가리봉 방면에서 바라본 한계산성 구역.

가리봉 방면에서 바라본 한계산성 구역.

 

“한계령을 두고 고갯마루 양쪽에서 달리 불렀어요. 한계리 사람들은 한계령이라 불렀지만, 오색 사람들은 오색령이라 불렀어요. 한계산성도 마찬가지예요.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산성’으로 기록돼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성(古城)’으로 기록된 이후 고성으로 불렸어요. 지명이란 것은 딱 하나로 굳을 수 없어요. 지리적 상황,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거예요.”

윤형준씨는 “이번 답사는 설악산국립공원관리소의 협조 하에 이루어졌다”며 “문화재는 관리보수와 함께 등록되는 순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야 할 의무도 있는데 1994년 국립공원 법정탐방로에서 제외되면서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망을 즐긴 다음 또다시 거칠고 가파른 바윗길을 올려치기 시작하자 민 총괄대장은 “여기서 추락하면 답이 없다”며 긴장을 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약 25m 길이의 슬랩바위를 올라서자 앞으로는 안산, 뒤로는 가리봉이 멋들어진 풍광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밧줄이 여러 가닥 매달려 있는 가파른 바위 구간이 나타나고 트래버스 구간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다시 슬랩바위가 나타나 긴장케 했다.

이렇게 험난한 바위 능선을 올려친 뒤 돌탑 세 기가 나란히 세워진 능선마루에 올라섰다. 천제단(天祭檀)이다. 안전을 기원하는 성소(聖所)이기도 하지만, 산아래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대 역할도 한 곳이다.

성골 들머리를 장식한 옥녀탕. 한때 내설악을 대표하는 명소였다.

성골 들머리를 장식한 옥녀탕. 한때 내설악을 대표하는 명소였다.

 

“이렇게 험한 산성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한계산성이 유일할 거예요. 천제단 위쪽이 내성, 즉 상성이에요. 이런 곳에 성을 쌓고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한계산성을 답사하면서 산성 발굴팀과 보수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요즘도 누군가 이곳에 올라와 제를 지낸 흔적이 있곤 해요. 약초꾼 아닐까 해요. 처음엔 외침을 막아내기 위해 쌓은 곳이지만 이젠 성황당의 역할을 하는 거죠.”

김남돈씨와 윤형준씨의 얘기를 듣는 사이 이렇게 험악스런 산릉에 산성을 쌓자니 얼마나 힘들었을 것이며, 또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기에 추락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 산성을 쌓았겠는가 싶어졌다.

주최 측이 마련해 준 김밥과 간식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답사단원들은 천제단 뒤쪽 능선을 따르다가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분지를 이룬 대궐터였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한계산성을 상성과 하성으로 나누어 부르고, 대궐터란 지명도 나와요. 이곳에서 상감청자 같은 고려 때 유물도 나오고, 송나라 동전도 발견됐어요. 기와 조각은 한계리 와둔지(瓦屯地)에서 발견된 것과 같아요. 결국 한계리에서 구운 기와를 이곳에 가져와 사용했던 거죠. 식수 마련이 매우 힘든 일이었을 거라 추측돼요.”

김남돈씨는 “대궐터 아래쪽에 빗물을 모으기 위해 만든 집수지 흔적도 발견했다”며 “지금은 멧돼지의 목욕탕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대궐터에서 가파른 사면을 올려치자 또다시 망루 같은 암릉 위에 올라선다. 안산 일원은 물론, 이제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릉과 그 오른쪽으로 한계령 뒤쪽 망대암산 일원까지도 바라보였다. 이 암릉을 타고 오른쪽 장수대 방향으로 계속 내려서면 동문이 나온다고 한다. 동문을 빠져나가면 장수대로 내려설 수 있지만 너무 험해 일반인 대상 답사는 어렵다고 한다.

1 하성 남문. 문을 달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2 천제단. 제를 지내고 망루 역할도 하는 곳이다.

1 하성 남문. 문을 달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2 천제단. 제를 지내고 망루 역할도 하는 곳이다.

 

답사단은 다시 대궐터로 내려선 다음 능선 뒤쪽 가파른 사면을 따라 성골 물줄기로 내려섰다. 물가 널찍한 분지형 터는 ‘건물지’였다. 김남돈씨는 “이곳을 비롯해 하성 일원에 이르기까지 건물지가 18개소 발견됐다”며, “몽골군이 철수하기 전인 1358년까지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김남돈씨 말에 의하면, 한계산성은 몽골군 철수 이후에도 인제 지역에서 중요한 지휘부 역할을 하는 곳이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하성은 조선 초까지 산성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한계산성 답사단원들은 건물지 답사를 끝으로 하산길에 들어섰다. 골짜기는 밑으로 내려설수록 오히려 더욱 깊어지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험난한 곳에서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산성을 쌓고, 몽골군과 싸우느라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생각하니 착잡해졌다. 그래도 설악이 아름다움 외에 사람의 목숨도 지켜낸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고맙다 싶었다.

산의 가치를 경관에 둘 것이냐, 아니면 산림 혹은 생태자원에 둘 것이냐 또는 역사자원으로 볼 것이냐 등, 관점에 따라 감흥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픽] 설악산 한계산성 개념도
 

설악산 명승학교

5~11월 매달 1~2차례… 각 분야 전문가 동행

[설악산 속살 들여다보기 | 한계산성] 설악은 사람도 살려냈다

 

문화재청과 인제군청이 후원하는 ‘2016 생생문화재 사업’의 하나인 설악산명승학교(총괄대장 민병준) 행사는 2016년 5월부터 11월까지 매월 1~2차례 당일과 1박2일로 진행된다.

십이선녀탕·대승폭포·수렴동·구곡담·만경대·봉정암 등 설악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고고학·한문학·국문학·지질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동행해 ‘설악명승순례’, ‘명승에 어린 선비의 향기’, ‘명승문학기행’ 등의 주제로 현장 강의를 진행한다. 하반기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의 만남, 설악산’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인원은 선착순 20명, 참가자격은 등산인, 지역주민,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다. 참가비 무료. 자세한 참가안내와 신청은 네이버카페 ‘명승학교’(http://cafe.naver.com/gomsschool)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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