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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낙안읍성

by 白馬 2009. 3. 12.

 낙안읍성

 

“이제부터 여러분의 멋진 여행이 시작됩니다. 가장 최고의 여행은 안전한 여행입니다”

서울역을 떠나는 열차는 이와 같은 안내 방송으로 승객들을 맞는다. 쾌적한 승차감과 창밖으로 보이는 시원한 경치의 기차 여행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매력이 있다. 고속열차  KTX를 타면 대전까지 1시간 만에 주파해도 경치는 계속된다.


1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했다. 하지만 대합실 앞에서 마주치는 노숙자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단무지 다섯 쪽에 낯모르는 사람과 합석해서 먹는 우동 맛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역 주변에서는 손님이 왕이라는 등식이 통하지 않는 사실도 그대로다. 호사스럽고 편리해진 삶에 비례하지 않는 일이 한둘이 아니건만, 오히려 그래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아닐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무전여행 떠나던 시절. 서울역에서 천안까지 온종일 걸려서 가던 기억이 있다. 아주 작은 간이역조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느리고 값싼 완행열차를 타면 먼저 온갖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이 필수다. 그 속에서 밥을 먹기엔 어쩐지 무전여행답지 않다는 이유로 첫날부터 허기를 참아야 했다. 능숙하지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김밥과 음료수, 계란 등을 파는 그때의 승무원들 표정을 떠올려 본다. 옛 생각이 일어나는 가운데 창밖엔 시속  300km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얼마 전에 오랜 관록을 지닌 대중가수에게 요즘 노래가 한없이 흥겨워져도 감동이 없단 말을 들었다. 공감이 간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마저 우리 앞의 현실인 걸.

변하는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있다. 바로 전통과 민속이다. 500년 역사의 조선시대가 가는 동안 지켜져 온 전통을 보면 살짝 송구스러움이 느껴진다. 시대의 거울이 되어 온갖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편린들. 아마도 그것은 편리함과 바꿔진 모든 것들일 것이다. 


▲ 1 조선시대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2 정갈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은 은행나무. 3 단아함이 담겨져 있는 초가삼간. 4 남문 성곽에서 금전산을 바라보면 초가집들이 무엇을 닮았는지 알 수 있다.
사라지지 않는 것, 전통과 민속

전라남도 순천의 낙안읍성은 현대에 남겨진 조선시대 민속촌 중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올망졸망한 모습의 초옥 100여 호가 모여 있는 모습은 과거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갖도록 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성안 풍경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가을이면 지붕마다 누런 호박이 주렁주렁 열리고 감나무, 모과나무 등 도시에선 접할 수 없는 과실들이 시골 분위기를 한껏 북돋워 준다. 봄철엔 매화, 동백,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등이 어우러지는 고향의 봄을 연출한다. 300년이 넘도록 힘찬 기운을 잃지 않은 은행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등 노거수들은 낙안읍성이 세트가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조 4년(1626년)에 낙안성이 세워졌으니 이런 나무들은 처음 심어진 자리에서 그대로 자라고 있는 셈이다.

주말이면 낙안성에 온 사람들을 위한 놀이마당이 열린다. 가야금 병창, 장구놀이, 사물놀이, 품바 공연에 판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농작물을 재래식으로 재배하는 과정이 오히려 문화재보다 더 값지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시대 이후, 생활에 담겨진 오래된 지혜를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낙안읍성의 모든 유·무형 자산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낙안읍성엔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등의 마을이 있다. 세 마을이 합쳐 낙안읍성을 이루고 있다. 작다고 할 수 없지만 헤아리기 힘들 만큼 넓지도 않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의 민속과 전통이란 바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성 앞으로 흐르는 작은 냇물에 빨래하던 아낙들의 모습과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떠올리면 1970년대 이전 시대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쇠퇴기를 거친 낙안읍성은 1980년대 초까지도 낙후 지역에 불과했다. 온 나라의 지붕을 바꿔 놓았던 새마을운동의 열풍에도 주민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지어진 집들은 당연히 철거 대상이었지만 이들은 새 집 지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좋은 집의 개념이 바뀌자 낙안읍성은 거꾸로 보호대상이 되었다. 이후 1983년 6월 국내 최초로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 복원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때로는 흑백으로 담는 것도 요령


높이 4m, 너비 3∼4m에 총 둘레 1,410m의 크기를 지닌 낙안읍성은 정확한 축조 연대를 알 수 없다. 고려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년(태조 6년)에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세종실록엔 1424년 9월부터 토성을 석축으로 쌓으면서 본래보다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안에는 우물 2개에 연못은 파지 않았고 옹성은 그 후에 설치했다. 동서 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에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1536년(중종 31년)에 지은 객사(客舍)와 대성전 등의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임경업 장군이 15세 때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여지승람에 낙안성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장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낙안읍성을 제대로 기록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조선시대를 연상하는 것이 다. 지금은 난방구조가 바뀌어 굴뚝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정경은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정겹고 소담스러운 옛 풍경을 보는 건 그리 힘들지 않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은 그리움을 담고 있다. 거기엔 부모, 형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뿌리 내리고 있다.


꽃샘추위를 한 차례 더 겪어야 하지만 봄은 이미 다가오고 있다. 금전산 아래 380년 동안 변치 않고 자리를 지켜온 낙안읍성. 서문에서 성곽을 따라 남문으로 발길을 옮기다 계단 쉼터에서 마을을 한 번 굽어보자. 향수 어린 봄바람이 그 아래 살랑대고 있을 테니.


▲ 높지 않은 담장에 넓지 않은 길과 초옥의 조화. / 과거 우리 삶의 자화상과도 같은 모습.

낙안읍성 촬영 가이드


전국에는 여러 민속마을이 남아 있거나 현대에 와서 재현되고 있지만 그 중 낙안읍성이 조선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낙안읍성의 촬영은 그래서 최대한 과거의 분위기가 나도록 찍는 게 요령이다.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흑백사진으로 찍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계절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기록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낙안읍성은 성곽을 따라 전체를 조감한 후에 동문에서 서문을 관통해가면서 찍는 순서가 무난하다. 초가로 이루어진 읍성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포인트의 하나는 서문에서 성곽을 타고 걷다가 남문으로 방향을 돌리면 나타나는 계단이다. 이곳에서 그 옛날의 마을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그 다음엔 남문 부근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초옥과 산이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찍을 수 있다. 이후 다시 동문에서부터 세부적인 요소들을 보면서 촬영하면 좋다.

낙안읍성의 또 다른 촬영요소는 명절 때 볼 수 있는 갖가지 민속놀이다.  과거에 사라졌던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놀이들을  살펴볼 수 있다. 낙안읍성을 촬영할 때 필요한 렌즈는 17mm 광각에서 200mm  망원까지 다양하게 필요하다.



낙안읍성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 기준)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전에서 통영 간 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를 거쳐 순천 IC로 빠져나간다. 이후 벌교를 거쳐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간다. 벌교에서부터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갈 경우 송광사 나들목에서 벌교 방면 27번 국도를 타고 낙안읍성으로 갈 수도 있다.      글·사진 손재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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