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광을 찾아서] 섬진강변·피아골의 이른 봄
피아골 얼음장 밑에서 울려퍼지는 봄노래-
“물은 만물의 다른 형태”라고 말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인 탈레스다. 그의 통찰은 “비가 내릴 때마다 땅에서 식물의 싹이 트는 것”으로 ‘증명’된다. 비슷한 시기 중국인 노자는 ‘으뜸의 선(善)’을 물에 빗댔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이때의 선은 도덕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을 이어붙이면 이렇게 될 것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궁극적 혹은 초월적 실재.
- ▲ 봄을 맞이하는 겨울의 표정이 영롱하다.
- 물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지구 자체가 물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물알갱이도 한때는 땅의 구성원이었을 먼지와 공존한다. 강물을 대지의 핏줄이라고 말하는 건 비유이기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다. 대양의 파도는 지구의 맥박이다. 화성에 생물이 살았을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도 물이 흐른 흔적을 근거로 한다. 물은 지구의 자궁이다.
허공에서 동면하던 폭포가 잠에서 깨어나 계곡의 얼음장을 간질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봄은 시작된다. 최초의 산통이다. 얼음과 대지의 숨 막힐 듯한 뜨거운 포옹이 끝나는 순간이다. 나무들도 기지개를 펴고 조심스럽게 가지 끝으로 물을 끌어올린다. 봄비보다 먼저, 더 은밀하게 대지를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듯 미세한 물의 움직임을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끼기 힘들다. 인간의 감각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에서 보듯, 지나치게 시각 의존적이다. 시각의 지각범위가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넓긴 하지만 '오관의 총아'라고 말하는 건 과장이다. 기억의 복원능력은 후각이 월등하고, 미세한 변화에 대한 감지능력은 촉각이 앞선다.
봄의 낌새, 기미, 기운, 징후를 눈치 채는 능력은 촉각이 가장 앞선다. 절기상으로 입춘이 지나도 시각적으로 완고한 겨울의 표정 속에서 봄을 읽는 능력은 차가운 바람 속에 섞인 어떤 느낌을 포착하는 촉각에 있다. 인간의 봄 마중이 유난히 부산스런 까닭은 다른 생물에 비해 계절의 변화에 대한 지각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 ▲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그립다.
- ‘진종일 봄을 찾았건만…’
진종일 봄을 찾았건만 봄을 볼 수 없었네
짚신이 다 닳도록 온산을 해맸건만.
돌아와 매화 향기에 미소 짓나니
봄은 이미 가지마다 활짝 피어 있네.
盡日尋春不見春
芒 溪踏遍?龍頭雲
歸來笑拈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봄이면 흔히 인용되는, 연대 미상의 어느 비구니가 남긴 선시(禪詩)다. 물론 이 시는 섣부른 말을 붙여서는 안 될 오도송(悟道頌)으로, '봄을 찾는다'는 것은 '나를 찾는다'는 뜻이다. 용감하게 한 마디 하자면 깨달음이란 결코 일상의 삶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말이겠는데, 여기서 나는 이 시가 애당초 노리지 않았을 두 가지 의미를 읽어 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비록 봄을 찾지는 못했지만 짚신이 다 닳도록 산을 헤맨 일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봄이면 당연히 피어났을 여느 해의 매화를 보는 감흥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 ▲ ‘해탈’이란 이런 것. ‘내’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온전히 ‘네’가 되는 것.
- 또 하나는 '짚신이 닳도록 진종일 봄을 찾는' 과정에서 왜 눈으로 보아야만 했을까 하는 점이다. 시에 표현됐듯 집으로 돌아와 아뿔싸 하고 느낀 깨달음의 순간을 먼저 차지한 것도 눈이 아니라 코가 아니었던가. 이런 나의 의문은 얼토당토않은 구석이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니 적극적으로 오독(誤讀)한다.
다시 우리의 얘기로 돌아가서, 해마다 이맘때면 저 남녘의 산수유나 매화로 봄 타령을 하는 것은 너무 게으른 호들갑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자신의 감성을 신문 지면이나 방송 카메라로 대신하는 행위도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안다. 문명의 옷을 겹겹이 걸치고, 한겨울에 반팔 옷을 입고, 한여름에 긴팔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동식물처럼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성급한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성급함은 조바심과는 다르다. 안 오면 어쩔까, 하는 불안함보다는 이제나 저제나 하며 님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멀리 골목에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버선발로 나서는 순정한 달뜸일 것이다.
- ▲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존. 시간의 실상. 봄은 이미 지난 가을 속에 있었고,가을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음.
- 하여, 욕심을 좀 부려 보았다. 골목으로 들어선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가 아니라, 바람결에 실려 온 님의 체취를 읽고 때맞춰 동구에 나서듯이, 그렇게 봄 마중을 하고 싶었다. 지리산 피아골 계곡이 좋지 싶었다. 수변풍경이 되바라지지 않았고. 자동차로 달리면서도 강과 함께 흐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섬진강가를 어슬렁거리고 싶기도 했다. 매화와 벚꽃이 피면 봄의 내밀한 정서마저 축제로 치환되고 마는 터여서, 그 무렵에는 애써 피하게 되는 이유도 곁들여졌다.
예상했던 바지만 봄기운은 전혀 없다. 강변 모래톱에는 살얼음이 물결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버들강아지도 곧 얼굴을 내밀 기색이 아니다. 약간의 낭패감을 안은 채로 피아골을 향해 연곡천으로 든다.
왕시리봉과 노고단, 삼도봉, 불무장등이 긴 네모꼴로 에워싼 연곡천과 피아골은 계절과 관계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가 산기슭이 내준 다랑논의 층층은 지도의 등고선을 일으켜 세운 듯 높이를 허물지 않고 예쁜 곡선을 그려 보인다. 인간의 손길도 이렇듯 다소곳하기만 하면 자연과 짝하여 아주 많이 기울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논밭을 볼 때마다 나는 평야에서 느끼지 못하는 대지의 기운을 느낀다. 진정 사람을 길러낸 땅의 모습이다. 하늘만 바라보는 이런 논밭에 누대에 걸쳐 가족의 목숨을 의탁한 우리네 지난 삶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 지리산이 얼음을 풀어 섬진강을 씻는 날. 댓바람에 날리는 섬진강의 머릿결.
- 다랑논, 다락논, 또는 삿갓배미라고 불리기도 하는 천수답은 이제 사라지는 풍경이 돼 가고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거의가 차밭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도 이곳엔 재래종의 차밭이 있었지만 그래도 논밭 중심이었다. 기호식품에 주식이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만큼 우리네 살람살이의 형편이 나아진 증거이겠지만, 왠지 그 모습은 허리 구부러지고 가난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던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듯하여 마음 한 귀퉁이를 아리게 한다. 지갑의 두께로 아비의 권위가 가늠되는 기러기아빠와 펭귄아빠는 또 얼마가 가여운가. 다랑논을 바라보며 잠긴 몇 분간의 상념에 몇 세대에 걸린 아버지들의 모습이 중첩된다.
연곡사 입구를 지나 직전마을을 지난다. 대부분 식당이나 민박 간판을 달고 있다. 이 마을의 한자 이름인 직전(稷田)이 우리말로 '피밭골'인데, 여기서 '피아골'이라는 골짜기 명칭이 비롯되었다. 임진왜란 때 근처의 석주관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다거나, 6·25전쟁 때 죽은 군인의 피가 흘러서 유래했다는 얘기는 역사에 부회한 근거 없는 얘기인 것으로 정리되었다.
민박과 식당을 겸한 '산아래첫집'에서 계곡으로 내려선다. 직전마을의 끝이자 산행기점인 곳이다. 얼음이 거의 다 녹은 계곡 초입을 거슬러 오르자 여울을 이루는 곳에서 막 얼음장을 뚫고 나온 물소리가 귓속에서 와글거리기 시작한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지 한 순간도 똑 같은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지난 해 늦은 가을부터 지금껏 쌓아온 얘기를 한번에 풀어 놓기 때문일까. 얼음장과 수면 사이의 공간에서 울리는 또 다른 소리는 계곡가의 풀과 나무들에게 들려주는 노래인 양하다. 일 년 중 이맘때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나무와 풀을 향한 계곡의 사랑노래다. 봄 오는 소리다.
돌아오는 길. 섬진강변 댓바람 소리에 차를 세운다. 파리한 기운이 가신 댓잎 위로 옅은 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이 물빛처럼 부서진다.
물오르는 계절이다. 물의 정령이 만물과 입맞춤하는 계절이다. 산 채 죽어서 영원을 사는 초목들의 가슴에 얼음장을 뚫고 나온 봄의 노래가 새겨지는 때다. 지금 듣지 않으면 그 노래, 보이는 것들로 하여 어두워진 귀로는 다시 듣기 어려울 것이다.
물과 관련된 속담들
안 먹겠다고 침 뱉은 물 돌아서서 다시 먹는다.
이 샘물 안 먹는다고 똥 누고 가더니, 맑기도 전에 다시 와서 먹는다.
남을 물에 넣으려면, 제가 먼저 물에 빠진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
강물도 쓰면 준다.
흐르는 물도 아껴 쓰면 용왕이 복을 준다.
빗물도 모이면 못이 된다.
물은 트는 대로 흐른다.
벼르던 제사에 물도 못 떠 놓는다.
고기가 물을 잃었다.
물 만 밥에 목이 멘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그릇이 둥글면, 거기에 담긴 물도 둥글다.
물은 제 꼴로 흐르고, 죄는 지은대로 간다.
고래 물 마시듯.
흘러가는 물 퍼주기.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
소금을 지고 물에 들어가도 제 멋이다.
물에 빠지면 짚이라도 잡는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물에 있는 고기 금 친다.
물이 깊고 얕은 것은 건너봐야 안다.
물 위에 기름.
귀한 구슬은 깊은 물속에 있다.
고기는 물을 얻어야 헤엄을 친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
물이 있어야 고기가 생긴다.
배도 물이 있을 때 띄워야 한다.
물이 깊어야 큰 배도 띄운다.
바다에 가야 큰 고기를 잡는다.
물에 빠진 놈 배 부른다.
손끝의 물도 튀긴다.
구덩이를 피하려다가 우물에 빠졌다.
큰 냇물은 마르지 않는다.(이상 한국)맑은 물에는 고기가 안 논다. -한국, 일본, 영국, 미국
물이 지극히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깨끗하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 -중국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한국, 중국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프랑스
끊임없는 물방울은 바위를 닳게 만든다. -영국, 미국, 필리핀
끊임없는 물방울은 돌에도 구멍을 낸다. -독일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이탈리아
빗방울 떨어져 돌을 뚫는다. -스페인
물은 맷돌로 갈아도 물일 뿐. -러시아
거꾸로 된 항아리에 물을 붓는다. -스리랑카
소쿠리로 물을 긷는다. -일본, 미얀마, 스페인, 영국, 미국, 독일
길어 온 물은 우물에 고이지 않는다. -핀란드
물을 떠난 고기는 곧 죽는다. -러시아
꿀벌은 꽃을 떠날 수 없고, 고기는 물을 떠날 수 없다. -중국 소수민족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안 되고, 호랑이는 언덕을 떠나서는 안 된다. -중국
물고기의 힘은 물이다. -세네갈
수영을 배우려면 반드시 물에 들어서야 한다. -중국 소수민족
그 물을 쓰고 싶거든 흐리게 하지 마라. -콜롬비아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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