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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좋은 산 좋은 절] 운제산 오어사

by 白馬 2007. 8. 8.
      [좋은 산 좋은 절] 운제산 오어사
운제산 오어사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
▲ 자장암에서 오어사를 내려다보다. 절마당과 못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옛날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늙은 스님과 젊은 스님이 시냇물을 첨벙거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처럼 희희낙락하며 새우와 물고기를 잡습니다. 승려라는 신분도 잊고 천렵이라도 나온 모양입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두 스님은 새우와 고기를 맛있게 먹고는 나란히 앉아서 뒤를 봅니다.
함께 돌 위에서 대변을 보던 노승이 젊은 스님의 그것을 가리키곤 낄낄거리며 말합니다.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
이 우스꽝스런 장면의 주인공은 신라의 고승 원효와 혜공이었습니다. 원효가 누구입니까? 2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신라 최고의 지성이었고, 환속 후에는 천촌만락을 누비며 무애(無碍)의 노래와 춤으로 대중 곁으로 다가간 한국 불교의 새벽이었습니다.



젊은 원효와 늙은 혜공의 예사롭지 않은 만남


▲ 오어사 뒤 가파른 봉우리에 앉은 자장암은 계곡과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처다.
이런 원효 스님이 젊은 시절 운제산에서 저술에 몰두할 때 항사사(지금의 오어사)에 머물던 혜공 스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합니다. 당시 이름 높은 고승이었던 혜공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공 스님 또한 늘 삼태기를 메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춤추고 노래하던 거리의 성자였고,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혜공 스님이 만년에 항사사에 머물며 젊은 원효를 만났으니, 둘의 만남이 예사로울 리 없었겠지요.

▲ 오어사의 정문격인 천왕문. ‘오어사’란 편액을 걸고 있다.

앞에서 전한 얘기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요즘 식으로 바꾼 것인데, 이야기 말미에 ‘그로 인하여 오어사(吾魚寺)라 했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어떤 이는 이를 원효의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는 말을 강조하듯 덧붙여 두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명세의 힘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유명세에 눈이 멀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일연 스님의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바뀝니다. ‘신라 때 원효가 혜공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 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 고기(吾魚)라고 말했다. 절을 짓고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 산령각 앞 돌계단은 산 이슥한 곳으로 이끄는 듯한 분위기다.

현재 절에는, 물 속에서 살아난 고기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는데, 원효와 혜공 두 스님이 서로 ‘내 고기’라고 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얘기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한편 ‘여시오어(汝屎吾魚)’라는 말은, 삼국유사 한글판(현암사)에서처럼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라고 번역된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나 문맥으로 볼 때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원효에 정통한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와 같은 학자들의 견해도 그렇습니다.


설화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전승된다지만 불교적인 의미로 보자면 삼국유사 이후의 전승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우는 원효를 절대시한 데서 온 결과이고, 현재 절에서 전하는 내용(민족문화백과사전의 것을 따른 것으로 보임)은 전혀 고승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 다 여시오어의 불교적 의미를 놓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더 고수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 [좌]지금 오어사 마당에는 나리꽃이 한창이다. [우]응진전 앞 보리수 아래에 놓인 다양한 형태의 불상과 동자상.
여시오어의 의미는 생과 사, 성과 속, 미와 추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새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혜공과 원효 두 스님 다 치열하게 그런 삶을 살아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설화에서 한 가지 의미를 더 음미해 보려 합니다.
 
여시오어라는 말에서 나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존경 받던 노승과 눈 푸른 젊은 납자가 펼치는 지성의 불꽃놀이를 봅니다.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였던 원효 스님이었지만 분명 혜공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이에 혜공이 기꺼이 응하니, 선지식으로서 후학에 대해 이보다 더 극진한 애정 표현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훗날 환속한 원효가 무애자재한 삶을 펼쳐 보이면서 피워 올린 화쟁(和諍)의 불꽃은 이미 여시오어라는 말에서 불씨를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혜공 스님과 원효 스님의 기행(奇行)에서 신비한 고승의 행적만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독법입니다. ‘거룩한 몸짓’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함마저도 다 놓아버린 대자유의 경지라는 것을 일깨우는 메시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건 두 스님이 고기를 잡아먹던 그 냇물은 지금 일월저수지라 불리는 큰 못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아담하지만 왜소해 보이지 않는 절
▲ 종각에서 바라본 응진전. 비비추꽃과 조경수가 산기슭의 자연림과 어우러진 풍광이 곱다.
오어사의 본디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고, 창건은 신라 진평왕 때입니다. 자세한 창건 내력은 전해오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절 아랫마을의 이름은 항사리입니다. 항사사가 오어사로 바뀐 내력은 이미 살핀 대로입니다.


▲ 아직 꽃망울을 열지 않은 배롱나무. 이제 곧 꽃을 피우면 절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꽃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오어사가 기대고 앉은 운제산(478m)은 그리 높지 않지만 부드럽게 가파릅니다.
저수지 너머 원효암이 있는 맞은편 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서 보면 마치 사방으로 병풍을 두른 듯합니다.
쉽게 물을 가둘 수 있는 그런 형국입니다.
절 마당은 못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바라보는 못은 저수지의 느낌이 없습니다.
깊은 산속의 천연호수 같습니다.
계곡의 입구가 지척이지만 흐르는 물의 느낌도 거의 없습니다.
부동의 산과,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물의 본성이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법문으로 새겨 봄직한 분위기입니다.
▲ 기와에 소원을 담으면 하늘과 통할까?
오어사는 작고 아담한 절입니다. 그런데도 왜소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20여 분쯤만 걸으면 원효암과 자장암을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절 뒷산 봉우리에 자리한 자장암에서는 깊고 그윽한 계곡을 조망하면서 벽공으로 솟은 듯한 상승감을 느낄 수 있고, 못 건너 이슥한 산기슭에 자리한 원효암에서는 첩첩산중의 안돈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암자를 다 둘러보고 다시 오어사로 돌아오면, 산수간을 노니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평화로운 기운으로 충만합니다.

▲ 종각 옆 모감주나무의 노란꽃이 만발했다. 초록 일색의 산사에 기분 좋은 파격을 선물하고 있다.

종각 옆 담장 옆 모감주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내놓고 있습니다. 응진전 앞에서는 보리수가 한껏 푸른 눈망울로 아직 꽃잎을 열지 않은 배롱나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올리면 절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물이 들겠지요.
 
절의 정문격인 천왕문에서도, 마당 가운데 자리한 대웅전에서도, 예쁜 돌계단으로 걸음마저 곱게 만드는 산신각 앞에서도, 비비추가 곱게 피어 있는 응진전 앞에서도, 집 주인께 인사를 올리고 나면 어김없이 몸을 돌려 세워 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저 물처럼 한 세상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한 동안 눈을 감아 봅니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물소리가 실려옵니다. 저 물 소리, 원효 스님이 천촌만락을 누비며 추었다는 무애무의 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동화작가

운제산 산행 쪽지정보
물 따라 걸으며 원효암까지


포항시 남쪽 오천읍에 있는 오어사에 갔다가 원효암을 둘러보지 않으면 반만 본 셈이다. 원효암만 보고 못(일월저수지)을 따라 걸어보지 않으면 그 반의 반만 본 셈이다.


오어사에서 계곡을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원효암으로 가는 숲길이다. 단 5분만 걸어도 때묻지 않은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숲길을 따라 가다 보면 계곡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나타나는데, 그 길이 원효암 가는 길이다. 그러나 곧장 오르지 말고 물가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 산자락이 끝나는 곳까지 물과 함께 걸을 수 있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산책길이다. 물과 헤어질 지점에서 산등성이로 난 길을 걷다가 오어사가 보이는 지점에서 저수지쪽으로 내려서면 다시 원효암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아주 천천히 걸어도 1시간 정도면 된다. 지금 원효암에는 도라지꽃, 봉숭아, 수국, 비비추, 접시꽃이 만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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