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강동누리길

울산 강동누리길을 걷다가 나오는 금실정에서 하루 묵었다. 절벽 아래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음악 선율 같았다.
퇴근 후, 배낭을 메고 울산행 마지막 SRT 열차에 올라탔다. 네팔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백패킹을 어디로 갈지 고민할 시간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잠시 쉬어 갈 겸 오랜만에 느리게 걷기로 했다. 2시간 정도 달려 울산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금실정으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검색해 놓은 야영지였다. 자정이 넘었지만, 몇몇 낚시꾼들은 바닷가에서 밤 낚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뒤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소나무가 포옹하듯 이어져 있는 절벽 끝에서 배낭을 내렸다.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에 기대 텐트를 쳤다. 울산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다음날, 요란한 갈매기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단잠을 잤다. 노숙은 체질인 듯하다. 텐트 문을 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짭조름한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멀리 수평선 위로 아침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텐트를 정리했다. 이곳은 울산의 강동 누리길이다.
울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거대한 크레인과 용접 불꽃으로 만들어낸 현대중공업이다. 강동누리길의 서정적인 풍경은 산업화의 상징인 현대중공업과 대조를 이룬다. 인간과 기계가 만든 웅장한 구조물 옆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일탈이 될 것 같았다.

트레킹을 하던 중 만난 한 부부. 이들은 한참동안 내 앞에서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강동누리길은 울산 북구 강동동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길이 7.5km의 트레킹 코스다. 길이 어렵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걸을 수 있다. 판지항, 우가항, 당사항 등 작은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는 다양한 벽화들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면 두세 시간도 모자랄 정도였다.
시작점은 판지항이지만, ‘슬로 바닷길’을 걸을 여유를 갖기 위해 제전항에서 출발했다. 제전항은 한적했다. 저 멀리 방파제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낚시꾼만 있을 뿐이었다. 제전항 끝집을 지나자 바다를 따라 우가마을로 이어지는 누리길이 나타났다. 거친 파도나 윤슬처럼 반짝이는 감성이 담뿍 묻어나는 바다를 기대했지만, 바람도 구름 한 점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미세먼지까지 몰려와 이제 막 겨울을 벗어나 아직 봄 채비도 못한 누리길은 생기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혼자 조용히 걷고 싶어 찾은 길을 홀로 걸었다. 잔잔한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떠나기 전에 마무리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누리길은 마침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생기가 없었는데, 바다 풍경이 그나마 생기를 더했다.

길을 걷다가 땅에 놓인 나룻배를 발견했다. 누리길을 찾은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인지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사색의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길의 이정표처럼 길가에 버려진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며 이방인들을 맞이했을 낡은 배는 누리길을 찾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길을 비켜 갸우뚱하게 앉아 있었다. 소싯적에는 풋풋한 하늘색 페인트로 한껏 치장하고 파란 하늘 아래에서 푸른 바다를 가르며 유유자적 떠다녔을 텐데, 이제는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색이 바래 있었다. 그 옆에는 손님맞이를 위해 빨간 드럼통으로 소소하게 치장을 했다. 갸륵하지 않은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배에 올라탔다. 땅에 박혀 꼼짝 않는 노를 잡았다. 이 낡고 작은 배는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다시 바다로 나갈 희망을 품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잠들어 있는 꽃들이 만발하고, 억새가 되살아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수기라면 호객행위를 하느라 잡념이 없겠지만, 미세먼지로 가득 찬 이른 봄날에 계획도 없이 훌쩍 떠나 온 백패커 하나를 앉혀 놓고 그날의 영광을 되새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월에 떠밀려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위로하듯 손바닥으로 뱃머리를 다독여 주고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우가마을에 들어서 데크길로 이어진 전망대를 지나면 강동 오토캠핑장이 있다. 전날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바로 옆 금실정에서 머물렀었다. 다시 돌아온 금실정 절벽 아래에서 들려오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선율처럼 귀에 감겼다.

대왕암과 출렁다리.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과 관련 있는 곳이다.
벽화 찍는 재미 쏠쏠
금실정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포옹하듯 이어져 있었다. 금실정에는 동그란 데크가 있는데 커플이 그곳에 서서 솟아오르는 해를 받으면 두 사람이 동시에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다음엔 부자가 되는 소원을 빌겠노라 다짐하며 우가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우가마을에는 사진으로 담기에 예쁜 벽화들이 곳곳에 있었다. 골목을 거닐다 마주하는 벽화를 찍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당사마을에 닿는다. 당사항에는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당사 해양낚시공원’이 있다. 바다 위로 이어진 노란 아치형 다리가 눈길을 끈다. 강동누리길의 끝자락에 있는 용바위는 뱀이 용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사마을 곳곳에서는 용이 그려진 벽화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강동누리길에는 재미있는 조형물들이 많다. 문무왕과 관련된 것부터 이 지역 해녀에 관한 것까지 각 조형물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강동누리길을 끝내고 더 남쪽에 위치한 방어진항으로 이동했다. ‘슬도 바닷길’을 걷기로 했다. 오후라 그런지 방어진항은 사람들로 북적여 활기찼다.
슬도는 방어진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 주는 바위섬으로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힐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하여 큰 거문도라는 뜻의 한자 슬瑟을 사용해 슬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슬도등대로 이어진 방어진 방파제로 걸어가면 가장 먼저 ‘귀신고래상’이 맞이해 준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 것 같은 거대한 고래상은 자유 의지를 담고 있는 듯하지만, 슬도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졌다고 하니, 의외였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고래가 그려진 무인등대가 바다에 떠 있는 어선들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며 우뚝 서있다. 그 아래 멈춰 서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등대는 오늘 하루쯤 쉬어도 좋으련만. 사색을 즐기는데 오랜 친구 사이인 듯 어르신 여섯 분이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철부지 꼬마들처럼 어깨동무를 한 어르신들을 위해 낯선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여러 컷을 찍었다. 만족해 하는 어르신을 뒤로한 채 슬도 바닷길의 랜드마크 대왕암으로 향했다.

강동누리길에는 재미있는 조형물들이 많다. 문무왕과 관련된 것부터 이 지역 해녀에 관한 것까지 각 조형물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고 아름답겠지만, 아직은 조촐한 바다 풍경에 만족하며 멀리 보이는 대왕암을 향해 걸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앞서가는 부부가 나만의 동행이 되었다. 바다를 바라 보다가도 사진 찍느라 거리가 멀어져도 결국 나의 시선은 두사람을 좇고 있었다. 물론 사진을 찍을 때 좋은 모델이 되긴 하지만, 풍경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잰 걸음으로 두 사람을 앞섰다. 해안가의 기암괴석들과 갈매기들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왕암 공원에 들어섰다.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승하 후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킨다고 유언했는데, 문무왕은 물론 왕비 또한 호국룡이 되어 울산의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대왕바위(대왕암)이라 불렀으며, 용이 잠겼다는 바위 밑에는 해초가 자라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강동누리길에는 재미있는 조형물들이 많다. 문무왕과 관련된 것부터 이 지역 해녀에 관한 것까지 각 조형물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다.
관광지인 만큼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바위 사이로 난 데크 길을 따라 대왕암으로 향하는데, 되돌아오는 친구 사이 어르신들과 다시 마주쳤다. 어르신들은 두 번째 만남을 손주 만난듯 격하게 반가워해 주셨다. 흐믓한 마음으로 대왕암의 풍경을 감상하고 예약해 둔 ‘당사 현대차오션캠프’로 이동했다.
당사항에 위치한 현대차오션캠프는 울산의 해돋이 명소이자 바다 위에 지어져 바다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캠핑장이다. 성수기에는 인기가 많아 예약하기 힘들지만 지금은 비수기라 손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예쁜 조명이 켜진 캠프의 항공샷을 찍기 위해 드론을 켰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힘들게 짊어지고 다닌 드론을 사용 못 한 채 발(로 맞춘) 줌으로 몇 컷을 담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일출을 담기 위해 드론을 먼저 켰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그 사이 해는 벌써 수면 위로 올라왔고, 그제서야 마음을 비우고 ‘발 줌’으로 아침 해를 카메라에 담았다. 한결같이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미세먼지에 무미건조했던 바다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즉흥적으로 떠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 현대차오션캠프에서의 둘째날 밤. 이곳은 국내 최초의 해상 캠핑장이라 불린다.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또 하나의 울산 걷기 코스 <강동사랑길>
강동누리길이 해안가를 따라 이어져 있다면, 강동사랑길은 누리길의 해안길과 겹쳐지며, 각 마을의 둘러싼 산과 언덕을 따라 7개로 나뉘어진 테마길이다. 누리길이 바다와 인접해 감성적인 길이라면, 사랑길은 우가산 유포 봉수대나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등 산 속 곳곳에 있는 유적지를 만나는 재미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1구간-믿음의 사랑길(3km)
2구간-윤회의 사랑길(2.6km)
3구간-연인의 사랑길(4.7km)
4구간-부부의 사랑길(5.9km)
5구간-배움의 사랑길(2.9km)
6구간-사색의 사랑길(2.5km)
7구간-소망의 사랑길(2.7km)
맛집! 사진 찍어 드린 어르신들이 추천해 준 울산 방어진 맛집 ‘수협구내식당’. 어르신들은 김치복국과 가자미찌개를 추천했는데 나는 김치복국을 주문했다. 비주얼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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