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바라본 첩첩 산 너머 운해.
익숙한 풍경이 낯설다. 뚜렷했던 윤곽은 저마다의 모습을 잃었다. 억새, 갈대, 나무, 산, 언덕, 길, 사람들과 어슴푸레한 풍경들, 맑았던 형상이 생경해졌다. 안개는 분명한 것을 흐리게, 다시 더듬게 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안개를 닮았다. 모든 일상이 부예졌다. 호수에는 구름안개, 물안개 뒤섞였고 나뭇가지마다 어룽어룽 물방울이 달렸다.
오전 9시 45분 영천댐에 잠깐 섰다가 곧장 계곡 길 따라 오른다. 먼 산꼭대기 눈이 쌓여 있다. 산이 깊어선지 산그늘이 걷히지 않아 어둡다. 오전 10시경 묘각사 주차장에 차를 댄다. 바람이 차서 춥다. 동백은 얼어서 꽃피울 요량 없이 꿈쩍도 하지 않고 절집의 하얀 개는 도를 통한 듯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는다. 극락전 위로 눈 덮인 기룡산 정상이 우뚝하다. 고즈넉한 절집을 두고 산신각 옆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데, 눈바람에 시려선지 까마귀 소리도 서툴다.
기룡산騎龍山은 해발 961m, 경북 영천시 자양면과 화북면의 경계다. 기룡산 중턱에 묘각사를 지을 때 의상대사 설법을 듣기 위해 동해 용왕이 말을 타듯 달려와 ‘말탈 기騎, 용 룡龍,’ 기룡산이 됐다고 한다. 설법을 듣고 홀연히 승천하면서 단비를 내리자 가뭄이 없어지고 신묘한 깨달음을 얻었대서 절 이름을 묘각사라 했다.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영조 때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계종 은해사의 말사다. 묘각사 산신각 옆길에서 기룡산 정상을 거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는 데 3.4km 2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영천댐.
묘각에서 유래된 나무와 봄눈
산행 들머리는 많지만 능선길은 호젓한 편이다. 자양면 행정복지센터에서 꼬깔봉 거쳐, 용화리 운곡지에서, 묘각사에서 오르는 구간 등 여러 곳이다. 용화리와 묘각사를 잇는 도로는 멀고 지루하므로 사찰 구경은 산행을 마친 후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낫다. 오늘은 눈 내린 날씨가 어설퍼 원점회귀할 요량으로 묘각사에서 오른다. 이정표가 잘돼 있어 길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낙엽이 쌓여 있으므로 몇 번 미끄러질 각오를 해야 한다.

기룡지맥 갈림길.
산신각 오른쪽에서 정상까지 0.9km, 실제 거리는 1.3km쯤 된다.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아주 급하다. 나무 계단, 밧줄, 돌, 바위, 참나무들이 많다. 낙엽이 쌓이고 눈 덮인 길 밟으니 진흙이 눈 위에 떨어진다. 속세의 나그네가 순백의 눈을 더럽힌다. 흙더미 있는 곳에 서릿발은 기를 쓰고 날카롭게 섰다. 상주霜柱, 땅속의 물이 얼어 기둥 모양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나뭇가지는 삭풍에 시달려 더 앙상해졌다. 등산화 속에 자꾸 눈이 들어가 발이 시리다. 낙락장송과 참나무 거목들, 상수리·신갈·산벚·당단풍·쪽동백·칡덩굴·때죽·소나무. 뒤돌아보니 영천댐 호수는 부옇지만 잠시 숨을 돌리게 한다. 우뚝우뚝 솟은 피라미드 사이 긴 골짜기, 산 아래 호수와 하늘 사이 경계도 없이 안개는 몽환적이다. 환상과 꿈, 현실 아닌 열반의 세계를 본다. 피안彼岸이다.
오전 10시 40분, 묘각사 목탁 소리도 흐릿해졌다. 온갖 번뇌를 끊고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보살菩薩이 묘각妙覺, 묘각에서 유래된 모감주나무가 있다. 염주를 이르는 주珠를 붙여 묘각주, 모감주로 굳어졌을 것이다. 여름철 빗물에 떨어지는 꽃이 마치 황금색 비와 같다고 해서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 근심을 없애는 무환자無患子나무 식구다.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고 염주나무로도 불린다. 이 산에서 모감주나무를 찾는 것보다 보살되기가 더 쉽겠다고 생각하는데 올라갈수록 눈이 쌓여 발목까지 빠진다. 상수리·신갈나무는 늘씬하게 하늘로 뻗었다.

기룡산 정상, 건너편 보현산과 면봉산.
가파른 구간으로 먼저 올라오길 잘했다. 이런 길은 미끄러워 내려가기에 더 힘들어질 것이다. 10분쯤 올라서 바위지대 쉼터(묘각사 0.6·기룡산 0.3km)에서 땀을 닦는데 산 아래는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 노린재·철쭉·진달래·물푸레·쇠물푸레·신갈·상수리·당단풍나무. 나무마다 눈꽃을 피웠다. 내일이 입춘인데 이 산에서 봄눈을 맞고 있으니 ‘입춘대길立春大吉,’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옛 어른들은 보리밭에 봄눈 쌓이면 풍년 든다고 했다. 식물에는 봄눈이 이불처럼 포근해서 얼어 죽지 않으니 소외된 이들에게도 찬바람을 막아 주고 희망을 내려줄 것이다. 꼭대기 오를수록 하얀 눈 세상 설원이다.
만학천봉, 운해와 산의 물결
오전 11시 미끄러운 바위지대 밧줄 구간, 나뭇가지 잡고 오르니 눈이 와르르 떨어진다. 신갈·노린재·진달래·철쭉·서어나무, 바위와 산길, 모든 것은 눈을 뒤집어썼는데 어느 쪽이 길인지 산인지, 낭떠러지인지 분간이 안 된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져 걸음 옮기기도 쉽지 않다. 나뭇가지에 닿으면 눈 폭탄을 맞을 것 같아 머리 숙여 엎드려 오른다. 나무에 걸린 등산 리본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귀밑으로 땀이 줄줄 흘러내려 외투를 열어젖혔다.

묘각사.
오전 11시 15분, 해발 961m 기룡산 정상(묘각사 0.9·꼬깔산 3.4km)에는 눈이 하얗게 덮였다. 넓은 바위에 표지석이 섰고 사방으로 탁 트였다. 일망무제 수묵화, 장쾌한 조망이 압권이다. 맞은편에 보현산과 천문대, 면봉산, 오른쪽으로 비학산, 내연산, 동해, 산마을과 능선길, 멀리 남쪽으로 꼬깔봉, 피라미드처럼 솟은 수많은 산, 영남알프스까지 운해에 겹겹이 떴다. 북쪽은 보현지맥, 동쪽으로 운주산 낙동정맥, 그 너머 자도봉어(자옥산·도덕산·봉좌산·어래산). 서쪽은 가팔환초(가산·팔공산·환성산·초례봉), 수많은 산의 물결이다. 위압감을 주는 깊은 골짜기와 첩첩이 겹친 봉우리, 그야말로 만학천봉萬壑千峯이다.
하얗게 펼쳐진 풍경, 발아래 모든 것을 두었으니 선계仙界다. 이토록 맑은 하늘,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정초의 호사 아닌가. 이 꼭대기 오래 앉아 있으면 저절로 깨달아 나도 묘각의 경지에 들 수 있으리라. 시공을 초월해서 의상대사와 동격이 되기로 작정하고 지그시 눈을 감아 보지만 일행은 내려가자고 재촉한다.
눈 덮인 소나무와 바위 산줄기는 꼿꼿이 섰다. 까마귀 소리 눈바람에 애처롭고 우리는 능선을 타고 용화리 방향으로 간다. 발아래 산마을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눈 덮인 보현산 정상은 마치 만년설의 알프스 분위기다. 등산화는 벌써 다 젖었다. 습관처럼 그루터기에 신발을 터는데 눈이 와르르 떨어져 머리를 덮친다. 자업자득이다.

상수리나무 숲길, 앞에 기룡산.
영천댐과 물 위에 내린 햇살
오전 11시 30분, 겨우 비집고 앉을 만한 바위굴 지나 능선 길에서 바라보는 서쪽 산줄기는 화면처럼 바뀐다. 하얀 산, 회색 구름, 파란 하늘, 그 위로 다시 흰 구름. 눈길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딛고 간다.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휘어진 소나무 가지를 터는데 와르르 눈 세례까지 받는다. 오전 11시 50분, 해발 924m 기룡지맥 갈림길(묘각사 1.8·탑전 1.9·뒷길 묘각사 1.5·기룡산 0.6km). 젖은 등산화에 발이 더 시리다. 정오 넘어 드디어 쉼터 갈림길(묘각사 1.2·용화 3.9·기룡산 1km)에 서서 왼쪽 신갈나무 사이로 하얀 기룡산 정상을 바라본다. 여전히 미끄러운 눈길, 신발을 얼마나 그루터기에 털었는지 엄지발가락이 얼얼하다. 15분쯤 더 내려가서 갈림길(묘각사 0.8·용화 3.3·기룡산 1.6km) 지나고 12시 반경, 계곡의 밧줄 구간은 위험하다. 경사진 내리막길 쌓인 낙엽과 돌, 눈에 얼어붙은 바위까지 난이도 최고조 지점. 얼마나 바득거렸던지 종아리, 허벅지가 당겨 뻐근하다. 낙엽에 푹푹 빠지는 검은 바위 계곡 길은 물길처럼 아래까지 길게 흘러갔다.
묘각사 0.3km 지점,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목을 축인다. 비스킷, 초코파이, 따뜻한 물 한 잔이 제격이다. 상수리·신갈·산벚나무 남겨두고 계곡을 다 나오니 염불, 목탁 소리 반갑다. 12시 45분 차 문을 열어놓고 배낭 푸는데, 젖은 등산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절집에서 보이는 산은 남쪽으로 시립하듯 솟았고 골짜기 끝이 막혀 기운이 나가지 못하게 가두는 형국, 명당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 산과 물이 어우러진 근처 솔밭에 유난히 묘지가 많은 까닭을 알 듯하다. ‘효성에 감복한 어떤 노승이 무덤 자리를 점지해 후손들이 발복한 명당’이라 한다. 호수 근처에 내려오니 안개는 사라지고 햇볕이 산뜻하다. 길옆으로 기와지붕이 여럿 있는데 수몰지구에서 옮긴 것이다. 영천(자양)댐은 공업·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980년 완공되었다. 주변에는 문화 유적지와 벚꽃길이 있어 생태 여행지로 많이 찾는다. 자양이란 지명은 중국 자양산과 비슷해서 불렸다는데 사대적事大的이거나 의도적 지명이라 여긴다.
“선조들의 작명 실력은 선견지명이 있어.”
호수에 비친 붉은 노을이 자양紫陽이라. 나그네 실력을 아는지 잔을 비우니 물 위에 햇살이 더 내려앉는다.

산행길잡이
묘각사 주차장(등산 기점) ~ 바위지대 쉼터 ~ 기룡산 정상 ~ 바위굴 ~ 기룡지맥 갈림길 ~ 묘각사·용화 갈림길 쉼터 ~ 상수리나무 숲 내리막길 ~ 느티나무 계곡 ~ 묘각사 주차장(원점회귀)
※ 대략 3.4km, 2시간 30분 정도 걸림.
이 밖에도 여러 산행 구간 있다.
· 자양면 복지센터·치안센터 ~ 꼬깔산 ~ 기룡산 ~ 묘각사 ~ 용화마을 ~ 자양면 복지센터· 치안센터(15km 정도)
· 성곡리 복지회관 ~ 꼬깔산 ~ 기룡산 ~ 시루봉 ~ 용화리 ~ 성곡리 복지회관(18km 정도)
교통 고속도로 대구포항고속도로(임고IC)
※ 내비게이션 →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화길 499 묘각사(주차장 넓음)
숙식 영천 시내 다양한 식당과 호텔, 여관 등이 많음
주변 볼거리 임고서원, 영천댐, 보현산천문과학관, 운주산승마장, 영천향교, 은해사, 죽장면 입암서원, 기계면 전통시장(1.6일) 등.

★오늘의 날씨★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산이 잉태한 ‘쌍둥이 오름’ [제주 어디까지 아세요] (2) | 2025.04.01 |
---|---|
철원의 봄이 피려던 어느 날, 한탄강 주상절리길 (2) | 2025.03.31 |
[전라도의 숨은 명산 첨산·봉화산] 순천만 최고의 전망 갖춘 산 (3) | 2025.03.28 |
바위산과 야생화의 이중주…한 잔의 에스프레소로 완성 [돌로미티] (2) | 2025.03.27 |
네팔 8,000m 고봉 14개로 늘어 (0) | 2025.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