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섬 여행은 만만치 않다. 거칠고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다. 그렇다고 움츠린 채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깝다. 매년 이맘때면 섬은 인공의 때를 씻어 내고 본래의 청정함으로 회귀한다. 1년 중 가장 선명한 별빛도 이 계절에 있다. 그러니 한 번쯤은 모질게 마음먹고 떠나 볼 일이다. 아련한 감회의 끝자락에서 한 해를 이어 갈 귀한 에너지를 만나게 될지도.
외딴섬에 곱게 내린 노을빛, 고사도
찬 바람에 내놓은 아내의 얼굴이 발갛게 얼어 가던 외딴 섬의 겨울. 하루해는 고기잡이에 나선 부부의 어선 뒤로 곱게 떨어졌다. 고사도에는 2006년에야 전기가 들어왔고 2015년이 되어서야 상수도가 연결됐다. 길이라 해 봤자 마을을 지나 피항장까지 이어지는 700m가 고작인 낙도. 앞섬 평사도와는 행정구역상 같은 리에 속해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두 섬을 합쳐 ‘고평사도’라 부른다.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이곳 섬 주민들에게는 평생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변함없는 자연과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찬미하던 여행자의 시선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섬이다.
텅 빈 갯벌에 놓인 겨울 감성, 웅도
소달구지에 바지락을 싣고 갯벌을 가로지르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됐던 섬이다. 웅도는 예로부터 바지락과 굴 산지로 유명했다. 굴은 겨울이 제철이다. 웅도 굴은 굵은 씨알에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남쪽 선착장은 주민들의 일터다. 이른 아침부터 배를 타고 양식장을 오가며 굴을 채취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웅도는 연륙된 섬이다. 하지만 차량이 필요 없을 만큼 걷기에 적당하다. 섬의 동쪽 해안가에서는 12억년 전 선캄브리아 시대의 퇴적층을 관찰할 수 있다. 물이 빠지면 1.4km나 떨어진 무인도 조도까지 바닷길이 드러난다. 겨울철, 섬 여행의 감성은 텅 빈 갯벌에도 놓여 있다.
돌방의 추억, 장고도
연일 파도가 높았다. 대천항 여객선터미널에서 배표를 끊을 때, 며칠 날씨가 안 좋아 발이 묶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기어이 섬으로 들어갔지만, 겨울 날씨는 예상보다 혹독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불었고 바닷물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난감해하던 그때, 철시한 민박집 마당에서 돌로 만든 커다란 웅덩이를 발견했다. 우연히 만난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그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알고 보니 웅덩이의 실체는 ‘돌방’이었다. 바닷가에 만들어진 돌방은 장고도의 민속놀이인 등바루놀이 때 처녀들이 모여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던 장소다. 부모들이 음식을 가져다 놓으면 처녀들은 2~3일간 그곳에 머물며 바닷가에 나가 굴도 따고 노래와 춤도 즐겼다고. 잊지 못할 돌방의 추억이다.
별빛 쏟아지던 맹골도
맹골수도는 유속이 빠르기로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해역이다. 맹골도란 이름도 맹수같이 사나운 바다를 끼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겨울은 먼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다. 여객선의 결항 빈도가 잦고 일거리조차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겨울이 오면 뭍에 나가 생활하다가 봄이 되면 다시 섬으로 들어온다. 섬이 비워지는 시기에 여행자는 야생의 기회를 얻는다. 북쪽 초지대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무인도인 명도를 앞세운 절벽 위의 전망도 가히 압도적이다. 밤은 또 다른 세상이다. 이웃 섬 죽도 등대의 불빛이 한바탕 춤을 추고 나면 청결한 어둠 사이로 별빛이 쏟아진다. 새벽녘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간에도 잠들긴 아깝다. 어둠이 색을 입고 세상이 되어 가는 순간순간이 타임랩스의 영상처럼 빠르게 흐른다.
여행객이 드문 섬, 제도
강풍주의보가 내렸음에도 섬으로 갈 수 있었다. 제도는 여주 앞바다 평수구역에 속한 섬이기 때문이다. 평수구역이란 먼바다의 너울에 비교적 안전한 내만을 뜻한다. 작은 섬들이 모여 있으며 양식장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여행객이 드문 섬에는 민박조차 없다. 사유지가 되어 버린 오랜 폐교에서 설영을 했다. 그리고 섬을 걸으며 굴 무덤과 겨울 냉이를 봤다. 섬의 유일한 가게는 전화를 해야 주인을 겨우 만날 수 있다. 귀하신 몸이다. 콜라 한 병을 사서 돌아와 마셔 보니 탄산이 느껴지질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유통기간이 몇 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간 찾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던 여행.
잊지 못할 설원의 기억, 울릉도
울릉도 천부마을의 비탈진 골목길에서 나리분지까지는 4km. 도보로 1시간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걱정 섞인 격려를 믿기로 했다. 햇볕이 닿지 않아 빙판이 되어 버린 구간은 미끄러워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몹시 버거웠다.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얼마나 걸었을까? 겨울에 접어든 나리분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눈은 고스란히 쌓여 사람의 키 높이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순백의 평원은 고갯마루 전망대에서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경이로움에 빠져 있던 순간, 흐르던 구름은 분지를 둘러싼 높은 산봉우리들에 걸려 뒤뚱거리다 또다시 한 뭉치의 눈을 쏟아 냈다. 울릉도는 ‘백령에서 울릉까지’ 대한민국 20개 섬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기나긴 여행의 보람을 누렸던 설원의 기억.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순간에도 나리분지의 눈은 그칠 줄 몰랐다.
찰나의 설경, 하의도
목포역에 도착했을 때 함박눈이 쏟아졌다. 아침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던 잿빛 새벽녘, 목포항 여객선들은 아랑곳없이 엔진을 데우고 굉음을 울려댔다. 남도의 설경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웅곡항에 도착 후 섬에 한두 대밖에 없다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안식처인 하의도 모래구미에 도착했다. 남도의 설경은 순간이다. 이동하는 동안 눈이 거의 녹아 버렸다. 파도는 높았고, 바람이 텐트를 종일 흔들어 댔던 기억이 있다. 수도권에 비하면 영상 5도는 높은 기온이었지만 여전히 날은 추웠다.
얼어 죽어도 자갈마당, 덕적도
자갈마당의 바람은 갯돌 위를 미친 듯이 달리다 멋대로 방향을 바꾸고는 성난 황소처럼 텐트를 향해 돌진했다. 안전한 서포리해변을 놔두고 굳이 덕적도의 북쪽 해안가인 능동자갈마당에 텐트를 친 것은 어쩌면 객기였을지도 모른다. 자갈마당은 여름철조차 해수욕이 어려울 정도로 물살이 세고 깊다. 그러나 견뎌 낼 수만 있다면 최고의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장소다. 영겁의 세월 동안 깎이고 다듬어진 크고 작은 몽돌과 해변 양쪽으로 펼쳐진 기암괴석의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밤새 침낭을 꼭꼭 싸매고 자글거리는 몽돌과 파도의 앙상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맞이한 코끝 쨍한 아침, 굳건히 서 있는 돌탑 앞에서 바다를 향한 섬사람들의 바람을 읽었다.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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