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큰 거리.
종로를 여행하며 마주친 흥미로운 공간에 대하여.
●한옥의 여유
무계원
무계원은 종로 익선동 일대에 있던 ‘오진암’이라는 요정 건물을 옮겨 온 것이다. 오진암은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였던 곳이었는데,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기도 했다.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 등 다양한 곳에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사용했다. 오진암은 우리나라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방성철 제2부수상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오진암에서 만나 논의한 것이 1975년 7월4일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이다. 7·4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이를 통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내세웠다.
이토록 역사 깊은 오진암을 옮겨 만든 곳이 ‘무계원’이다. ‘무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조선 정기 풍류객이었던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실제 몽유도원도를 자세히 보면 세검정과 백사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북한산 자락을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무계원은 현재 세미나, 강연, 회의, 전시, 전통문화 행사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이 펼쳐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나른한 오후 잠시 들러 앉아 있으면, 한옥의 진정한 여유를 느낄 수 있다.
▶Editor’s Pick
무계정사길
무계정사길은 ‘창의문로5길’에서 ‘창의문로5가길’로 이어지는 구간.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인왕산까지 대략 560m,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경찰초소의 재탄생
더숲 초소책방
인왕산 중턱에 위치한 책방 겸 카페. 이곳은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를 목적으로 건축되어 50년 넘게 경찰초소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2020년에 리모델링을 통해 카페 겸 책방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벽돌로 된 초소 외벽 일부와 철제 출입문을 그대로 살려냈다. 카페 외부에는 인왕산 경찰초소 난방용 보일러를 가동하기 위한 철제 기름탱크도 전시되어 있다. 원래 인공 축대 위에 있었는데, 축대를 철거하고 바위와 주변 자연을 복원하며 기억의 탱크 역할을 하도록 남겨 둔 것이다. 더숲 초소책방은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책방 내부로 들어서면 통유리 너머로 남산타워를 필두로 한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과거 분단과 대립의 아픔을 상징했던 삭막한 공간이 지금은 인왕산에서 가장 여유롭고 생기 넘치는 책방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Editor’s Pick
인왕산 자락길 건강산책로
인왕산 자락길 건강산책로는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 보행 약자가 모두 산림욕을 즐기며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는 무장애 산림산책로다. 무장애 여행지는 여행 중 어떠한 시설, 혹은 산책로를 이용할 때 장벽 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더숲 초소책방(4기점)에서 인왕산 자락길 건강산책로 3기점 방향으로 내려가면 수성동 계곡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1개의 공간, 2개의 이야기
박노수 미술관
아담한 2층 벽돌집, 2013년 개관한 박노수 미술관이다. 이곳은 서양화가 박노수 화백이 1973년 매입해 40여 년간 살았던 곳이다. 이후 박노수 화백은 집과 작품을 종로구에 기증해 지금은 종로 구립미술관이 되었다.
사실 이 집에는 엄청난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이곳은 1937년,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건축한 집이다. 윤덕영은 나라를 일제에 팔아넘긴 ‘경술국적’의 한 명, 매국노다. 윤덕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인데,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후 자리에 오르자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후원하는 대동학회의 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관민추도회(이토 히로부미 추도 행사)’를 발의하고 이토를 추도하는 제문을 낭독했다. 1910년 우리나라가 국권을 빼앗길 때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후작의 작위와 함께 무려 46만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옥류동천의 위쪽, 옥인동 일대의 땅을 사들였고 그 땅에 한양의 아방궁으로 불렸던 ‘벽수산장’을 세웠다.
벽수산장은 광복 이후 1950년 UN에 설립된 한국 문제 전담기구인 ‘언커크(UNCURK) 본부’로 사용되었고 1966년 화재 이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완전히 철거됐다. 이와 별개로 박노수 미술관에서는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 천여 점의 풍부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이며 총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날개의 고향
이상의 집
1930년대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이 3살 때부터 20여 년 동안 살았던 생가의 일부다. 이상 작가의 본명은 ‘김해경’,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양되어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과거 1,000여 평방미터가 넘는 큰 규모의 한옥이었는데, 현재는 일부만 남아 유리창과 콘크리트 벽, 기와가 지붕을 덮고 있다.
이상은 어른 시절 그림과 글에 큰 재능을 보였지만, 쇠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압박 때문에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가 됐다. 건축 기수로 일하며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시와 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의 땅에서, 애정 없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뒤틀리고 고단한 현실에서 느낀 불안과 공포, 자기분열, 자의식을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했다. 27년, 짧은 그의 생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실내에는 이상의 흉상과 초상화가 있고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보관한 아카이브가 한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팔만대장경을 모티브로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실내 왼쪽에 자리하는 육중한 콘크리트 검은 문틀을 밀면 어두컴컴한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오르면 환한 빛이 실내로 스며든다. 당시 어두웠던 시대상과 그가 처한 현실, 한 줄기 자유를 갈망하는 감정을 공간으로 표현해 낸 상징적인 공간이다.
●공공 한옥의 미학
홍건익 가옥
홍건익 가옥은 여행자 누구나 한옥의 정취를 경험할 수 있도록 공공 개방된 서촌의 한옥이다. ‘홍건익’이라는 상인의 집이었던 이곳은 1936년에 지어진 근대식 한옥으로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로 구성된 큰 규모를 갖췄다.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가운데 후원과 빙고까지 갖춘 유일한 곳이다. 전통 한옥과 근대 한옥이 절묘하게 섞여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문화재 33호로 지정됐다.
홍건익 가옥의 신기한 점은 후원으로 갈수록 지대가 점점 높아진다는 점이다. 땅을 인위적으로 깎지 않고 언덕을 그대로 살려 지형적 특색을 살려 냈기 때문이다. 홍건익 가옥의 사랑채는 ‘서울한옥포털 홈페이지’에서 예약만 하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안채, 별채는 전시, 전통 클래스 등 액티비티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천상병 시인의 공간
귀천
인사동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카페, 귀천. 이곳은 천상병 시인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과거 카페는 천상병 시인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했는데, 천상병 시인이 살아생전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자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을 이야기할 때 ‘동백림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동백림사건, 혹은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과 국내의 지식인 200여 명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면서 간첩 교육을 받으며 대남 적화 활동을 했다며 발표를 했는데, 이미 7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상황이었다. 이때 중심에 있던 인물이 평양을 다녀왔던 유학생인 ‘이응노’와 ‘윤이상’이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 상과대학 동문이었던 ‘강빈구’의 죄를 알고도 알리지 않은, 이른바 ‘불고지죄’에 대한 혐의로 잡혀갔다. 이외에도 강빈구를 협박해 5만원을 갈취한 혐의도 적용됐다. 이후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적용받은 피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제는 천상병 시인이 중앙정보부 심문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받으며 3번의 전기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신체와 정신이 모두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후 그 후유증으로 거리에서 오해를 받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이 되는 사건도 펼쳐진다. 이때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동료 시인들은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유고 시집’을 내게 된다.
유고 시집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상병 시인은 친구의 동생, 목순옥 여사와 결혼을 하고 그녀의 노력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고, 1993년에 생을 마감한다. 이토록 다사다난한 그의 삶은 1979년 발표했던 ‘귀천’이란 시로 정리할 수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사동 골목길 작은 동네 카페, 귀천의 이야기다.
●3·1운동의 발상지
탑골공원
황해도 출신 정재용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그의 외침은 탑골공원에 모였던 청년 학도와 애국시민을 통해 퍼져 나갔고, 독립에 대한 그들의 의지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졌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의 팔각정에서 시작된 불씨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다. 우리나라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 과거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했던 것을 1897년 도지부 고문인으로 있었던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재조성되었다. ‘탑골(塔骨)’이란 이름은 공원 내에 자리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외형이 뼈 모양을 닮은 것에서 유래됐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높이 12m,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한 10층 불탑인데, 그 형태와 평면이 워낙 특수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Editor’s Pick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의암 손병희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탑골공원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3·1운동기념탑과 3·1운동 기념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정면으로 손병희 선생 동상이 위치한다.
●종묘 담장 그 너머
서순라길
서순라길은 종묘 서쪽 담장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고즈넉한 돌담길이다. 과거 조선시대, 종묘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청을 ‘순라청’이라고 하는데 그곳의 병사인 순라군이 순찰하던 서쪽 길목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과거 익선동, 삼청동, 북촌 등 전통적인 인기 관광지에 비해 비교적 새롭게 떠오른 신흥 골목. 특히 꽃이 가득 피는 봄과 형형색색 단풍이 돌담과 어우러진 가을에 장관을 이룬다. 담벼락 건너편을 따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한옥을 개조한 카페, 주얼리 공방과 가게들이 800m 남짓 거리에 속속히 들어섰다. 무심코 골목을 터벅터벅 거닐다 등장하는 작은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돌담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어느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셔 본다.
서순라길이 이토록 평화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높이에 있다. 서순라길에는 층고 제한이 있어 건물이 2층을 넘지 않는다. 주말에는 차량을 통제해 오롯이 사람을 위한 거리로만 운영하기 때문에 더더욱 여유롭고 호젓한 분위기다. 서순라길은 공예특화거리이기도 하다. 한국색동박물관, 서울주얼리지원센터 등 공예 관련 볼거리가 다양하고, 거리 구석구석 금속, 자수, 조각보 등 다양한 테마의 공예 작업실이 위치한다. 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만든 작품들은 쇼윈도에 전시를 하는데,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카페와 레스토랑도 눈 여겨볼 곳들이 많다. 집마다 나무와 기와, 벽돌 등 공간을 구성하는 재료 본연의 매력을 살린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리로 메운 중정, 서순라길이 내려다보이는 루프톱, 기와 사이로 보이는 하늘. 이 모든 한적함이 종묘의 서쪽 담장, 그 너머에 모여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기념관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인 ‘백남준(1932~2006)’은 6세부터 18세까지 어린 시절을 종로 창신동에서 보냈다. 실제 그가 거주했던 주택은 불타 없어졌지만, 한국 최초의 재벌가답게 ‘1만 평방미터’나 되는 솟을대문의 ‘큰대문집’이었다고 한다. 현재 백남준 생가터 부지에는 교회, 가옥, 상가들과 백남준기념관이 자리한다.
백남준기념관은 1960년에 지어진 단층 한옥의 원형을 보존해 유년 시절 백남준의 세계를 그려 보게 한다.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기록들이 상설전시에 담겨 있고,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백남준 카페는 방문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여성 교육의 시작점
배화여자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8년, 조세핀 캠벨 선교사가 설립한 캐롤라이나 학당에 그 시작이 자리한다. ‘조세핀 켐벨’은 1897년 한국에 들어와 무려 23년 동안 조선의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다. 그녀가 설립한 학당이 1909년 윤치호에 의해 ‘배화’로 교명을 바꾼 것이 지금 이름의 유래다.
배화학당에는 민족운동가 남궁억 선생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교사로 재직하며 영문법, 조선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직접 지은 역사책 <조선이야기>를 통해 민족의 자부심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심어 주기도 했다.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배화학당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받아 만세운동에 참여하려 했지만, 사전 검열에 걸려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3월5일 학생 연합 시위에 참여했고, 3월10일에는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건히 하여 1920년 3월1일 40여 명의 배화학당 학생들이 학교 뒤편 필운대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교로 나뉘어 있다. 학교 휴무일인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만 내부 방문이 가능하다.
●민족 시인의 자취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암울한 식민 시대에 태어나 민족을 사랑하고 독립을 열망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한 민족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곳이다. 과거 용도 폐기된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 해 꾸며 냈다. 수도가압장을 문학관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의 이미지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문학관 내부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했던 젊은 시인, 윤동주의 작품과 서신, 유품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 정체성이 모호한 국경 밖 경계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고뇌하며 그 생각을 시로 표현했다. 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가 1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때가 있는데, 전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해, 1941년이다. 커져만 가는 고민 탓에 시를 쓰지 못했던 시인은 이후 자신의 방황과 고민을 솔직하게 표현한 시를 발표하는데, 그 유명한 <서시>와 <자화상>이다. 1942년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촌이었던 송몽규와 함께 ‘조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이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2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공개된 윤동주 시인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 재판정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키워 독립운동의 바탕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단호하고도 서정적인 감성은 여전히 그가 세상에 남긴 문학 속에 살아 숨 쉰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그의 발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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