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보러 간 계곡에서 만난 독사 두 마리
족저근막염에서 단기간에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통증이 생긴 지 거의 두어 달. 발을 디딜 때마다 아파서 절뚝거린 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산행은 불가능하다.
“발로 차지 마세요!”
발바닥을 내놓은 채 엎드린 내게 의사는 부탁 같은 사전 경고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기에 발길질을 하지? 체외충격파를 보고 하는 얘기다. “타타타타” 무언가 내 발바닥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으윽, 아아, 겨우겨우 참는다. 당분간은 이 통증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 낫게만 해준다면….
단풍만큼 예쁜 연곡사 은행나무.
지리산 단풍의 최고봉, 피아골
지리산 단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구례 피아골이다, 하동 산꾼들은 토끼봉으로 이어진 목통골을 최고로 친다. 현재 샛길로 묶여 갈 수 없는 목통골이 개방만 되면 피아골로 몰린 사람들이 전부 목통으로 올 거라 장담할 정도다.
남원의 산꾼이라면 뱀사골을 최고로 칠 테고, 함양은 한신과 칠선계곡, 산청은 중산리나 대원사 코스를 꼽을 게 틀림없다. 개방된 등산로가 몇 곳 되지도 않을뿐더러 지리산 어디든 계곡을 낀 곳이라면 단풍이 끝내주는 까닭이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매년 부동의 1위다.
그러고 보니 발의 통증이 시작된 곳도 지난여름 피아골에서였다. 수입 등산화를 5년째 신고 있었는데, 그 직전 삼신봉 산행을 하면서 딱 이번 가을까지만 신고 밑창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을까지 기다리기로 한 건 패착이었다. 하필 짧은 반바지를 입었고, 등산양말 대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패션 양말을 신었었다. 얇아진 바닥창에 더 얇은 양말은 한없이 내리꽂히는 계단과 딱딱한 돌길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 안에 갇힌 발바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조금씩 화를 내고 있었다.
거의 매년 습관처럼 가는 피아골인데, 아무래도 올해는 건너뛰어야 할 것 같다. 늦여름에 다녀온 그 산행 때문에. 아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만 더 신고’ 고집을 부려서, 그냥 새 신발을 진작 살 것을….
40여 년간 지리산 대피소를 지켜온 고 함태식 옹.
지리산엔 사람이 있다
원점회귀를 하려면 구례에서 성삼재행 버스를 타는 게 좋다. 한때 사라졌던 노선이 올해 운행을 재개했다. 하지만 배차간격이 대폭 줄었다. 그마저도 평일엔 승객이 거의 없다.
“이러다 또 없어지는 거 아냐?”
아랫녘에 사는 산꾼은 버스 시간표를 볼 때마다 마른침을 넘긴다. 그날도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무임승차를 한 것도 아닌데 어찌나 민망하고 무안한지. 하늘색 버스는 굽이굽이 도로를 돌아 해발 1,000m가 넘는 산중 휴게소에 하나뿐인 승객을 떨궈 놓는다.
온천과 산수유로 유명한 산동면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 중인 정영혁 대표를 만난 건 노고단 고개에서였다. “백두대간 자락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안고 지리산으로 내려온 지 얼추 10년. 게스트하우스 사장 직함을 달기 전까진 S은행 지점장이었고, 입대를 앞둔 1983년엔 무려 51일 일정으로 도보여행에 나섰던 그다. 지원조가 없어 (당시) 태백산맥 종주를 포기하고 선택한 결정이었다. 한반도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가파도와 제주도, 배를 타고 완도로 들어와 해남 땅끝마을부터 2번국도를 따라 부산, 거기서 포항을 지나 7번국도, 동해안을 허리춤에 두고 강원도 고성까지 갔다가 설악산 대청봉을 넘어 인제, 배를 타고 소양댐을 건너 서울로 돌아온 일정이었다.
단풍나무 아래의 붉은 그늘.
“허드렛일하며 어렵게 학교를 다녔던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힘들 때면 망설임 없이 찾아간 곳이 산이었어요. 산은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산에 가면 답이 나왔거든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구례에 정착한 ‘노고단게스트하우스’ 정 대표도 최근 골절상을 당해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노고단과 피아골, 그 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단연 2013년 작고한 ‘지리산 호랑이’ 고故 함태식이다. 마흔넷에 노고단대피소 관리인으로 들어와 지리산에서만 38년을 보낸 털보 산장지기.
‘조용히, 깨끗이, 불조심’
텐트로 밀집된 야영 터를 관리하고, 조난자의 목숨을 구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왈패들의 주먹에 몸을 상하는 등 지리산을 지키며 당한 수모도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그렇게 16년간 관리해 온 노고단산장이 국립공원공단으로 넘어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그는 피아골로 내려왔다. 결국 2009년 최종 하산한 그는 산에서 내려온 지 4년 만에 천상의 산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피아골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단풍 명소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폭포와 소들이 많다.
피아골 단풍은 핏빛처럼 붉다더니…
피아골 삼거리에서 임걸령 방향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길을 꺾는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긴 하지만 길은 직전마을로 내려설 때까지 내리막 일색이다. 발바닥 통증은 이 하산길에서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나를 괴롭힌 건 통증만이 아니었다. 누런 나무 계단 한쪽에 시커먼 생명체가 납작 붙어 있었다. 폭이 1m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을 떡하니 지키고 선 녀석은 독사였다. 검은색 줄이 선명한 까치살모사(칠점사)다.
소방청 통계를 인용한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서울·경기 지역 119안전센터에서 뱀 출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건수는 총 9,638건이었다. 2018년 1,703건, 2019년 2,098건, 2020년 2,781건, 2021년 3,056건으로 꾸준히” 늘었다고 한다. 하물며 여긴 지리산. 그늘 속에 한 마리가 더 있는 걸 발견하기 전까진 그래도 버텨볼 만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계단에 똬리를 튼 건 칠점사가 확실한데 그늘에 있는 건 칠점사 같기도 하고, 살모사 같기도 했다. 둘 다 살이 통통하게 찐 데다 제법 크다. 어쩌면 세 마리일지도 모른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구계포교.
“따라오지 마. 나 따라오지 마.”
쿵쾅쿵쾅. 빈 산에 계단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돌아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발이 덜덜 떨렸다. 피아골대피소까진 아직 600m가 남았다. 대피소에 왔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곳곳에 ‘뱀 출현주의’라는 안내판이 붙었고, 건물 출입문은 굳게 닫혔다. 뱀을 본 이후부턴 풍경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대피소에서 마을까지 4km는 거의 돌길. 뱀이란 동물은 돌 틈을 좋아하는 터라 나뒹구는 나뭇가지에도 깜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와중에 계곡의 모든 길이 막힌 건 내내 아쉬웠다. 뱀사골은 데크 중간중간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치밭목 코스는 아예 금줄이 없고, 대원사 쪽은 여름 성수기에만 계곡을 개방한다. 하지만 피아골은 여름이든 가을이든 꽁꽁 닫혀 있다. 돼지 치듯 등산객을 한길로 몰아세우는데, 정작 성수기엔 그 금줄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물가 옆 바위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거나 쉬어간다. 융통성이 왜 피아골만 피해 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 융통성 이전엔 산꾼들의 철저한 책임이 선행되어야겠지만 말이다.
표고막 터를 지나서야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이렇게 넓고 곧은 길이라면 뱀이 나와도 무섭지 않다. 버스 정류장 앞 식당에 들러 “맥주만 한 병 팔 수 있냐?”고 묻는다. 안주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마치 정글 속에서 귀환한 사람처럼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마지막 모금을 다 마신 후에야 구례로 가는 버스가 들어왔다.
바로 두 달 전 늦여름 산행 이야기다. 차창 밖으로 멀어진 풍경처럼 계절은 후딱후딱 정신없이 멀어졌다. 이번 가을엔 어느 산이 되었든 단풍을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언젠간 다시 건강한 발을 갖게 되겠지. 그러길 바랄 수밖에….
누군가의 소망이 담긴 돌탑.
산행 길잡이
구례에서 성삼재행 버스를 타고 노고단~피아골 삼거리~피아골 산행 후 구례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는 게 제일 무난하다. 이 경우 약 11.4km로 6시간쯤 걸린다. 노고단 정상을 오갈 경우 거리와 시간이 늘어난다. 회수해야 할 차가 없다면 피아골에서 임걸령~화개재를 지나 뱀사골로 내려가는 게 좋다. 대신 거리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나므로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 노고단에서 주능선으로 넘어가려면 낮 12시, 11월부터 시작되는 동절기에는 오전 11시 전에 통과해야 한다. 노고단에서 피아골 삼거리까진 비교적 길이 좋고, 삼거리에서 피아골대피소까지 2km는 길이 가파르다. 마을까지 남은 4km도 울퉁불퉁 돌길이라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 구례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영등포, 용산, 수서 등을 오가는 기차가 구례구역에 선다. 구례에서 화엄사를 거쳐 노고단으로 가는 버스는 평일과 주말 시간이 다른데 주말 기준 하루 4회(08:40, 10:20, 14:20, 16:20)이고 요금은 4,500원, 40분쯤 걸린다. 피아골에서 구례로 나오는 버스는 매시 20분이다. 자가용의 경우 성삼재에 주차하면 회수하기 힘들다. 터미널 앞에 무료 주차가 가능하므로, 읍에 세워두고 버스를 타는 게 좋다. 동서울터미널에 성삼재까지 직접 가는 버스가 있다(23:00). 부산과 구례를 오가는 버스도 운행 중이다.
맛집(지역번호 061)
화엄사 입구에 버섯전골이 맛있는 만남가든(782-9172), 다슬기강된장이 깔끔한 지리산수라간(783-1033) 등이 있고, 읍내에 수제돈가스 전문 지리산오여사(0507-1414-1431), 돼지국밥 전문 봉성식당(782-7262) 등이 있다. 지리산 산채만큼 유명한 게 구례 다슬기탕인데 부부식당(0507-1345-9113), 토지다슬기식당(781-2642)이 맛있다. 피아골 입구 직전마을에도 식당이 많다. 그중 계곡식당민박(782-7442)이 맛도 좋고 인심도 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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