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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이제는 갈 수 없는 길…20년 전 추억을 소환하다

by 白馬 2023. 9. 28.

하봉에서 왕등재 지나 밤머리재까지

 

중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천왕봉을 가장 천왕봉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중봉이다.
 

덕산으로 진입하는 4차선 도로가 2차선으로 바뀌면서 한동안 차량 정체가 이어졌다. ‘휴가철에 일요일까지 겹쳐서 그렇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덕산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윗새재요? 지금은 피서 인파가 너무 많아서 대원사까지밖에 못 가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대원사에서 치밭목은 무려 7.7km, 윗새재에서 가는 것보다 3km나 멀었다. 하산, 아니 당일산행이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 지금은 폭염이 이글대는 여름 한낮, 나는 박배낭을 메고 있었다.

 

천왕봉에서 치밭목으로 이어진 길은 지리산의 여느 등산로보다 원시적인 느낌이 강하다.

 

유평에서 치밭목 가는 길

 

“기사님, 갈 수 있는 데까지 부탁드려요.” 

웃돈을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참았다. 이 더위에 포장도로를 걸었다간 치밭목에 닿기도 전에 방전될 게 뻔했다. 길은 좁았다. 맞은편 차는 내려서려고 바둥댔고, 택시는 올라가려고 용을 썼다.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세석대피소에서 숙박 후 천왕봉(1,915m)과 치밭목을 거쳐 대원사 버스정류장까지 내려온 적은 있었다. 계절은 같았지만 그땐 하산이었고, 20대였다. 택시는 용케 대원사를 지나 한참을 올라갔다. 유평마을 초입에 이르자 택시는 멈춰 섰다. 기사님은 “가는 것도 그렇지만 내려오는 데도 한참 걸릴 것”이라며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며, 기사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산길로 들어선다.

금줄이 쳐진 여느 계곡과는 달리 이 코스엔 ‘출입금지’가 없다. 

“유평마을이 나오긴 나오나요?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와, 여기를 올라가시다니 대단해요”라는 식의 말들이 등산로 위에서 흩어진다. 그만큼 길고 지루한 길이지만 풍부한 수량 덕에 힘이 나기도 한다. 윗새재와 유평마을로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 심기일전해 치밭목(1.8km)으로 오른다. 이 계곡의 백미는 치밭목 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예전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치밭목대피소. 햇반이나 생수 구입 시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

 

무재치기폭포, 등산로에서 50m쯤 벗어나 있으니 여기까지 왔다면 꼭 한 번 들러야 할 명소다. 하산길이었다면 옷을 벗고 폭포 물줄기에 기대고픈 곳. 지금 와 생각하니 그냥 올라가는 길이라도 그럴 걸 그랬다, 이미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 아래 북적이는 계곡과는 달리 치밭목대피소 투숙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한 방에 묵는다. 남자는 1층, 여자는 2층도 아니다. 좁고 작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머리를 맞댄 채 누웠다. 

누군가 코를 곤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다. 휘영청 밝은 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치밭목 하늘 위엔 촘촘히 박힌 여름 별들이 한가득. 대피소의 불빛만 없었다면 몇 곱절 더 밝았을 별들이 잠 못 이룬 지리산꾼의 머리 위에서 뱅뱅 맴을 돌고 있었다.

 

중봉 직전에 있는 쉼터. 이곳 맞은편에 잠겨 있는 컨테이너 건물이 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길, 동부능선

새벽 3시50분, 대피소를 나서지만 천왕봉은 어림도 없다. 써리봉(1,587m)에서 해맞이를 하고 중봉(1,874m)으로 간다. 동부능선 초입은 중봉 직전 오른쪽에 있다. 비법정탐방로(샛길)로 묶여 공식적인 산행은 금지됐지만, 지금도 암암리에 ‘태극종주’를 하는 이들이 한 마리 짐승처럼 넘나드는 길. 

태극종주를 처음 한 게 2001년 8월, 그때도 여름엔 어김없이 더위로 고생했었다. 노고단과 세석에서 숙박을 하고 맞은 세 번째 날, 우리는 치밭목 코스를 버리고 하봉으로 방향을 틀었다. 국골 갈림길 이후론 일행 모두 초행이었고, 사건은 그 초행인 길에서 벌어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2년 전이다.

K의 귀에 벌레가 들어간 건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리더인 Y가 플래시를 비추지만, 어떤 녀석이 들어갔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산행 내내 까불고 장난치던 K의 밝은 표정이 붉게 상기되었다. 30여 분이 지나도 벌레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귓속에 담배 연기를 뿜어보고 라이터의 가스를 넣어보고, 빨대를 꽂아 숨을 들이마셔도 녀석은 좀체 움직이질 않았다. 날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써리봉 일출. 치밭목에서 하루 묵을 경우 보통은 중봉에서 일출을 보는 이가 많다.

 

‘형, 119 부릅시다. 아니다. 병원으로 갑시다!’ 

K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단다. 갑자기 윙, 소리가 나면서 귓속으로 뭔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부스럭대는 소음이 떠나질 않았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핀셋을 이용해 벌레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K를 괴롭혔던 건 나방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좁은 귓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귓속에서 몸을 틀 수 없었을 나방의 답답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방이 귀에서 나오고 나서야 모두들 “하아-”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사건은 외고개를 지나면서 벌어졌다. 열 개의 랜턴 불빛이 가지런히 길을 이었지만, 왕등재 습지(서왕등재)를 앞두고 길을 잃고 말았다. 이미 밤이었고, 모두 지친 상태였다. 전북 남원부터 바래봉~정령치~노고단~세석~천왕봉을 지나 경남 산청에 이르기까지 사흘째 강행군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악재는 60리터 써미트 배낭 어깨끈이 끊어진 데 있었다. 이번에도 K였다. K는 하산을 고집했지만 낯선 산중에선 모든 게 위험했다. 캄캄한 능선에서 흩어질 수도 없었고, 누구 하나를 하산시킨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결국 K의 짐을 나머지 일행들이 조금씩 옮겨 담았다.

 

중산리에서 천왕봉 가는 길. 막판 경사도가 만만치 않다.

 

왕등재에서의 하룻밤

앞서 걷던 K가 걸음을 멈춘다. 감이란 건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일전에 밤머리재~왕등재~수철리 구간을 산행했던 그가 어둠 속에서도 왕등재임을 직감한 듯하다. 후미는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남자 몇 명이 K를 따라 오른쪽 소로로 내려간다.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온 목소리 “늪지다! 물이다!” 해발 약 960m, 길이 120m, 폭 50m의 장타원형. 이탄층을 통해 식물의 역사와 습지 생성 요인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연 자원! 신비한 고산 습지를 만났다는 설렘보다 드디어 산행을 끝냈다는 사실에 더 안도했던 태극종주 마지막 밤. 

 

구름에 걸린 달이 물고기처럼 습지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문제는 식수였다. 밤 10시에 깨끗한 샘을 찾는 건 무리였다. 늪지 물을 조금 받아본다. 온갖 수서곤충의 서식지답게 이물질이 가득하다. 색깔도 누런데다 알 수 없는 냄새까지, 맨정신으론 도저히 마실 수 없다. 수건으로 걸러내고 끓여서 커피믹스를 넣는다. 군대에 있을 땐 군화가 밟고 간 논물도 맛나게 마셨다는 남자 일행들은 물맛에 감탄 연발이다. 남은 부식과 세석에서 얻어온 소주까지, 지리산에서의 세 번째 밤이 달빛을 따라 무르익는다.

 

잠은 늪지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자기로 한다. 비닐과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위에 다시 비닐을 덮는다. 밤하늘엔 푸른 나뭇잎, 귓속을 파고드는 풀벌레 소리와 조그맣게 흐르는 물소리….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밤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만나, 이곳 이 자리에 함께 누워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바람을 쐬고 있을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밤이 쉽게 잊히질 않는다.

 

운해나 일출은 없었지만 지리산의 아침은 언제나 울림을 준다.

그후로 왕등재 다리에선 두 번이나 더 잤고, 그중 한 번은 혼자였다. 멧돼지며 독사를 보고 기겁을 했으면서 기어이 혼자 그 길을 걸었던 20년 전의 나, 지금 하봉 입구엔 출입을 금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저 금줄을 치워도 이제 동부능선을 오갈 사람은 많지 않다. 산꾼은 점점 나이를 먹고, 노쇠한 세대를 이을 젊은 산꾼은 생각만큼 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보다 뱀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칠점사 앞에서 절절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2023년, 여전히 하봉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태극종주 외에도 초암능선, 두류능선, 허공다리골, 국골 또 그 밖의 황금능선, 장당골, 통신골, 7암자, 불무장등, 용수골, 이끼폭포, 묘향대, 심마니능선, 대성폭포와 영신대 등등 추억으로 남은 지리산의 모든 길에 경의를 표할 뿐. 언제쯤 걸을 수 있을까. 언젠가 저 길이 지리산꾼들에게 열릴 날이 오긴 올 것인가. 그 길이 다시 열린 날, 우리는 여전히 산을 오를 만큼 건강한 삶을 살고 있을까.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20여 년 전의 추억과 막힌 길들에 대한 아쉬움, 그럼에도 내게 늘 감동을 줬던 산…. 울컥대는 가슴을 억누르고 중봉을 내려선다. 이제 천왕봉을 지나 중산리로 하산하면 끝, 해발 1,800~1,900m대의 높은 산인데도 폭염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흙 위로 떨어졌다. 수많은 이들의 짠내를 고스란히 받아낸 지리산은 저 아래보다 먼저 가을을 맞는다. 벌써 새하얀 구절초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계절은 그렇게 돌고 돌아 산을 한껏 보듬는다. 

천왕봉 아래 천왕샘. 바위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나뭇잎으로 모아 담는다.

 

산행길잡이

유평마을 산행 초입에서 윗새재와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4.4km, 삼거리에서 치밭목대피소까지 1.8km이다. 이 삼거리에서 치밭목으로 가는 길 중간에 무재치기폭포가 있다. 왕복 100m이므로 예까지 왔다면 한 번쯤 가보는 게 좋다. 치밭목대피소는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해야 하며, 1박 요금은 주말과 성수기 1만3,000원이다. 햇반, 생수, 우비 등을 판매하며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 인원이 적을 경우 한 방에서 남녀가 혼숙한다. 출발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새벽 일찍 출발하면 써리봉이나 중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 중봉~천왕봉 구간엔 풀이 길어서 반바지 차림이라면 풀독에 유의해야 한다. 치밭목에서 천왕봉은 4km. 이후 중산리로 하산한다. 로타리대피소를 기준으로 순두류와 칼바위 코스로 나뉜다. 칼바위 코스는 천왕봉부터 5.4km, 순두류 코스는 7.8km지만 3km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는 원지, 부산이나 진주에서는 산청군 시천면(덕산)을 거쳐 대원사행 버스를 탈 수 있다. 덕산발 대원사행은 시외와 군내를 합쳐 하루 6회 있지만 산행 시간을 줄이려면 유평마을이나 윗새재까지 택시를 타는 게 좋다. 요금은 2만 원 남짓. 대원사 버스정류장부터 치밭목은 약 10km로 윗새재보다 5km 정도 길다. 중산리 하산 후엔 원지나 진주까지 나가는 버스(하루 11회)를 탈 수 있다. 자가용을 갖고 왔다면 덕산에 무료 주차를 하고 택시로 윗새재 이동, 산행 완료 후엔 중산리에서 버스를 타고 덕산으로 나와 회수한다.

 

맛집(지역번호 055)

덕산은 시천면소재지여서 식당과 제과점, 하나로마트와 편의점 등 먹거리를 구할 곳이 많다. 소문난돼지국밥(974-1616)은 깔끔한 국물 맛과 깍두기로 유명하다. 도로변 촌국수(972-9624)는 콩국수 7,000원, 일반 국수 6,000원이다. 덕산기사식당(973-7463)은 8,000원으로 부담 없는 집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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