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정상석 스토리
한국인에게 지리산 천왕봉(1,915m)은 각별하다. 남한 내륙 최고봉이라는 지리적 위상이나 최초의 국립공원 지정 등 객관적 지표만으로는 이 각별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천왕봉 정상석에 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문구다. 천왕봉을 오르려는 이들이 무엇을 헤아려보려 하는지 이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글이 있을까.
그런데 이 문장이 새겨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따랐다. 먼저 천왕봉 정상석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천왕봉 표지석의 시초는 지리산 동부 루트 개척 학술조사 등반대의 활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1964년 11월 27일부터 12월 5일까지 8일간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반로에 이정표와 안내판을 설치하고, 정상에 곡괭이로 땅을 파고 ‘천왕봉 1,915m’라 표시된 비목을 설치했다. 이 비목은 1971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峯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이라는 남명 조식의 시구가 적힌 자그마한 40cm 높이의 정상석이 들어섰다. 진주 산악인들이 세웠다고 하며, 정상석 옆면에는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과 방장산이 새겨져 있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 천왕봉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각별했던 조선 중기 학자다. 인생 후반부에 지리산 덕천동(현 산청군 덕산면)에 살았던 것도 천왕봉을 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었으며, 생전에 12번이나 천왕봉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1982년 진주 산악인들은 검정색 오석에 ‘지리산 천왕봉’을 새긴 정상석을 제작해 세웠다. 그동안 있던 정상석이 산에 비해 작기도 했고, 주변에 낙서도 많은 탓에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이 정상석은 그리 오래 서 있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2일 경남도에서 현재의 정상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주도한 건 당시 이규효 경남지사와 5공화국 실세였던 권익현 국회의원. 헬기를 동원해 진주 남강의 강돌을 운반했다고 한다.
문제는 정상석 제막식 직후 발생했다. 정상석 설치를 주도한 경남도 측이 정상석 뒷면에 ‘경남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리산 천왕봉 자체는 경남권에 속한 것이 맞지만, 지리산 전체는 경상도에서 전라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를 경남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 불쾌해하는 여론이 높았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가 ‘경남慶南’ 한자를 도려내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만다. 이후 지리산은 경남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산이라는 여론이 더욱 확고해졌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기존의 ‘경남’이 있던 자리에 대신 ‘한국韓國’을 새겨 넣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훼손한 부분에 글자를 다시 새겨 넣은 탓에 다소 어색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는 2000년 다시 또렷하게 새기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태어난 천왕봉 정상석이 현재 우리가 만나는 그 모습이다.
[정상석] 설악산 대청봉 정상석 글씨가 빨간색인 이유는?
설악산 정상석 스토리
대청산장지기이옥모씨가 세운 대청봉 정상석. 사진 상에는 해발고도가 대문자 M으로 표기돼 있는데 미터법 표기상 소문자 m을사용해야 한다는 민원이 접수돼 현재는 수정된 상태다.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1,708m) 정상석은 특이하게도 글자색이 붉다. 이 강렬한 빨강은 대청봉까지 오르며 땀과 기운을 쏟아내 텅 비어버린 산꾼의 마음에 다시금 불을 지른다.
이 정상석을 세운 것은 대청산장지기였던 고故 이옥모씨. 대청산장은 정상에서 오색 쪽으로 100m쯤 아래 있었으며 군사용 벙커를 개조해 만든 건물이었다. 예약이란 개념도 없어 먼저 와서 눕는 사람이 임자였던 시절이었기에 산꾼끼리 옥신각신하곤 했는데 이를 정리하던 이가 이옥모씨였다고 한다. 대청산장은 1995년 중청대피소가 건립되자 곧 폐쇄됐고, 10년 뒤인 2006년 완전 철거됐다.
이옥모씨가 대청봉 정상석을 세운 시기는 1985년 봄으로 전해진다. 그는 산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정상 주변부 자연석을 골라 밧줄로 묶어 일으켜 세웠고, 양양에 거주하던 석공을 사비로 불러 1박 2일 동안 작업한 끝에 지금의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최원남 계장에 따르면 대청봉 글씨가 붉은색인 이유는 시인성, 즉 눈에 잘 보여야 되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최 계장은 “대청봉은 기상이 안 좋아서 자주 글자색이 희미해졌는데 그때마다 공단은 검은색, 빨간색을 번갈아가며 칠했었다”며 “검정색으로 칠할 경우 겨울철 시야 확보가 어려울 때 정상석 재질과 글자가 잘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주로 붉은색으로 더 작업을 한 것 같다. 2015년부터는 아예 내부 지침이 만들어져 붉은색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이 정상석이 홀로 정상을 지키고 있지만, 그 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8년 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정상석이 더 있었다. ‘요산요수’와 ‘양양이라네’ 정상석이다. 모두 2015년 국립공원공단의 정상석 정비 사업에 의해 철거됐다.
‘양양이라네’ 정상석은 1986년 당시 이종호 양양군수가 세웠다. 높이 1.5m 자연석에 ‘양양이라네!’란 글자와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 1번지’가 새겨져 있었다. 대청봉의 행정구역이 양양에 속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는데 설치 전후로 대청봉의 주소를 놓고 속초, 인제 등 인접 시·군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은 바 있었다.
또 다른 요산요수樂山樂水 정상석은 지금의 대청봉 정상석보다 훨씬 먼저 설치됐었다. 1966년 10월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 및 대구 산악연맹회장의 친필을 까만색 오석으로 된 석판에 새겼고, 에코클럽의 김진수, 오운소, 현정웅, 이원의씨가 용대리에서부터 직접 짊어지고 올라가 설치했다. 양양이라네 정상석과 마찬가지로 봉우리 명이나 높이 표기는 없었다.
이외에도 설치시기는 물론 철거시기도 모호한 정상석들이 1960~1980년대 사이에 더 있었다고 한다. 한국산서회 김진덕씨는 “적어도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손으로 들 수 있는 자연석에 대청봉이라 새기고 빨간 페인트로 칠한 표지석이 하나 더 있었다”며 “또한 요산요수 정상석이 세워질 때 ‘산은 우리를 부른다’로 시작되는 문구가 적힌 비가 세트로 같이 세워진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이 비가 언제 철거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정상석이 설치되기 전 대청봉의 모습은 어땠을까? 너덜 위에 듬성듬성 돌탑들이 들어선 모양을 상상해 보면 된다. 김 씨는 “1955년 한국산악회 홍종인의 등반기와 손경석의 등반기, 1957년 강원산악회의 이문주, 1959년 1월 동국대팀의 기록을 보면 일관되게 케른(돌탑)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이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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