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공단, 2015년 공원 내 정상석 규격 통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산들이다. 그래서 각기 유서 깊고 특색 있는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설악산 대청봉은 붉은색 글씨의 ‘대청봉’, 지리산 천왕봉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북한산 백운대의 태극기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세워진 정상석이 산의 품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묘비를 연상케 하는 비석 형태라든지, 정상부 지형과 이질적인 소재로 만들어진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에 국립공원공단은 지난 2015년 공원구역 내 정상석을 대대적으로 전수조사하고 필요에 따라 미설치된 봉우리에 신설하거나 기존의 것을 교체한 바 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기존 정상석 중 자연석으로 이뤄진 것은 46%인 50개에 불과했고, 비석형이 30곳(28%), 말뚝형은 25곳(23%), 기타 3곳(3%)이었다고 한다.
공단은 자연석형이 아닌 58개의 정상석이 자연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형태라고 판단해 이 중 지리산 반야봉 등 38개봉의 정상석을 교체했다. 또한 계룡산 삼불봉 등 기존에 정상석이 없던 15개봉에 새롭게 정상석을 설치했고, 추가로 정상석 주변부 경관이 난잡했던 20개봉의 경관을 정비하기도 했다.
교체되기 전, 지리산 반야봉 정상석 사진.
국립공원공단 생태시설부 황정윤 계장은 “당시 원칙은 자연석을 이용할 것, 지형여건 등을 고려해 알맞은 크기를 선택하되 최대 2m가 넘지 않을 것 등이었다”며 “또한 봉우리 이름, 해발고도, 해당 국립공원 이름 정도만 넣되 서체나 디자인은 각 사무소의 재량에 따라 독특하고 수려하게 만들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기존에 설치돼 있던 정상석들은 각 사무소가 임의로 처리해 전체 현황 파악은 어렵다”고 했다.
또한 가장 최근에 바뀐 국립공원 정상석은 오대산국립공원 구역에 있는 계방산(1,577m) 정상석이다. 기존에는 한글로 표기된 정상석이 있었는데 비석형인데다가 평창군 관련 문구가 적혀 있어 국립공원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는 “2022년 인위적인 정상석을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자연석으로 교체했다”며 “한자 서체는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한자를 조합해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대표적인 동계산의 지위에 맞게끔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오는 6월 국립공원 지정이 확실시되고 있는 팔공산의 정상석들은 어떻게 될까? 현재 팔공산권역의 정상석들은 개인이나 지역산악회에서 세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탄소중립전략부의 문창규 차장은 “팔공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논의될 문제로 현재 계획된 것은 없다”면서도 “다만 각 봉우리 현황을 파악한 결과 주봉 비로봉을 비롯해 정상부 정비 사업의 소요는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기존 공단의 정상석 관련 방침을 적용하되 정상석을 세운 개인이나 단체와 협의해서 종합적으로 풀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국립공원 지역 외 산림에 세워진 정상석의 경우 별도 규격이 따로 정해진 것이 없어 해당 지자체나 토지소유주의 재량에 따른다.
[정상석 개인이 세우려면] 山主 동의+ 공원관리청 허가 거쳐야
개인이나 산악회 명의로 정상석을 세우려면 산주의 동의와 공원관리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불법시설물인데 왜 철거 안 합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산에 있는 정상석 90%는 없애야 됩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모산 격인 산이나 국립, 도립, 군립공원의 산들의 경우 대부분 지자체에서 정상석을 직접 설치하거나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비교적 산행지로 각광받지 못하는 산이나, 외진 곳에 솟아 있는 산은 지도상에 이름이 뚜렷해도 공원관리청에서 직접 설치한 정상석은 없는 경우가 많다. 대신 이런 곳엔 개인이나 지역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들이 있다.
이처럼 개인이나 지역산악회가 정상석을 세우려면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그 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산주동의서를 받아야 하며, 그 산주동의서를 갖고 공원관리청, 즉 지자체 산림과나 공원사무소를 찾아가 설치행위 허가를 받으면 된다. 그 이후에 공원관리청 담당자의 감독에 따라 정상석을 세우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허가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 지자체에서 공원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A씨는 “현재 대부분의 정상석들이 설치된 지 오래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모습이 흉물스럽다거나 정상임을 알리는 기능보다 다른 홍보 목적인 것이 아니고 잘 관리만 되고 있다면 대부분 존치시켜두는 편”이라며 “무엇보다 지역 산꾼들이 자기 산을 아끼고 알리려는 취지에서 설치해 둔 경우가 많기에 불법행위라고 무조건 철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어느 정도 행정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안인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가령 한남금북정맥 상에 위치한 충북 음성 마이산(472m)의 경우에는 정상석이 3개나 있다. 정상임을 알리는 나무 알림판과 지역 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 등이 정상부 곳곳에 산재해 있어 어디가 정확히 정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불법시설물이므로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모 지방에선 한 봉우리에 설치된 정상석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지역 산꾼 B씨는 몇 년 전 본인이 설치해 둔 정상석을 지난해 누군가 고의로 파손하자 올해 다시 정상석을 제작해 소속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설치했다. 그러자 이번엔 해당 공원관리청에 이 정상석이 불법시설물이라는 민원이 접수됐다.
공원관리청 관계자는 “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불법시설물인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일단은 직원을 보내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B씨는 “악의적인 민원”이란 입장이다.
“그 봉우리가 사람들이 자주 다니고 좋아하는 곳인데 정상석이 없던 것이 안타까워 선의로, 자비를 털어 만든 정상석입니다. 이번엔 회원들 4명과 돌아가면서 52kg 무게의 정상석을 짊어지고 1.5km를 걷고, 고정로프 구간도 기어 올라가서 세웠습니다. 일부러 자연훼손도 최소화하려고 바닥 고정 작업도 하지 않고 올려두기만 했어요. 지난 정상석이 묘비 같다고 해서 자연석으로 했고요.
지자체가 할 일을 대신 한 것과 진배 없는데 이걸 불법시설물로 몰아가는 건 악의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지역 산군에 세워진 정상석 100개 중 95개가 개인이나 지자체가 세운 거고, 제가 아는 바 허가를 받은 적 없었습니다. 이것들도 다 철거해야지요.”
지역에 뿌리를 둔 산악회가 애향심을 갖고 세운 정상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집행해야 할까, 아니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정상석을 세울 소요가 있을 때 지역산악회와 공원관리청이 합심해서 같이 일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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