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객에게 고소 당한 사연

예약제가 도입되기 전 대피소 풍경.
살인미수자가 될 뻔했다. 대피소 미예약 탐방객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 대피소가 있는 자리는 1970~1980년대엔 A형 텐트가 군락을 이루고 너나 할 것 없이 대형 카세트를 가져와 노래를 틀던 곳이다. 텐트를 치려고 작은 나무나 풀도 제거됐고, 설거지로 물이 오염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대피소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이런 환경오염과 소음은 많이 줄었다. 뒤이어 도입된 것이 대피소 사전예약제다.
이 예약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장터목대피소 팀장 시절에 일이 터졌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오후 2시, 4시에 예약제 실시를 안내하고 비예약자는 하산하라고 방송했다. 방송에 그치지 않고 직접 취사장, 헬기장, 야외 데크를 일일이 찾아 구두 안내도 했다.
60대 후반의 예약자 탐방객 A씨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일몰 사진을 찍으려고 올라왔다”며 “내일은 예약하지 않아 백무동으로 하산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날이 흐리고 이슬비가 내린 탓에 원하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음날 A씨는 아침 일찍 대피소 매점에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났을 때도 대피소에 있기에 오후 2시에는 하산해야 한다고 안내했고 “알았다”는 답도 들었다.
그리고 바쁜 대피소 평시 업무를 처리한 뒤 예약자 입실이 완전히 끝난 오후 7시 30분, 1호실 예약자 한 명이 자기 자리에 다른 탐방객의 짐이 있다고 찾아와 항의했다. A씨의 것이었다. 안내방송으로 A씨를 찾았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매점 앞에 나타났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농락당한 느낌이었다.
“왜 하산하지 않았냐”고 묻자 “예약하려 했는데 못 했다. 돈 줄 테니 빈자리를 달라”고 한다. 기가 차 다른 비예약자 중 노약자도 모두 하산 조치했다고 하니 “과태료를 물더라도 자고 내일 백무동으로 가겠다”며 1호실로 가버린다.
실랑이가 이어지자 결국 다른 탐방객들까지 삼삼오오 모인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대응했으나 한계가 있어 팀장인 내가 나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과태료 용지에 직접 서명을 받았다. “본의 아니게 죄송하다”는 말과 더불어 예약제 취지를 한 번 더 고지했고, 마지막으로 빈 자리를 안내했다.

지리산 일출. 탐방객 A씨는 원하는 일출, 일몰 사진을 찍지 못하자 생떼를 부려 하루 더 묵으려 했다.
하산 조치가 생명의 위협?
한 달 반 정도 지난 후 함양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A씨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로 고소했다는 소식이었다. 하산이라는 조치가 생명의 위협이라는 억지 주장이었다.
책임자로서 관련 법조항 검토부터 예약제 고시문, 신문 보도, 지침, 운영 현황을 전부 파악한 뒤 수사과로 갔다. 수사팀장은 날 보자 “A씨가 유명한 사람이다. 미국 유학파 회계사로 정부에서 활동도 많이 했다”며 “무조건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빌라”고 했다. 이 말에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어이가 없었다.
당시 대피소 예약제는 10여 년 시행한 제도이므로 당연히 불기소로 형사소송이 끝났다. 조사 중 만난 A씨는 “예약제를 바꾸고 싶어서 소송을 건 것이지 조 팀장한테 악감정을 갖고 소송한 것이 아니다”란 말을 넌지시 건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달 후 그는 이사장과 나에게 2,200만 원의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걸었다. 이제 최소한의 미안함이나 유감은 사라졌다. 휴무날은 물론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기존 형사소송 자료에 덧붙여 A씨의 산행 유형, 유사 사례를 검토해 답변서를 작성해야 했다.
1심 재판이 열린 수원법원 성남지원으로 가는 길은 멀고 피곤했다. 판사는 “당신 부모라면 그렇게 했겠냐?”고 첫 마디를 뗐다. 나는 “법은 만인에 평등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판사는 A씨에겐 “당신 자식이 직원이었으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장터목대피소에서 백무동까지 하산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시간이 소요되는지, 당시 날씨에 따른 안전사고 위험 등을 검토해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대피소 레인저들은 하산을 안내할 때 탐방객 이름을 파악해 두고, 들머리 탐방지원센터와 상호 확인해 모든 등산객의 하산이 완료됐는지 꼬박꼬박 확인한다. 또한 혼자 온 등산객은 사고 방지를 위해 그룹을 지어주기도 한다.

불법행위 단속 현장. 원칙에 예외를 둘 경우 또 다른 위법을 낳는다.
A씨는 1심에서 패소하자 불복하고 또 소송을 걸었다. A씨가 얼핏 “미국 소송에선 100% 승소가 거의 없고 7:3, 8:2 식으로 과실 비율에 따라 보상금을 받게 된다”는 얘길 해준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2,200만 원 중 20%인 440만 원은 벌자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행히 2심 또한 100% 승소로 끝이 났고, 소송은 마무리됐다. 만감이 교차했다. 먼저 이겼다는 기쁨이나 안도감보다는 자괴감이 앞섰다.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렸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대피소 예약제에 대한 홍보와 더 적극적인 업무 수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요즘은 예약하지 않으면 대피소에서 절대 잘 수 없고 무조건 하산시킨다는 말이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있다. 이러한 입소문이 무리한 산행을 방지하고 불편한 상황도 억제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간혹 비예약자가 일부러 다른 봉우리에서 시간을 보내다 느지막이 대피소에 나타나 재워달라고 강한 어조로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린 직원 한 명을 붙여 동행 하산시킨다. 막상 2시간 가까이 하산을 마치고 나면 “직원들이 이렇게 고생하는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산이 확인되면 직원은 다시 대피소로 올라온다. 직원 입장에선 다른 업무도 많은데 그냥 빈 공간 하나 내어주고 재워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원칙에 예외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날씨★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나라 아일랜드의 최고 하이킹 트레일은? (0) | 2022.12.19 |
---|---|
[인천 썸&산] 백령도 여인 심청을 아시나요? (0) | 2022.12.17 |
[설악 등반 사고 분석] “규제 풀되 안전은 개인이 책임지도록 해야” (1) | 2022.12.15 |
[지리산 반달곰 안전할까?] 탐방로에서 반달곰 마주칠 확률 0.8%…사람 피해 없었지만 대물피해 514건 (0) | 2022.12.14 |
[초보기자의 초강수] 사유지 입산금지 현수막에 긴장 “...등산 하실 분은 다녀야죠” 전화에 휴우~ (0) | 2022.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