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룡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황매산 모산재 종주 산a행기
금성산 전망바위에서 본 합천호. 금성산을 오르면 하늘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합천호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코로나와 발목 부상으로 지난 겨울은 제대로 산행을 못 했다. 아쉬운 마음에 원 없이 걷고 싶어 ‘대병오악大幷五岳’ 종주를 계획했다. 대병오악은 경남 합천 대병면에 위치한 5개 산을 잇는 종주를 이르는 것으로, 의룡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황매산을 일컫는다.
황매산은 워낙 철쭉으로 유명해서 몇 번 가본 적 있지만, 나머지 산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평일에 3일간 휴가를 맞춰 절친한 후배인 김혜연(백패킹 전문점 마이기어 점장)과 함께 이른 아침 합천행 버스에 올랐다.
합천은 포근한 봄 날씨로 우리를 맞았다.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용문사 입구로 향했다. 기사님은 대병오악이 합천의 설악이라며, 차창 밖으로 이어진 능선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히터에 벌게진 볼을 식혀 주었다. 택시는 의룡산과 악견산 자락의 중간지점인 용문사 입구에 멈췄다.
대병오악이 시작되는 의룡산에 들어 산자락을 훑듯이 천천히 고도를 높인다. 바람 한 점 없는, 빽빽하게 나무로 봉쇄된 숲을 오르며 겹쳐 입은 옷을 벗느라 몇 번이나 멈춰서야 했다. 조금 지루하던 산행은 바위가 나타나면서 급변했다.
암릉에 허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물들이 미관상 아쉽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선 필요한 시설물이다.
띄엄띄엄 박혀 있는 계단, 길게 늘어진 체인과 고정 로프를 붙잡고 성큼성큼 올라섰다. 가파른 암릉 구간을 올라서자 정상에 가까워졌고, 그만큼 조망도 시원하게 드러난다. 점심도 거르고 산행을 시작했지만, 아직 산 하나를 오르기도 전에 오후 2시가 지나고 있었다.
암벽을 가르며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자 경치는 절정에 다다랐다. 정상의 암벽 끝에 섰다. 저 아래로 의룡산을 휘감아 도는 푸른 황강이 보였다. 절벽 아래에서 솟구치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이라 의룡산이라 붙여진 이름 그대로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의룡산에서 이어지는 악견산은 합천호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바위산이다. 산세가 험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합천의 숨은 명산이다. 1988년 낙동강 지류인 황강을 댐으로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 합천호는 면적이 2,595㎢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호수이다. 맑은 날이면 산행 내내 햇볕을 머금고 에메랄드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호수를 감상할 수 있다.
산 중턱에는 1439년(세종21)에 쌓은 악견산성(경남 기념물 218호) 터가 남아 있는데, 1594년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의병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악견산岳堅山은 감히 인간의 직립보행을 허락하지 않는 성난 암릉으로 솟아 있어, 어르고 달래듯 체인과 계단 구조물로 산길이 이어져 있다. 634m로 높이는 낮지만 이름에 걸맞게 ‘악’ 소리 나는 숨은 명산임에 틀림없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뒤엉켜 있는 정상부에 닿자 해는 기울었고, 기온은 급격히 떨어진다. 금세 땀이 식으면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옷을 껴입고, 바위를 하나하나 공략하기 시작했다. 바위에 난 홈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팔과 등 근육을 바짝 긴장한 채 하체를 웅크린 후, 다음 홀드를 탐색한다.
발끝에 힘을 모아 무릎을 쳐올리며 배낭 무게를 위쪽으로 내던지듯 상체를 들어 올려 재빨리 눈 여겨 둔 홀드를 잡아챘다. 겨우 바위 하나 올라서서 들고 있던 스틱을 아래로 던졌다. 손을 뻗어 바위를 잡고 몸과 배낭 무게를 지탱했다. 다리가 받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양팔과 등골이 저리도록 상체를 꼿꼿이 세워야 했다.
몇 개의 바위를 오르내리는 사이 다시 땀방울이 맺혔지만, 잠깐 멈추면 다시 싸늘해졌다. 겨우 바위 무더기를 빠져나오자 바위 장군들의 호위를 받는 어린 왕자처럼 악견산 정상석이 새초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첫날의 숙영지는 금성산으로 계획했지만, 예상보다 산길이 험난했던 탓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텐트를 치는 잠깐 사이 어두워졌고, 집에서 구워 온 고구마를 삼키고, 달걀 하나를 풀어 넣은 라면을 나눠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한밤중에 쌓인 눈은 모산재의 암릉을 미끄럽게 했고, 바위 하나를 내려설 때마다 로프에 의지해야 했다.
마을 어르신 도움으로 닿은 황매산
다음날 아침, 퉁퉁 부운 눈을 힘겹게 뜨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막 나온 해가 우거진 숲 속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남은 고구마를 데워 차 한 잔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곧바로 배낭을 싸서 산행을 시작했다. 하산길도 적잖이 고생스러웠지만, 절벽 끝에 서서 그림처럼 펼쳐진 합천호의 푸른 물결을 보고 있자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악견산에서 금성산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2.8㎞의 도로를 걸어야 했지만, 위치상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내일까지 대병오악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려면 오늘 적어도 2개 이상의 산을 끝내야 했고, 도로에서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직진하는 코스를 살폈다.
위성지도 어플로 위치를 보니, 제법 넓은 시냇물을 건너, 캠핑장을 가로지르고, 작은 언덕을 기어오른 뒤 600m만 진행하면 금성산 입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덜바위로 이뤄진 시냇물을 따라 상류로 20m 남짓 올라가니, 아슬아슬하게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시냇물을 건너 캠핑장을 지나 가시나무가 무성한 언덕을 벗어나니 금성산 들머리가 나왔다. 때로는 누군가의 블로그보다는 위성지도 어플이 유용할 때도 있다.
절약한 시간을 고이 쟁여 금성산을 올랐다. 북면에 위치한 등산로는 걷는 내내 음산하고 서늘했다. 조망도 없이 내내 된비알이 이어졌다. 의룡산과 악견산처럼 금성산도 정상 부근에 다다라서야 경치를 보여 줬다. 혀를 내두를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도대체 이 크고 많은 바위들이 어디서 왔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제 택시 기사가 말해 준 “설악산으로 모임을 가던 바위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대병면에 고루 주저앉았다”는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2박3일 종주의 마지막 하산길.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 발끝은 긴장됐지만, 이제 끝이라는 안도감에 기분이 좋았다.
설악산 울산바위 못지않은 축소된 절경을 자아내고 있으니, 기특한 노릇이다. 금성산 정상은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 있어, 어느 쪽을 마주하든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장단리로 하산하는 길은 길지 않았다. 중간에 임도가 있어 허굴산 입구까지 콜택시를 이용할까 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마을 쉼터에서 간단히 요기도 할 겸 걸어가기로 했다.
마을 회관에 앉아 간단히 빵과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허굴산 들머리인 청강사를 향해 걸었다. 마을은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 몇 대와 낯선 이를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뿐이었다. 마을 회관에서 청강사까지는 1.7㎞로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각이라, 허굴산을 2시간 만에 다녀와야 황매산을 여유 있게 갈 수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을 애처롭게 쳐다봤지만, 막상 가로막아 세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오랜만에 나선 종주산행이 마냥 좋기만 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청강사를 향하는 길, 마을 어르신과 마주쳤다. 마스크를 낀 채 멀리 서서 인사를 드렸다. 요즘 같은 시국에 왔다고 뭐라 할까봐 조심스러웠으나, 다행히 멀리서 찾아줘서 고맙다며 반겨 주셨다.
대병오악을 종주하고 있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동네 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허굴산을 다녀와서 황매산으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하니, 선뜻 황매산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산행이 끝날 때쯤 연락드리기로 했다.
허굴산 산행을 원점회귀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배낭을 내려두고 다녀오기로 했다. 바위 뒤에 배낭을 숨겨두고 단숨에 허굴산을 올랐다. 허굴산은 산 중턱의 굴속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 같아 올라가보면 부처님은 없고 허굴만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 있노라면 자유롭게 비행하는 새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멋대로 착각해 놓고, 이 멋진 산에 허풍쟁이 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니, 산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굴산은 억울산이 아닌가 싶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이 사라지니 날아갈 것 같았다. 전망바위에 올라서자 친숙한 악견산과 금성산이 반겨줬다. 지나온 4개 산은 군더더기 없이 짧고 멋진 산행이었다.
속도를 내어 청강사에 도착할 때쯤 동네 어르신이 와주셨다. 숨겨놨던 배낭을 차에 싣고 황매산으로 이동했다. 캠핑장에는 평일이라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녹초가 된 채 텐트를 치고, 남은 라면 2개에 누룽지를 넣어 끓인 후 야무지게 단백질로 뭉친 마지막 달걀 하나를 풀어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별도 달도 잊은 채.
의룡산의 우거진 숲을 벗어나면 절벽을 가르는 계단과 함께 탁 트인 전망을 만끽할 수 있다. 고프로 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눈물 핑 돌게 한 황룡사 스님 말씀
아직 해가 뜨기 전, 텐트 밖으로 나오자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새벽에 잠깐 눈 소식이 있었지만 이렇게 쌓일 줄은 몰랐다. 식사는 빵으로 대충 때우고, 해가 뜨기 전에 짐을 꾸렸다. 항상 가보고 싶었던 황매산 모산재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싶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도록 서둘러 걸었지만 해가 뜨고 나서야 모산재 돛대바위에 도착했다. 밤새 바람에 날려 눈이 거의 사라졌지만 암릉구간을 건널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겨우 안전지대에 안착해서야 모산재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 끝에 우뚝 솟은 돛대바위는 순풍을 타고 동쪽 태양을 향해 항해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를 둘러싼 병풍바위와 그 위를 뒤덮은 하얀 눈, 절벽을 붉게 물들인 강렬한 태양과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저 아래 세상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호수. 지금 이 순간이 대병오악 2박3일 종주의 화룡점정이었다.
이 멋지고 아름다운 산들을 왜 이제야 오른 건지 한탄스러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조심스럽게 고도를 낮췄다. 쌓인 눈에 가려진 바위틈으로 발이 빠지기 일쑤였지만,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
모산재 자락의 황룡사를 지나는데, 눈을 쓸고 계신 스님이 우리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 주셨다. 냄새 나는 이방인을 위해 다과를 내주신 스님께서는 고달픈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 눈물이 핑 돌 만큼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다.
직접 택시를 불러 주시며, “언제든 마음이 힘들면 다시 찾아오라”는 너그러운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시는 스님께서는 진정한 화룡점정이 아닐 수 없었다.
야영터는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열린 곳보다는, 피로해진 몸을 편안하게 누일 수 있는 아늑한 숲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산행정보
1일차 들머리 용문사 입구(해발 22m) - 의룡산 정상(481m) - 용문사 갈림길(340m) - 악견산 정상(634m) <총 6km 4시간 소요>
2일차 악견산 정상(634m) - 날머리(180m) - 대원사 쪽 들머리(253m) - 금성산 정상(591m) - 장단리마을(258m) - 허굴산 정상(682m) - 청강사(295m) <총 12㎞ 6시간 소요, 황매산 오토캠핑장(805m)까지 차량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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