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무시할 때 갈등, 배타성 시작돼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전히 자신만의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 총체성과 개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성이다.
모든 관계성의 본질과 핵심은 사랑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마음속에 사랑을 담아두고 표현하지 않으면 생명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생명원리에 의하면 사랑은 표현해야 하고, 그 표현 방법이 건전해야 한다.
가장 좋은 표현 방법은 상대방을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친절한 태도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두 존재 사이에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강력한 정서적 전파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이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정서적 허기(虛飢)를 느낀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생리적 메시지가 오면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다는 메시지가 오면 그만 먹는다.
이것은 정상적인 생리적 피드백(biofeedback)이다.
그러나 배고픔의 메시지가 아니라,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라는 연결성의 결핍으로 인한 정서적 공허감의
메시지로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메시지가 와도 강박적으로 음식을 먹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인간사회에서의 거의 모든 갈등은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 달라’라는 이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전파를 사람들이 알아채지도 못하고 또 실행하지도 않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부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 그리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심지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지 않은 결과로 물이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되고 이제는 빛마저 오염되기 시작했다.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강력한 표시 중에 하나는 배타성이다.
인종에서 배타성을 띄면 인종차별이 되고, 성에서 배타성을 띄면 성차별이 되고, 종교에서 배타성을 띄면 보수적
근본주의가 된다.
오늘 날, 한국에서 근본주의적 종교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유도 바로 배타성에 있다.
나는 전체성 안에서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나를 중심으로 하는 에고이즘(egoism)을 초월해서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종교에서도, 그리고 민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의 깊은 고요 속에서 진지하게 배타성을 바라보면, 배타성이 얼마나 저급하고 파괴적이고 반생명적(反生命的)인
태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배타성은 그 어느 곳에서나 반생명적(反生命的)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명상가가 말했다.
“영성적이고, 종교적이 되기 이전에 친절함을 먼저 배워라
(Before spiritual, and religious, learn the kin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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