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굴곡을 넘는 길, 백두대간 백운산

국립공원보다 조용하고, 국립공원만큼 아름다운 철쭉 천국
가야 할 산줄기보다 지나온 산줄기가 아름다웠다. 폭우를 만나고 어둠을 헤매고 강풍에 밀리고 우박을 맞으면서도 도망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보여 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40km 넘게 걷자 지나온 산줄기가 내 안 깊숙한 곳에서 말을 걸어왔다. 백두대간을 걷는 것은, 내 안의 굴곡을 넘는 일이었다.
3일에 나눠 41km를 가기로 했다. 발 빠른 이는 이틀에 가는 거리지만, 취재 산행임을 감안하면 3일도 빠듯했다. 블랙야크 고객 참가자는 단 한 명, 평일인데다 거리도 길고, 국립공원 같은 유명산도 아니니 신청자가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점심을 훌쩍 지난 시간 사치재에서 대구 등산인 박춘영·이재호씨를 만났다. 이재호씨는 같은 산악회원으로 박씨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의기투합해 함께 산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박용희 국장이 백두대간 현장답사를 위해 합류했으며, 백패커 민미정씨가 동행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먹구름과 달리 종주대의 분위기는 밝았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같음을 확인하자 일종의 안도감과 웃음이 흘렀다. 시작부터 와락 된비알이 덮쳐왔다. 쓰러진 나무까지 협공에 나섰지만 상승기류를 탄 일행을 막을 수 없었다. 야영하기 좋은 헬기장에 서자 시야가 트이며 가야 할 시리봉이 예상보다 큰 덩치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국적인 숲은 사스레나무의 땅, 흰 예복을 입은 나무들이 5월의 신부처럼 정갈하게 서있다. 임도 가득 잔디가 자리한 새맥이재를 지나자 곧장 시리봉 오름길.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쏟아지고 가스가 능선에 내려앉는다. 검은 실루엣으로 붐비는 소나무숲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빗방울은 땀을 식혀 주는 시원함에 가까웠다. 연분홍 철쭉은 미인의 눈물처럼 빗방울에 툭툭 떨어졌다. 맑지 않지만 서정적인 길이 ‘왜 이제 왔냐’고, 말을 걸어왔다.
781m봉을 지나자 매혹적인 진분홍 철쭉숲이 구름 속에서 불쑥 안겨온다. 땀과 빗물이 섞인 얼굴을 핑크빛 손길이 어루만진다. 꽃잎을 볼에 붙이고서야 지날 수 있는 풍성한 철쭉화원을 지나자, 문득 나타난 성벽. 아직 지킬 것이 남았다는 듯 촘촘한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지킨 아막산성이 1,000년 세월을 훌쩍 건너와 옛 사병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토해내고 싶은 걸, 이젠 다 끝났다며 꾹 참고 있다.
안개 속에서 성을 따라 직진했더니 뒤에서 일행이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이 길이 아니다. 아막산성의 사연을 몸은 따라가고 싶었나보다. 어둠이 내리고서야 복성이재에 닿아 축축한 몸을 뉘일 숙소로 이동한다.
다음날 시작은 맑았다. 순도 높은 파란 물감을 하늘에 풀어 놓은 쾌청한 날씨가 그렇게 뒤바뀔 줄은 몰랐다. 남원과 장수 경계인 복성이재의 아침, 변도탄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지금은 평범한 도로가 지나는 고개일 뿐. 임진왜란 때 변도탄이란 기인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이었다. 천문지리에 밝았던 그는 3년 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라며,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했으나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 하여 삭탈관직 당하였다. 홀로 전란에 대비하고자 북두칠성 중 가장 밝은 복성 별빛이 머문 곳에 터를 잡고 움막을 지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복성이재다.
분홍색 용의 출현! 감미로운 봉화산
소나무숲을 따라, 사유지 경계의 철망을 따라 올라서자 매봉 꼭대기다.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듯 분홍 물결이 굽이친다. 철쭉 축제가 열릴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봉화산의 시작이다. 철쭉 터널을 지나 봉화대가 있었다는 정상에 서자 일필휘지의 솜씨로 써 내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함양장수남원 일대가 한 방에 드러나고 분홍색 용이 능선을 따라 아리따운 향기를 뿜으며 꿈틀거린다. 자연 군락지답게 사람 키보다 큰 정통 산철쭉터널 속을 걷는 맛이 제법 운치 있다. 대간 종주만 아니라면 향락객마냥 돗자리 펴고 핑크빛 낙원에서 시시덕거리며 한나절 머물고 싶다.
철쭉동산을 지나도 산철쭉은 꾸준히 따라붙는다. 잊을 만하면 분홍색 축포를 펑펑 터뜨리며 대간꾼들을 응원한다. 분홍만 있으면 재미없지 않냐며 병꽃나무가 노란 팡파르까지 불어 댄다. 흰 조팝나무꽃도 손을 흔들어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큰 기대 없이 온 산행인데 달콤한 풍경의 연속이다.
870m봉엔 대간의 기운을 받고 싶었는지 누군가의 무덤 흔적이 있다. 무덤 잔디밭에서 아늑하게 풍경을 즐기고 싶지만, 바람이 심상찮다. 강풍을 버티지 못하고 최근에 쓰러진 나무들이 간간이 길을 막는다. 흰수염고래마냥 듬직하고 부드러운 바위절벽이 944m봉이다. 경상도 쪽으로 경치가 확 트였다. 밝은 초록빛 신록이 돋아나는 지릉의 흘러내림은 철쭉 못지않게 비경이다. 구름이 뭔가 더 감동을 주려는지 드라마틱한 모양을 그려내며 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광대치를 지나 월경산에 올라서자 구름이 짙어져 초저녁처럼 어둔 하늘이 되더니, “우르릉 쾅”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져 내린다. 비 예보는 없었는데, 지난달에도 그랬고 이번 대간종주는 우중산행이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강풍까지 합세해 옆에서 비가 때려대니 전망바위에라도 올라설라치면 무척 조심스럽다.
진짜 악천후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이젠 우박이 인정사정없이 쏟아진다. 숲이 짙은 곳에서 음식을 먹으며 재정비한다. 이번 여정의 최고봉인 백운산(1,278.6m)을 넘어야 한다. 진짜 산행은 지금부터다.
잣나무, 잎갈나무, 노각나무, 굴참나무, 물박달이 푹신한 오솔길을 내어주는 중재를 넘고 비슷한 이름의 중고개재를 지나자 휴식 같은 힐링산행도 끝이다. 끝판대장격의 가혹한 오르막이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효과음을 넣으며 종주대의 체력을 시험한다. 비바람까지 합세해 어렵다싶은데, 다들 베테랑 등산인답게 힘으로 난공불락의 오르막을 돌파한다.
백운산 정상에 닿자 축하한다는 듯 햇살이 쏟아진다. 모처럼 너른 정상에서 경치를 즐기며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매무새를 바로잡는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영취산을 향해 갈수록 연한 철쭉이 하이파이브 하자며 꽃봉우리를 들이밀고 있다. 미안하지만 향기로운 꽃길을 온 몸으로 맞으며 걷는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꽃잎, 즈려밟는 꽃잎들의 핑크빛 비명을 뒤로하고 떨어지는 해를 놓치지 않으려 근육에 가속력을 붙인다. 영취산 꼭대기에 닿자, 어둑하여 경치를 즐길 여유도 없이 무령고개로 하산한다. 하루 동안 봄여름가을겨울 날씨를 다 맞닥뜨린 탓에 녹초가 된 일행들이 숙소로 돌아간다.
비밀스런 철쭉 화원, 민령
선수 교체다. 이재호씨와 박용희 국장이 일정상 돌아가고 백패커 이재승씨가 합류했다. 최적의 날씨,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완벽한 하늘이 일정 마지막날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육십령까지 비교적 내리막이 많은 산길을 달리는 일만 남았으나, 무령고개에서 영취산 올라가는 짧은 된비알에 땀을 쫙 뺀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풍경, 떡갈나무 신록이 아기 손바닥처럼 귀엽게 돋았다. 온 산을 가득 메운 떡갈·신갈 신록,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산에 있다는 것이 안도감이 든다.
쌍봉이 솟은 덕운봉에 닿자 용틀임하는 소나무와 열린 경치가 조화롭다. 북으로 남덕유가 병풍을 그리고 남으로 지나온 백운산이 거대한 성채를 쌓아 놓았다. 저토록 큰 산을 넘어 왔다는 성취감이 총총거리며 따라온다. 가야 할 산줄기보다 지나온 산줄기가 아름다움을 몸으로 실감한다.
오늘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바람, 발로 딱 버티지 않으면 몸이 밀릴 정도로 막강한 봄바람이 산을 삼킬 듯 몰아친다. 전망바위에 올라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부실한 가지들은 떨어지고, 튼튼한 것들만 살아남는 숲의 대순환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조릿대를 지나 민령에 닿자 다시 천상화원이다. 이름 없는 산이라 생각했던 구간에서 마주친 비밀스런 철쭉 화원에 놀라, 배낭을 내려놓고 한동안 꽃에 둘러싸여 쉰다. 은방울꽃으로 빼곡한 산길을 올라서자 마지막 과제인 구시봉이다. 산꼭대기에 국기봉이 세 개나 있어 깃대봉이라고도 불리며, 산세가 ‘구시’를 닮았다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구시는 가축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인 구유의 사투리다.
정상 아래에 참샘이 있다. 풍부한 수량의 물맛 좋은 샘터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표지기 ‘준·희’로 유명한 부산 최남준(76)씨가 만들었다. 대간·정맥·기맥·지맥을 완주했으며 전국 능선의 적재적소에 있는 샘을 샘터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자신의 이름에서 ‘준’자를 따고 고인이 된 아내의 이름에서 ‘희’자를 따서 ‘준·희’라는 표지기를 만들어, 길찾기 어려운 곳에 매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생전에 아내와 함께했던 산행을 추억하기 위해 만든 표지기가 대간과 정맥에서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육십령으로 내려가는 길, 동쪽으로 명산이 줄지어 섰다. 황석산,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월봉산까지 100명산에 속한 영웅호걸들이 비범한 산세로 뻗어 있다. 기맥에 불과한 저 산줄기가 오히려 대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운 넘친다.
1.5km만 가면 육십령인데, 통증이 온다. 진부령까지 일시종주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산 앞에 한없이 작은 나를 마주한다. 내가 산을 읽는 줄 알았는데, 산이 나를 읽고 있었다.
사치재~육십령 구간 종주 가이드 tip
순수 대간길만 41km, 장거리인 만큼 구간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두 번에 나눠서 종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운산과 봉화산 사이의 중재(중치)가 거리상 중간 지점이며, 접근과 탈출도 비교적 수월하다. 대간 줄기에서 도로가 지나는 곳은 복성이재가 유일하며, 영취산은 도로가 지나는 무령고개에서 600m 거리로 가까워 구간을 나누는 기점으로 많이 이용된다. 전체적으로 길찾기는 쉽지만 아막산성에서 복성재로 내려설 때 주의해야 한다. 성을 따라난 좋은 길로 가지 말고 표지기가 여럿 붙은 왼쪽 길로 꺾어 내려가야 한다.
장수군 번암면의 방화동자연휴양림이 인근에서 가장 큰 숙소다.
교통
남원역에서 사치마을로 가는 버스가 하루 3회(7:00, 12:20, 18:05) 운행. 복성이재에서 800m 거리에 성암버스정류장이 있다. 남원역에서 800m 떨어진 남원여객자동차 정류소에서 하루 3회(6:20, 10:10, 14:25) 운행. 무령고개와 육십령은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장계콜택시(063-353-0005, 353-1588), 서상콜택시(055-963-0258, 963-0141).
mini interview
“명산 100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바뀌었어요”
박춘영 대구경북 블랙야크 팔공산악회
블랙야크 명산 100 도전 프로그램을 통해 등산에 입문했다. 여동생을 따라 시작했는데, 첫 산행이었던 치악산에서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칠’ 정도로 고생했으나 이때의 강렬한 기억이 오히려 등산에 깊이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블랙야크 명산 100 산행을 하면서 기쁜 날도 많았고, 힘든 날도 많았으나 이를 통해 등산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도전하기 전까지는 심신이 지친 상태였으나 100개의 명산을 다 올랐을 땐 자신감 넘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2년 전 100명산을 마친 후 100명산 다시타기와 백두대간 같은 새로운 블랙야크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 블랙야크 셰르파 신청을 했으며, 역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재호 대구경북 블랙야크 팔공산악회
산행 대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열혈 등산 마니아다. 대구 토박이인 그는 2006년 대구등산아카데미를 수료하며 산에 입문했다. 지방 출장을 가서도 그 지방의 산을 타는 습관이 있어 일주일에 3일 산행은 기본이다. 안내산악회 등 숱한 산악회를 거쳤으나 먹고 노는 분위기의 산악회에 염증을 느껴, 산행 중심의 산악회를 찾다가 지금의 ‘대구경북 블랙야크 팔공산악회’를 만나고부터 목표를 두고 오르는 도전 산행에 집중하고 있다.
골수 블랙야크 알파인클럽 예찬론자인 그는 “도전 프로그램을 통해 그냥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그 산에 대한 공부도 하게 되고, 다른 도전자에게 도움도 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가장 핵심은 “좌수 올리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빗대어 100명산을 ‘좌’로 표현한다. 또 “블랙야크 클린산행을 통해 자연보호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도 큰 보람”이라 설명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야크 장비로 풀장착한 그는 “도전 산행을 할 때는 블랙야크를 입어 주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박용희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국장
경희대산악부 81학번인 그는 미국 노스웨스트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 사무직으로 20년간 일하다 2006년 명퇴 후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도 했으나 한국 사람이 그리워 2011년 귀국해 다시 산을 찾았다.
클라이밍을 통해 건강한 몸으로 거듭난 그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학산악연맹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기간 동안 서울 서초동에 연맹의 실내암장을 오픈해 재정자립과 재학생 교육에 힘쓰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공헌을 했다. 기획력과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해 5월 등산트레킹지원센터 국장으로 발탁되어 등산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인 5대 트레일과 5대 명산둘레길을 국가숲길로 지정해, 더 편히 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백두대간 개방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출입금지 구간을 국립공원과 협의를 통해 예약제로 개선하겠다는 것. 대간 완주자가 범법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박용희 국장 특유의 세심함으로 풀어주길 기대해 본다.
★오늘의 날씨★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전산행|여름철 주의사항 무더운 날씨 탈수·식중독 주의… (0) | 2018.06.12 |
|---|---|
| [한국의 100大 명산] (0) | 2018.06.11 |
| 해외 트레킹 | 일본 산단쿄三段峽 (0) | 2018.06.07 |
| 불곡산·도락산ㅣ정상과 임꺽정봉 사이 2km 암릉과 악어바위 암릉 가장 인기 (0) | 2018.06.06 |
| 산림복합경영의 메카 ‘윤제림’ I 국내 최대 사유 ‘힐링 숲’으로 윤제림 오픈 (0) | 2018.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