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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

by 白馬 2018. 1. 31.

- 공식명칭 : 부석사 조사당 벽화 (浮石寺 祖師堂 壁畵)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물/불교회화/벽화/토벽화
- 수량/면적 : 6면
- 시대 : 고려시대
-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해체 분리된 벽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국보 다섯 점을 품은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전체적으로 오르막 지형에 자리 잡았다. 산 아래 일주문과 당간지주를 지나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까지 거대한 석축 몇 개를 허위단심 올라서서 국보 제17호 석등, 제18호 무량수전과 그 안에 모셔진 제45호 아미타부처님 등 국보 세 점을 만나다 보면 정신없이 살펴보며 놀라고 감탄하다가 이제는 다 본 줄 알고 그냥 하산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인내를 갖고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듯 절집조차 번거롭다는 느낌으로 지금까지의 복잡함이 사라지면서 차라리 절집은 이래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못해 오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의상대사를 모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이다. 이 조사당 건물이 또한 국보 제19호이고, 이제 소개하려는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는 이 조사당 내부 좌우에 그려져 있던 벽화였다. 지금은 벽째 따로 떼어내어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어서,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를 보려면 조사당이 아니라 성보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비록 국보 제46호인 내부벽화는 뜯겨 성보박물관에 별도로 보관중이지만, 그 벽화가 들어차 있던 조사당 건물 자체도 국보 제19호다. 국보탐방에서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데 조사당이나 무량수전이나 국보가 국보를 품고 있는 것이다. (국보 제19호 탐방기 :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7/2015021701806.html)

조사당은 조사(祖師)스님을 모신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들이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 등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부석사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발견된 묵서(墨書)에 따르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워졌다고 하니, 내부 벽화도 그때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정면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벽화 여섯 점
 -국보 제46호

조사당에서 벽화를 떼어낸 것은 해체 후 수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후 조사당 내부에는 비슷한 성격의 그림을 그려놓고, 벽째 떼어낸 진품 벽화 여섯 점은 하나하나 따로따로 액자에 넣어 보관했다.

나름대로 손질했겠지만, 완전 복원한 것은 아닌지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전체 윤곽은 물론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어려운 상태이며, 유리 액자 형태로 보관하다 보니 빛이 반사되고 번들거려서 질감이나 색채 식별이 쉽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 여섯 점. 여섯 개의 대형 액자 형식으로 보관 전시 중이다.
여섯 점의 벽화는 조사(祖師)스님인 의상을 모셔놓은 조사당 내부 벽화였으니 의상대사를 모시고 수호하는 그림이었을 터, 수호신 성격의 사천왕상 네 점과 범천과 제석천 두 점으로 식별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하단에 명칭을 써놓았다.
왼쪽부터 제석천,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범천 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며,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그 표정과 자태가 각양각색이다. 사악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침략자로부터 수호하는 역할인데 조사당에서는 의천을 극진히 지키고 있던 듯하다.
절집에 들어설 때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는 사천왕상.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인데, 부석사는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조사당 벽화로 사천왕상을 세웠다. 그래서 절 입구에 사천왕문이 없나?
사천왕상 외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이들은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여래를 수호하는 최고의 수호신이 되었다. 둘은 불법수호의 쌍벽을 이루며 제석천은 오른손에 불자(佛子) 왼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범천 역시 불자를 들고 있으나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벽화에서는 사천왕은 물론 범천과 제석천을 식별하기 어렵다. 참고로 석굴암에 새겨진 범천과 제석천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왼쪽이 대범천, 오른쪽이 제석천이다.

사대부 양반들이나 스님들이나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마음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뼈대 있는 양반들은 집안에 사당을 모셔 조상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한다. 특히, 중시조나 파조를 모심에 그 지극함이 실로 국법을 지킴과 다를 바가 없는데, 절집의 스님들도 자신들의 종조(宗祖)나 파조(派祖)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화엄종의 종찰(宗刹)인 부석사에서 선종의 산문에서 개산조를 섬기는 방식으로 조사 스님을 섬기고 모시는 것을 넘어 조사당 안의 벽면에 부처님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과 범천, 제석천의 벽화를 그려 붙인 것은 조사(祖師)에 대한 공경심이 부처님에 못지않은 것임을 나타내는 증표라 할 수 있다.

다만, 채색화로 남겨진 6점의 벽화 국보의 상태가 많이 손상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원본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모본(模本)이라도 하나 더 만들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 전시한다면 원작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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