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에 이른 산 눈 열려 바다를 펼치고… 처소로 돌아오는 석양 천지를 물들이네

우리는 시간의 존재다. 한 해를 갈무리할 즈음 시간은 더욱 빨라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의 물살에 실려 종종 다른 곳에 와 있곤 한다. 그 다른 곳에서 나를 보면, 내가 낯설다. 아무리 봐도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는 뜻이다.
무엇이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는가. 무엇을 찾다가 나는 나의 탈자脫者가 되어 있는가. 하지만 이 탈자라고 하는 관조자의 입장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새롭게 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 새로운 발견으로 나는 다시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노자는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즉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反者, 道之動 遠曰反’이라고 했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강물과 석양도 뒤돌아보는 그 순간이 가장 밝게 빛난다. 정리하면, 우리를 포섭하는 다양한 기제들로부터 갇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멀리 온 것이다.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탈주다. 갇힐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이 개척한 변방인 것이다. 변방을 내 세계의 중심으로 삼아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삶은 무엇일까. 새벽녘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걸음이 묻는다. 한마디로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끔 묻지 않을 수 없다. 질문이 없다면 인식과 자각도 없고, 방향성도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연등을 들고 선 향기로운 소나무들이 청정하다. 이 노송들은 어떻게 이리도 맑을까. 소나무는 바르다. 직지다. 곧바로 본다. 무엇이 들러붙지 않는다. 교리나 계행에 의지하기보다는 본성대로 행한다. 하늘을 향해, 사람을 향해 곧장 간다.
경내의 마당에 올라선다. 마당을 비질하는 소리, 어둠이 쓸리고 있다. 극락보전 법당에 든다. 사람이 배운 것 가운데 절만큼 지극한 것도 없다. 절은 필요나 욕구에 앞서는 마음의 발로다. 저절로 우러나야 절이다. ‘저’라는 겸손에서 다른 누군가인 ‘그’에게로, 또는 세상으로 마음을 건네는 행위다. 절은 나를 변화시킨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도 변하고 이웃도 변하고 사회와 세상도 변한다. 내가 있기 위해서 나는 나 이외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의 삶은 변질이 아니라 변화해야 한다.
우리에게 삶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고통, 상실과 손실도 있다. 탁하고 더러운 것도 있다. ‘반야심경’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래야만 편견에 붙들려 내 편 네 편, 참과 거짓 등으로 분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만물 가운데 따로 동떨어져 있는 것은 없다. 함께하는 것, 함께 가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눈뜸이며 서로가 척지지 않고 화합할 수 있을 것이다.
관음성지 나한도량 보문사에서 발견하는 마음의 빛
보문사에는 극락보전은 물론 와불전,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등 필히 가볼 데가 많다. 나한전은 그중의 하나다. 보문사는 나한도량이다. 나한전 조성 일화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어부들이 바다에 친 그물에 걸려 올라온 사람 형상의 돌덩이 22개’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단초다. 신라 진덕여왕 때의 일이라고 하니 참으로 역사가 깊다.
그밖에도 ‘깨어진 옥등잔’, ‘나한님과 팥죽’ 등은 우리를 거듭 일깨우며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밝히는 빛이다. 빛은 곧바로 우리에게 온다. 모서리와 칼날 같은 것이 장애가 된다면 회절하면서라도 도달된다. 빛은 그렇게 우리의 본성이 어둠에 묻히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간절함으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애불 가는 길
눈썹바위 마애불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불자들과 일반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밀물되어 오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까닭은 석모대교 개통으로 접근성이 좋아진 영향이 크지만, ‘한국33관음성지 제1호’라는 명성과 기도의 효험이 있다는 믿음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며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은 저 낙가산 정상까지 차오르고도 남을 성싶다.
연등이 양쪽 길가에 걸려 있고, 소원지가 빽빽하게 매달려 있다. 소망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가족의 건강, 합격, 승진, 부자, 결혼 등이다. 계단 입구에 써놓은 것처럼 이 길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이다. 얼굴 표정들은 진지하고 결연하고 순연하고 편안하고 불안하고 설레고, 등등 다양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내가 지었던, 혹은 앞으로 짓게 될 그 표정들일 것이다. 표정 속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역력히 읽힌다.
연이은 행렬은 끊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칠보시를 짓던 조식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애불 불전과 주변은 입추의 여지가 없다. 향불은 타오르고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연신 절을 올리며 정성을 다해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다.
아픈 곳을 만 번 문지르면 낫는다고 했다. 어떤 말도 거듭해 열 번 백 번을 넘어 만 번에 이르면 하나의 진언이 된다고 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觀世音’이 무엇일까. 직역하면, 세상의 소리를 본다는 뜻이다. 세상의 소리는 ‘중생’이라는 우리 모두의 소리다. 그 소리를 통해 우리 모두의 만상과 마음이 부처의 눈에는 명징하게 다 보일 것이다. ‘관세음’이라는 말을 되뇜으로써 우리 마음의 어딘가에 맺혀 있는 것들을 문질러 풀어 주는 일이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그 소리의 들음이 봄이며, 봄이 들음이다. 우리의 행동과 마음들이 숨겨질 곳은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에서 벌거벗은 존재다.
파도의 등줄기 낙가산 암릉과 금빛 낙조 장엄한 바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산으로 향한다. 숲은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고 있다. 가는 가을의 뒷모습 또한 올 때처럼 곱고 아름답다. 오는 겨울은 긴장과 설렘이라는 두 빛이 감돌고 있다.
해발 267m 낙가산 정상은 파도의 등줄기다. 준마지만 부리는 이 따로 있어 날뛰지 않는다. 매음리 염전,주문도, 볼음도, 멀리 마니산이 보인다. 여기에 오르면 보문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수관음성지가 된 그 이유가 충분히 헤아려진다. 드넓은 바다를 펼친 탁월한 전망, 강한 에너지가 흐르는 생명의 기운, 눈썹바위와 마애불 등이 그를 뒷받침한다. 낙가산은 낮다. 그러나 전망과 그 세계는 결코 낮지 않다.
낮은 산은 넓다. 넓어서 들판과 갯벌과 바다를 펼친다. 펼쳐서 사방으로 길을 연다.
생각해 보면, 낮은 산이 처음부터 낮은 것은 아니었다. 높이를 버리고 더 낮은 곳으로 갔다. 물의 마음으로 낮은 곳으로 갔다. 그 결과 지금의 낮은 산이 되었다. 물과 함께 흘러와 바다가 되었다.
풍경이 단순한 미적 체험으로만 끝난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풍경은 단편화되고 만다. 심적 체험, 영적 체험, 오성적 체험 등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풍경은 새로운 풍경을 낳는다. 현재의 인식과 의식을 뛰어넘어 풍경은 삶의 의미가 된다.
일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상봉산을 다녀오는 것도 좋고,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숲속에 고삐를 놓고,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자. 저 꽃이 무얼까? 서리에 거의 진 저 바위솔, 꽃 지고 잎 져도 저 꽃의 정신은 반으로 줄지 않고, 오히려 두 배, 세 배 더 늘어난다. 그 정점에서 꽃은 자신을 던진다. ‘삶, 그것은 잘 가름하기 위함’이라는 그 말을 대신한다. 한 알의 보리알이 그렇고, 꽃씨가 그렇듯이. 우리가 삶을 깊이 살아가는 방식이 그러할 것이다.
만조 때가 되어 바닷물이 한껏 차올랐다. 서서히 시작된 일몰,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해가 지아비처럼 돌아오고 있다. 기다리고 있던 지어미가 포옹하듯 안아주고 있다. 순간, 하늘과 바다가 장엄하게 물들고 있다. 돌아보면, 올 한 해도 열심히 살았다. 네가 있어 참 고맙고 고맙다. 모두 다 네 덕이다. 이제 처소의 문이 닫히고 있다.
내가 세상 어디에 있을지라도 나는 언제나 나를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다. 여전히 너는 사랑이고, 나는 희망이다. 이 얼마나 다행이냐, 감사냐. ‘파도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임을 알 때 파도는 죽지 않고 영생한다.’ 저 바다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석양과 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야
노곤해져 돌아오는 지아비를
꼭 안아주는 저 바다
고요한 기쁨 물결로 밀려와
새들의 발목까지 잠기고
낙가산 마애불 그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지어미와 입 맞추는 붉은 해
순간, 각시의 홍조로 번지는
하늘과 바다, 바다와 하늘
어느 만남이 저보다 더 아름답더냐
어느 마음이 저보다 더 곱더냐
눈물보다 더 깊어라
저 순일하고도 장엄한 사랑
★오늘의 날씨★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강선 개통 특집 코스가이드 | 진부역 계방산 (0) | 2017.12.27 |
|---|---|
| 새 걷기길 낙동강 강바람길 (0) | 2017.12.26 |
| 계절의 맛+멋 코스가이드 | 보성 꼬막+순천 금전산 (0) | 2017.12.23 |
| 계절의 맛+멋 코스가이드 | 포항 과메기+비학산 (0) | 2017.12.22 |
| 계절의 맛+멋 코스가이드 | 영덕·울진 대게 + 울진·삼척 응봉산 (0) | 2017.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