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붉은 함성 빽빽이 땅을 덮고 도솔천 하늘 아래 사람의 길 열렸네

불안과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명체는 하나같이 집을 짓고 산다. 사람은 물론 곤충과 동물도 다르지 않다. 집은 터와 기초를 필요로 한다. 터가 제대로 닦여 있지 않고는 존재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길에 놓인 디딤돌도 잘못 놓이게 되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딛는 순간 흔들려 다치기 쉽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그 불안한 흔들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드러내면 약점이 된다. 현대사회의 경쟁 속에서 도태되기 쉬운 속성상 대부분 감추고 산다. 감추고, 흔들리며 살아야 하기에 고독하고 힘든 것이 아닐까. 그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무얼까. 경험은 여행을 통해서 지혜로 축적된다. 하나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터를 닦아야 한다. 그 터를 닦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안착할 집을 짓기 위한 길 위의 여행이 아닐까.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안개를 밀어내며 수없이 일어선 민중들, 동학도의 물결이 땅을 덮었다. 절정에서 피를 쏟듯 쓰러지는 꽃무릇들은 처연하고 비장하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은 인륜人倫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 부자는 인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연후에야 이에 집과 나라가 무강의 복이 미칠 수 있는 것이다. ……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가 망하는도다. ……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
천마봉은 도솔암과 마애불, 투구봉까지 한눈에 보는 선운산의 백미다.
선운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음의 석등에 천년 인연의 등불이 오른다.
만세루 앞 목백일홍이 꽃을 피우며 뭉게뭉게 선운禪雲을 일으키고 있다.
<전봉준전기>에 나오는 ‘창의문倡義文’ 내용의 일부다. 비록 제세濟世의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모든 불의와 부패와 탐학에 맞서 세상을 혁파하려 했던 피 끓는 소리가 뜨겁다.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이 평안해야 세상이 평화롭다. 가렴도 없고, 주구도 없는 세상, 반목과 대립과 질시가 사라지고 궁핍과 억압이 없는 세상, 사람과 사람이 모두 존귀하고 ‘갑질’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 미륵의 세상이다.
꽃무릇은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주로 사찰 주변에 많이 분포한다. 과거에는 단청과 탱화의 좀이나 충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심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우리 민족사의 의를 지키는 정신의 방부제로 기능함을 꽃무릇이 우회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꽃무릇 군락지를 지나 도솔천을 따라 걷는다. 단풍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참나무 등 이 숲의 터널을 이루고 있다. 하상이 검게 보인다. ‘타닌’ 성분 때문이다. 물에 비친 나무들의 모습이 맑고 아름답다. 그 스스로 명경이 되는 도솔천의 물은 어디서 흘러오는 것일까.
천년 인연의 선운사와 도솔암 마애불과 도솔천 내원궁
선운사에 들른다. 목백일홍이 피워 올리는 끝물의 꽃구름이 선운이다. 만세루와 보물 제290호인 대웅보전, 그리고 육층석탑은 언제 보아도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화엄의 세계로 이끈다. 천년의 인연을 맺어줄 그런 곳이다. 천왕문을 나서 도솔암으로 향한다.
도솔천 내원궁으로 오르는 계단 바닥에 빛이 만든 글자가 또렷하다.
도솔천 내원궁 소나무의 일지일심이 뭘까? 한 마음이 만사의 기틀이다.
도솔천을 따라 여기저기 쌓아올린 돌탑들, 돌탑은 아랫돌의 의미를 안다. 그렇기에 윗돌은 아랫돌에게 자신을 맞출 줄 안다. 그것이 돌탑의 미덕이다. 검단정黔丹亭을 지난다.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첫 단풍이다. 붉은 것은 뜨겁고 검은 것은 깊다. 그것이 무엇일까. 마그마인가. 민중 속에 깊이 내재된 세상에 대한 의義인가. 역사를 바르게 추동시키는 그 도도한 것이 있어 정의는 양심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리라. 하늘은 우리가 눈감아 버리고 외면한 것들을 돌보며 우리를 거듭 깨우치지 않는가.
진흥굴에 닿는다. 설화는 그 시대와 인간을 엿볼 수 있다. 진흥왕은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법운자’라는 이름의 승려가 되었다. 그때 수도했던 암굴을 ‘진흥굴’로 부르게 되었다는 <고창군지>의 기록이 있다. 진흥왕의 왕비 별호가 ‘도솔兜率’, 공주의 이름이 ‘중애重愛’다.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건립했다는 선운사의 사찰 연기설이 있다.
그 외에 검단선사에 대한 설화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도적들을 교화시켜 소금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생업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보은염報恩鹽의 유래다. 매년 심원면 해안 사등마을에서 선운사까지 소금을 옮기는 ‘보은염 이운’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선운사는 꽃무릇, 보은염, 미륵불 등 모두 부패를 방지하는 것들과 연관이 깊다.
도솔천兜率天이 가까워진 것일까. 진흥굴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이 이채롭다.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장사송長沙松을 본다. 천연기념물 제354호다. 커다란 솔우산이다. 하나의 줄기에서 8개의 가지가 잘 뻗었다. 600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청청하다.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 하계를 굽어보고 있다.
층층나무 열매 익으며 성큼 온 이 땅의 san october 2017 가을에 하늘이 소풍 나오고 있다.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 앞에 선다. 거대한 마애불은 온갖 상념들과 인식들을 한꺼번에 무지른다. 들쭉날쭉하고 울퉁불퉁한 우리의 내면을 일시에 평정한다. 마음이란 바로 이런 무화無化의 시간 속에서 닦여지는 것인가. 미소인 듯 미소가 아닌 듯한 오묘한 얼굴이다. 분명한 것은 방금 무엇을 말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또는 이제 막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모양이다. 이것과 저것, 말과 침묵, 미소와 관조 사이다. 명치끝에는 검단선사가 비결을 넣어두었다는 감실이 보인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손화중을 중심으로 한 동학도들은 비결을 손에 넣게 된다.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그 소문이 전해지며 동학교도의 수가 급격하게 불어난다. 급기야 갑오년(1894) 정월 열흘 동진강 새벽의 찬바람을 가르고 전봉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고부 기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는 미륵신앙은 곧 민간신앙이다.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중생이 도처에 넘치고 우리의 삶이 절박해지면 미륵은 56억 7,000만 년을 하루아침에 앞당겨 다시 현세로 내려올 것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내원궁에 이른다. 미륵보살이 있는 곳이 도솔천 내원궁이다. 하지만 이곳 ‘상도솔암’이라고도 부르는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하생한 바 그 부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암자 앞 붉은 장송 한 그루가 가지를 길게 뻗어 지붕을 덮었다. 일지일심一支一心의 가지加持(부처의 가호를 받아 중생이 부처와 하나가 되는 경지)다. 천마봉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천마봉에서 보는 선운산 환상의 명품 산수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다. 마애불을 뒤로하고 능선으로 향한다. 꽃무릇은 이 산 도처에 있다. 한적한 곳에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미인의 속눈썹이 저럴까. 붉은 긴 꽃술이 예술이다. 360도 돌아가며 둥글게 포진해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랑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인 모난 사랑을 한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둥근 원융의 사랑, 원애圓愛는 어떤 것일까.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없다면 그것은 탐욕이고 이기다.
도솔천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는 듯한 발걸음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고운 아기단풍 그 잎마다 별들의 미소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바위 협곡을 지나면 용문굴이다. 커다란 자연 석굴이다. ‘대장금’ 촬영지였다는 입간판이 있다. 용문굴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바위에 올라 조망하는 협곡의 기암 풍경이 독특하다. 이어 낙조대에 도착한다. 노란 색종이를 오려서 붙인 듯한 볏논 너머 멀리 칠산七山 앞바다가 아른거린다.
건너편 왼쪽으로 병풍바위에 긴 철제 계단이 놓였다. 지근거리에 있는 천마봉(284m)에 닿는다. 도솔암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칠송대七松臺 암벽의 마애불도 보이고, 도솔천 내원궁이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내원궁을 중심으로 뒤쪽과 양옆으로 펼쳐진 기암괴석의 장엄한 미륵 세상이 경탄과 신비감을 더한다.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도솔천에 상서로운 선운禪雲이 일지 않는다면 그것도 기이한 일일 것이다.
하산 길에 한 번 더 도솔암에 들른다. 낯이 익은 반가운 스님께 한 말씀 청한다. ‘터를 닦고자 합니다. 삽이든 곡괭이든 도구가 필요합니다. 뭐든 하나 주시지요!’
“일념一念입니다. 한 가지만 생각하세요.”
숲을 걸으며 향훈 깊은 그 말씀을 되새김질한다. 문득 한 음성이 들린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군자란 원래가 궁한 법이라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네.” 공자의 이 한마디에 춤을 추었던 생면부지의 자로가 떠오른다.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 말씀이 만월이다. 일념이 터다. 꽃무릇들이 춤추며 세상 환히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
1 붉은 꽃무릇이 꿈꾸는 미륵의 세상은 부패 없는 평등한 세상일 것이다. 2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물봉선의 그 꽃말을 알아 벌도 오지 않는 것일까. 3 다 익어 가슴 터진 붉은 홍시, 박인로의 조홍시가가 생각나 눈물 괸다.
꽃무릇
오, 저 억조창생의
붉은 꽃 온몸이 불이다
목숨의 심지
가열하게 태우는 불꽃
하늘까지 타올라
번지는 장엄한 노을
꽃이 하늘이다
하늘이 사람이다
춤추며 세상 다시
일으켜 세우는 꽃들
교통
서울→고창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www.easyticket.co.kr, 호남고속 02-6282-1180)에서 20~50분 간격(07:00~19:00) 운행. 요금 13,500원.
광주→선운사
종합버스터미널(ARS 062-360-8114)에서 1일 8회(08:50~16:20) 운행. 요금 6,100원.
정읍→선운산
공용버스터미널(063-535-6011)에서 1일 4회(07:100, 11:00, 14:50, 15:00) 운행, 요금 3,100원). 또는 10~20분 간격(06:20~21:00)으로 운행하는 고창행 버스(2,700원)를 이용, 고창에서 선운사행으로 갈아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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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고창
시외버스터미널(063-272-0109)에서 1일 24회(06:05~20:30) 운행. 요금 5,300원.
고창→선운사
시외버스터미널(063-563-3388)에서 1일 8회 운행(10:00, 11:00, 12:00, 13:25, 14:30, 15:30, 16:30, 17:20)하는 직행버스(요금 1,800원)나, 30분 간격(06:20~20:20)으로 운행하는 대한여객 농어촌버스 이용.
드라이브코스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나들목에서 나와 좌회전, 22번 국도로 선운사 주차장까지 간다(13.5km). 또는 호남고속도로 정읍 나들목에서 나와 좌회전, 22번 국도를 타고 흥덕을 거쳐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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