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선생도 세 번이나 찾은 절경 계곡… 폭포, 소에 발 담그면 “더위여! 안녕~”

지리산둘레길 8코스와 백운동계곡 잇는 여름 산행지
지구온난화로 갈수록 여름이 더워지고 어디가 잘못됐는지 비까지 줄어들어 여름 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크지 않은 땅덩이가 장마가 와도 비 구경을 못 하는 곳까지 생기는 마당에 물줄기가 제대로 흐르는 산 계곡을 만나면 조상의 음덕 덕분 같아 숙연해지기도 하지요. 그런 계곡이 셀 수 없이 많은 곳, 우리나라에서 가장 든든한 산 지리산으로 피서 산행을 떠납니다. 너무 더워 산 중심까진 힘들고요. 둘레길 8코스를 따르다 지리산 계곡 중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백운동계곡으로 빠져 내려오는 코스로요.
백운동계곡은 진안, 성주, 설악산, 인왕산, 수락산 등지에도 있지만 오늘 소개하는 곳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둘레길 제8코스 산청군 단석면 탑동~덕산 13.7km 중 운리와 미금담길 중간 6.2km를 타면 만나는 계곡으로 길이 2.1km에 크고 작은 20여 개의 소와 폭포들이 들어서서 절경을 연출하는 숨은 명소로, 특히 조선 전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즐겨 찾았던 역사 유적지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산행은 서울의 50대 산친구산악회 회원 40여 명과 함께합니다. 서울 출발이 늦어져 산행 들머리인 운리마을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 정오 가까이. 서둘러 복장을 챙기고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합니다. 논둑길로 접어드니 천변에 심은 감나무에 주먹만 한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저 채로 과육을 익히고, 당도를 높여 표면색만 바꾸면 황금 알을 매단 돈나무가 되겠지요. 이제 불과 달포 남짓한 그때까지 ‘우순풍조雨順風調’하기 바랍니다.
옛날 같으면 이 마을 서낭당일 것같은 당산나무가 콘크리트포장에 외로운 섬이 돼 버렸습니다. 요즘 산악회들 보면 남자 회장에 여자 총무, 선두를 비롯 중간, 후미 남자 대장 3명이 주축이고요. 이들 중 한두 명은 카메라를 들고 다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원들 중 두어 명이 괜찮은 카메라로 폼을 잡으며 등산 전반과 회원들의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산악회 인터넷 카페에 올리거나 아주 친절한 분은 사진으로 뽑아서 다음 산행 때 전해주기도 하죠. 그런 분들 만나면 제가 좀 신경 쓰입니다. 라이벌 의식을 느낄까 봐서요.
농로인지 마을 진입로인지 모를 길을 따라 걸으니 이번엔 밤나무들이 우거진 굽이를 돕니다. 길가에는 으아리인지 사위질빵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들꽃이 피어 있고, 한 농가 담장 아래는 아주까리 열매가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사방시설을 한 계곡에는 커다란 누리장나무가 긴 수술을 내단 꽃들을 잔뜩 피운 채 우리를 지켜보고요. 근데 이 길 조금 오르다 보니 임도로 변하는군요. 콘크리트포장길이라 반사열이 보통이 아닙니다. 흙길이면 좀 덜 더울까요? 어떤 여자 대원은 양산까지 준비해 와 펼쳐 들고 걷습니다.
정오를 훨씬 지난 시간이라 여기서부터 점심은 각자 해결한다는 선두대장의 전언을 듣습니다. 임도 치고는 꽤 가파른 구간을 한 번 더 오르고 등산로가 숲 속으로 잠입하는 부근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듭니다. 이번 산행을 마지막으로 산행대장 직을 그만 두는 이 아래 동네 출신의 지인을 따라온 산행이라 점심을 함께 드는데, 서너 커플이 동석해 저마다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내놓는데 푸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중 최고는 막걸리고요.
등산로는 임도를 벗어나면서 한 번 더 급격히 가팔랐다 평온을 되찾습니다.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 웅석봉(1,099m) 남단 산자락 허리를 돌아가는 산길로 접어든 겁니다.
길 오른편에 ‘참나무 군락지’란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리산둘레길 22길 중 가장 참나무들이 많이 자라는 구간이라고요. 그리고 나무나 풀이름 앞에 ‘참’ 자와 ‘개’ 자가 붙는 이유로 ‘참’은 진짜, ‘개’는 가짜를 뜻한다는 부언까지요. 언뜻 어디선가 읽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토리나무이기도 한 참나무는 모두 6종류이고 그 이름이 상수리, 굴참, 신갈, 떡갈, 갈참, 졸참나무라는 거요. 그리고 그 이름의 연원까지.
먼저 상수리는 임진왜란 때 몽진蒙塵 중이던 선조가 수라상에 올라온 도토리묵을 맛보고는 좋아서 한양으로 돌아와서도 즐겨 찾자 이 도토리가 수라상에 오른다 하여 상수라上水刺라 부르다 상수리로 불리게 됐고, 굴참은 나무껍질에 세로로 깊게 골이 파여 있어서, 갈참은 잎이 가을 늦게까지 나무에 달려 있어서 ‘가을 참나무’란 뜻이고, 신갈은 옛날 나무꾼이 짚신 바닥이 해지면 그 잎을 짚신 바닥에 깔아 신었다 해서, 떡갈은 넓은 잎으로 떡을 싸두면 오래 간다고, 졸참은 참나무 종류 중에서 잎이 가장 작아 졸병 참나무란 뜻이라는 거요.
이 깊은 숲 속에 샛노란 들꽃이 시선을 잡아챕니다. 원추리 꽃입니다. 함께 점심을 들고 얘길 나누다 보니 친해진 여자 대원들이 꽃의 향을 맡으면서 손짓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럴 때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높아지지요. 이왕이면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예쁘게 취하라고 요청하며 잘 따라주는 모습에서 천상 여자인 것도 재확인하고요.
길 오른편으로 작은 계곡 하나가 나타납니다. 3m 남짓한 폭포에 가늘게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데 그래도 목을 축이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남자 대원들은 아예 웃통을 벗고 땀을 씻기까지 합니다.
소나무, 참나무, 바위들이 번갈아 나타나며 서서히 고도를 높이는 호젓한 숲길 진행 방향 쪽에서 사람들이 즐거울 때 내지르는 비명들이 점점 크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백운동계곡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500여 m를 더 걸어가서야 계곡에 들어섭니다. 나무다리를 건너면 미근담봉으로 가는 길이고 그 사이를 세로 질러 흐르는 물길이 백운동계곡입니다. 계곡 건너 미근담봉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재미있는 표정을 한 장승 일곱이 서 있습니다.
역시나 계곡 크기에 비해 수량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워낙 가문 날들이다 보니까요. 그래도 먼저 온 대원들은 벌써 물놀이삼매 중입니다. 제법 그럴싸한 소마다 옹기종기 모여서 발을 담그기도 하고 물장구를 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손을 들고 선 채로 물속으로 엎어지기도 합니다. 참 오래간만에 보는 풍경. 저도 얼른 배낭을 벗고 발을 계곡 물에 담급니다. 수량이 풍부하지 않아선지 물도 생각보다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나마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요! 작은 폭포에서 좋아라 물을 맞는 한 여성대원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아담한 폭포에 물줄기 속 자세도 좋아 월간山 이번 호 표지로 삼았으면 합니다.
물가 응달에 들꽃 은꿩의다리가 소복하게 피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데 제 눈에 그게 보입니다. 들꽃 입문 10년째. 실력은 안 늘고 눈치만 늘어서 어떤 때는 저 숲 속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그럴 땐 제가 놀라고 말지요. 정말 가녀린 이 꽃 참 청초하고 곱습니다. 40여 명의 방문객 중 저만이 오롯이 느끼는 행복이랄까요. 그런 심미안 하나 더 가진 게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백운동계곡은 저 아래 백운마을에서 올라오면 여기까지, 반대로 내려가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물론 물이 더 많이 흐를 경우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산세나 계곡의 생김 그리고 500m 남짓한 해발 높이로 가늠해 봐선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와 담, 폭포 연이어지는 비경의 계곡
이제부터는 하산인데 어떤 비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큽니다. 5분 정도 내려가니 10m 남짓한 와폭이 나오는데 한 쌍의 남녀가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옥빛이 감도는 작은 소의 물이 단지 두 사람에게만 쓰이고 있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5분쯤 더 내려오니 2~3m짜리 직탕 폭포들이 연이어 눈길을 빼앗습니다. 근데 여긴 또 텅텅 비어 있네요. 이런 줄도 모르고 위에서 노닥거린 우리가 머쓱해집니다. 그래도 좀더 물 맑은 상류에서 놀았다는 걸로 자위해야겠죠. 계곡 오른쪽으로 난 내림 길과 계곡 사이에는 두터운 숲이 형성돼 있어서 이 숲이 뚫리지 않으면 계곡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소개하는 폭포도 그런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다만 좋은 곳엔 반드시 뚫려 있기 마련이란 개연성은 맞겠지요.
근데 저렇게 잘생긴 폭포와 소들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다지소, 청의소, 아함소, 장군소를 비롯, 용문폭포, 백운폭포, 5담폭포, 15담폭포, 탈속폭포, 칠성폭포, 수왕성폭포 등 수많은 이름들이 나오는데 어느 게 그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중 다지소多智沼는 이 소에서 목욕을 하면 지혜로워지고, 청의소聽義沼는 원래 경상도 사투리로 ‘챙이’ 즉 ‘키’를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인데 뒤에 억지로 뜻을 부여해 만든 거라나요. 아무튼 이 모두는 말년을 백운동 아랫동네 덕산에 살며 이 계곡을 즐겨 찾았던 초야의 대학자 소식 남명 선생을 기려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남명 선생이 이 백운동계곡을 유람하며 지었다는 ‘유백운동遊白雲洞’이란 시 한 수 읊고 가겠습니다.
‘천하영웅소가수天下英雄所可羞/ 일생근력재봉류一生筋力在封留/ 청산무한춘풍면靑山無限春風面/ 서벌동정정미수西伐東征定未收’
풀이하면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장량이) 일생 공적을 유땅에 봉한 것이라네/ 청산은 무한하고 봄바람은 부는데/ 서북동정으로 어찌 평정을 얻을 것인가 - 미미소 님 블로그
어떻습니까? 남명 선생의 호연지기가 느껴지지요. 근데 저는 왜 갑자기 선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가 불쑥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계곡이 열리면서 또 길다란 와폭을 보여 줍니다. 수영복 차림의 젊은이들이 보란 듯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군요. 이번에는 폭포는 안 보이고 꽤 큰 소가 하나 눈에 듭니다. 좁은 길로 내려서니 안으로 깊게 패이고 소의 시퍼런 물이 냉기를 풍깁니다. 상단에 10m가량 와폭으로 흐르다 5m가량 낙차로 그대로 소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큽니다. 아마도 백운폭포가 아닌가 싶은데 확인할 길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어서 2단폭포, 와폭, 셀 수 없이 많은 폭포들이 숲 속을 들락거리며 펼쳐집니다. 저 속에 5담폭포, 15담폭포가 다 흐르고 있겠지요.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등천대登天臺며,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는 또 어디에 있는 건지…. ‘남명 조식의 발자취, 백운동’이라고 크게 쓴 안내판이 나오는 걸로 보아 이 부근 같은데 하산하는 대열을 이탈하기가 뭣해서 그냥 내려섭니다.
터벅터벅 조금 더 내려오니 계곡 쪽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큰 물놀이 터가 아닐까 싶은데요.
몇 걸음 더 내려오니 와우! 이런 곳이 다 있네요. 초대형 자연 풀장입니다. 3~6m 높이 암반 양끝에 크고 작은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폭포들과 50여 평은 족히 될 것 같은 큰 소에 어른 아이 열댓 명이 섞여 물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은 그 암반 위에서 작은 폭포 물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물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스릴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림 참 좋습니다. 아마도 아함소 같은데 확인 불가입니다.
가족과 함께 느긋하게 이런 곳으로 피서를 온 분들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무엇 때문인지 이렇게 혼자서 카메라 들고 다니는 제가 돼버렸는지…. 분명 다지소를 지나왔을 계곡 물에 손을 담그며 ‘나도 좀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도 저 같지 않길 바라고요. 이 시원한 산청 백운동계곡 경치들을 보며 올 여름 남은 더위 시원하게 잘 넘기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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