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盛夏의 하늘길’, 그곳에 화려하게 핀 바위꽃들

오픈 첫날 전국 바위꾼들 몰려든 천화대 암릉산행
설악산 천화대天花臺는 이름 그대로 천상의 바위꽃이다. 공룡릉에서 북동쪽으로 갈래 쳐 범봉을 우뚝 솟구치고, 이어 희야봉과 왕관봉을 일으켜 세우며 천불동계곡을 향해 뻗어내린 천화대능선은 봉우리 하나하나 꽃봉오리요, 암릉은 그 꽃을 하나하나 연결해 준 꽃가지다. 수없이 많이 피어난 바위꽃의 꽃받침이요 꽃길과 하늘을 이어주는 가교다. 우리는 그 꽃가교에 수를 놓았다.
서둘렀다. 모레 새벽 장맛비 소식에 밤늦게 출발, 이날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질주해 설악동 C지구에 도착한 시각이 7월 1일 새벽 2시, 일행 다섯 명은 텅 빈 거리의 식당 앞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서 라면 하나씩 끓여 먹고 곧바로 산행에 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에 덮인 소공원을 가로지른 다음 숲길 따라 쌍천을 거슬러 비선대로 향했다. 숲길에 우리만 있으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우리와 바위꾼 두어 팀 말고도 대청봉이나 봉정암, 마등령을 목표 삼은 도보 산객 서너 팀이 조용히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면서 산 안으로 들어섰다.
장군봉과 적벽이 눈에 꽉 차고, 솔바람 솔솔 불어대고
비선대를 지나 토막골 초입에서 차가운 계곡물을 물통에 채우고 천불동을 거슬러 오르다가 설악골 들머리에서 희미한 지능선으로 접어든다. 올 들어 개방 첫날인 천화대의 인기는 역시 대단했다. 전국 각지 바위꾼들이 모여 들었다. 오전 5시,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즈음 바위 밑에서 장비를 챙기는 사이 한 팀 한 팀 올라오더니 곧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도 앞 팀 도움으로 로프를 깔고 마이크로 트렉션에 확보한 채 미끄러운 바위골을 마음 편히 오른다. 이렇게 천화대 등반이 시작되고, 사진기자 양수열, 그리고 ‘빨간 머리 린’, 황원선, 양효용 순으로 바위를 오른다. 오늘의 게스트는 빨간 머리의 아가씨 린 포터Lynn Porter·24. 미국 시카고 태생인 린은 인디아나주립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가을부터 수원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지내고 있다. 영어야 모국어니까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말도 능숙하니 반갑다. 린은 가냘픈 몸매지만 요가와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다져진 몸이라 습기에 미끄러워 애를 먹는 침니 구간을 가볍게 올라선다.
“오우~, 판타스틱~, 원더풀~”
첫 피치에 올라서자 설악골과 천불동 일원의 기암괴봉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에 린은 감탄사와 함께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다. “하산할 때까지 밑에서 기다리겠다”며 버티다가 일행의 간청에 마지못해 등반에 나선 황원선 형도 얼굴이 활짝 펼쳐진다. 바로 이 풍광이 우리를 밤잠 안 자고 달려오고 또 서둘러 산 안으로 들어서게 한 것이리라.
숲을 벗어나 얼기설기 기대고 있는 바윗덩이를 올라서자 첫 번째 암봉. 10여 m 자일 하강 후 짤막한 암릉을 올려치고 숲을 벗어나자 부산 팀이 보인다. 벌써 한참 앞장서 있다. 승용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왔다는 부산 산꾼들의 오늘 목표는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비박을 각오하고 묵직한 짐을 멘 채 등반에 나선 저들은 범봉까지 갈 각오라고 했다.
이제 사선크랙으로 알려진 제7봉으로 이어지는 천화대 암릉이 기운차게 뻗어나가고, 왼쪽으로 피너클 연봉이 절경을 이룬 칠형제봉과 천불동계곡, 화채릉~청봉 능선, 그리고 오른쪽으로 설악골과 공룡릉~마등령~장군봉 능선이 한눈에 꽉 찬다. 우리는 이제 진짜 설악의 중앙에 들어섰다.
서둘러 나아간다. 평범하지만 조망에 넋잃다 보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암릉을 따르다가 25m쯤 자일 하강하고, 또 재미있는 형상의 기암들이 연이어진 암릉을 따르다가 대략 15m 높이 절벽을 또다시 자일 하강한다. 일행들 거리가 점점 벌어진다. 한숨 안 자고 또 쉼 없이 등반을 하자니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암릉 산행 경험이 없는 린은 첫 피치 끝내고 외설악이 눈에 들어왔을 때의 활짝 핀 웃음은 사라져 버리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속도 또한 점점 늦어진다. 스포츠클라이밍용 암벽화에 발이 죄어들자 간간이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다.
5봉 하강을 마친 대륙산악회 팀이 제6봉을 등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두르는 모습과 무거운 배낭에 힘겨워는 모습이 함께 느껴진다. 그들 앞으로는 사선크랙을 줄지어 오르는 이들이 보이고 그 너머 왕관봉에도 몇몇 사람이 올라서 있다. 클라이머 한 명 한 명이 울긋불긋 뽐내는 꽃송이였다. 오늘 천화대는 오픈 첫날 바위꽃, 사람꽃 마구 피워놓고 성대한 개통식을 열고 있는 것이다.
여름엔 산모기, 겨울엔 매서운 바람의 추억
오전 10시, 등반 시작 다섯 시간째 접어들고 있다. 그래도 흐린 날씨가 반갑다. 예상보다 목이 타지 않아 2리터 페트병 물도 목까지 차 있다. 아직까지는 희야봉까지 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놓이다가도 제1봉 오를 때부터 소리가 들리던 뒤 팀이 바짝 따라붙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마음이 바빠진다. 대여섯 명이나 되기 때문에 추월당하는 순간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늦어진다.
제5봉에서 수직벽을 타고 20여 m 자일하강하자 비박 터. 한때 인기 있는 비박지였다. 무엇보다 잦은바위골 방향으로 조금 내려서면 물줄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에는 산모기의 맹렬한 기습공격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찬바람과 추위에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남아 있는 곳이다.
5봉 정상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리고 하강 후 제6봉 기슭에서 또 다시 30분 기다리다 보니 인내의 한계가 온다. 이러다 희야봉은커녕 왕관봉까지도 쉽지 않겠다 싶다. 한참 기다린 끝에 하강을 마친 양수열 기자한테 자일 한 동 넘겨받아 6봉을 올려치고 7봉 사선크랙 아래 공터로 다가서자 10여 명이 등반 중이다. 부산 팀은 등반 기량이 시원찮은 ‘폭탄 아줌마’ 때문에 30분 넘게 늦어졌다며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다. 또 한 팀은 계곡 쪽에서 올라오고 있다. 천화대 지릉인 염라길이 목표였으나 엉뚱한 암릉을 등반하다가 이쪽으로 올라온 전북 익산 산꾼들이다. 결국 이들에게 추월당하고, 한참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한다.
사선크랙은 두 가닥 길로 오른다. 애매모호한 수직 크랙은 크랙과 반침니 등반에 자신 있는 사람들 몫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출발지점에서 왼쪽 침니로 등반한 다음 중간 확보지점에서 트래버스해 사선크랙 상단부로 진입한다. 우리는 시원찮은 팀. 왼쪽 우회로를 따라 사선크랙을 등반한다.
크랙을 올려치자 앞 팀이 7봉 하강 포인트에 모여 있다. 이들은 예서 곧바로 하강하는 게 정석 루트인 줄 모르고 왼쪽 방향 정상으로 더 오르려고 모여 있었다. 우회로를 택한 일행 또한 한 명 한 명 사선 크랙 상단 하강 포인트로 올라선다.
“먼저 하강하세요.”
“이젠 더 못 가! 새벽 3시에 라면 하나 먹고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굶고 산행하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서 배 채워야 해.”
다섯 명 전원 하강을 마치고 왕관봉 아래 안부에 모여 늦은 점심을 먹는다. 힘겨워하는 린의 배낭에서는 샌드위치, 견과류 등 갖가지 먹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다른 사람 배낭에서도 떡과 빵, 1리터들이 우유 2통, 과일 등 먹을거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저 많은 것을 그대로 두고 굶은 채 산행을 강행했으니 볼멘소리 할 만도 하다 싶어진다.
오후 2시 반, 왕관봉까지 1시간, 이후 하강한 다음 숲 능선을 오르고 칼날 리지를 거쳐 희야봉 하강까지 마치려면 지금 속도론 세 시간은 족히 걸릴 터. 설악골 빠져나가가기 전에 어둠이 밀려오리라 싶어진다.
“여기서 충분히 쉬었다가 왕관봉까지만 가지요. 한데 앞 팀 등반하는 모습이 왕관봉 올라가는 게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많이 양보(?)했다. 한데 황원선 형뿐만 아니라 모두 곧바로 설악골로 빠졌으면 하는 눈치다. 안부에서 왕관봉 아래 능선까지는 천화대 암릉 구간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피치다. 수직크랙~페이스~언더크랙~페이스~크랙으로 이어진 약 20m 구간.
모든 등반을 추억으로 정리해 주는 설악골
전원 왕관봉 정상에 올라선 것은 오후 4시15분, 여러 사람이 희야봉 칼날 리지를 줄지어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또다시 아쉬워진다. 그래도 최약체 멤버로 구성된 우리가 예까지 왔다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자족하며 하강한다.
“못 내려가겠어요~, 도와주세요.”
완경사 암릉을 거쳐 수직절벽으로 이어지는 약 20m 로프 하강을 마친 뒤 안부로 내려서서 다음 장비를 챙기는데 린이 수직절벽에 매달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로프에 완전히 몸을 실으면서 하강하면 된다고 소리 질러대도 요지부동이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뛰어 올라갔더니 잘 정리해 놓은 로프가 바람에 날려 린 위쪽 크랙에 낀 것.
급히 크랙을 타고 올라가 로프를 빼주자 그제서 린이 하강을 마친다. 한데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밑에서 로프를 잡고 있어야지 그냥 내려가는 법이 어딨냐?”
곧 이어 하강한 양효용씨는 린의 아빠라도 되는 양 아우성이다. 하지만 “린! 다신 설악산 안 올 거지?” 하는 질문에 린은 정반대 대답이다.
“또 오고 싶어요, 꼭 데리고 오셔야 해요~.”
장비를 정리하고 사뭇 지루하면서도 힘겨운 바위골짜기 하산을 마치자 설악골 푸른 물이 반겨준다. 우리 일행이 그렇듯 이미 하산한 다른 팀들도 발걸음에 힘없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너럭바위에 배낭을 풀어놓고 양말 벗고 발을 담그는 순간 모두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이 맛. 린! 좋았지? 멋졌지?”
설악은 찾아드는 기쁨, 암릉 산행의 짜릿함, 멋진 조망…. 그러나 힘겨움으로 막을 내린다면 또다시 찾을 일 없을 터. 암릉 아래 맑고 차가운 계류가 흐르는 골짜기가 반겨주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 짓게 해주었다.
★오늘의 날씨★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의 무릉도원'을 찾아서 | 울진 골포천] (0) | 2017.08.17 |
|---|---|
| 지리산둘레길 제8코스 중 백운동계곡 (0) | 2017.08.15 |
| 산사와 명풍경 | 포천 백운산 흥룡사 (0) | 2017.08.12 |
| '한국의 무릉도원'을 찾아서 | 강씨봉 논남기계곡 (0) | 2017.08.11 |
| '한국의 무릉도원'을 찾아서ㅣ가평 칼봉산 경반계곡 (0) | 2017.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