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계곡 청류 반은 구름이요 천둥이고 한북정맥 산줄기는 하늘에 파도로 이네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잘 쓰면 예술이 되고, 잘못 쓰면 흉기가 된다. 망치며 칼, 호미, 괭이 등 그런 것만 도구가 아니다. 생각도 도구요 마음도 도구다. 자동화된 도시 문명 속에서 음식 재료의 손질에 쓰이는 칼 이외에는 도구를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신체의 기능은 퇴보되고, 정신 또한 늙기 마련이다. 치매라는 악마가 도구의 손잡이를 잡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어쩌다 도구를 사용해 보면 서툴기 마련이다.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한다”, “쟁기질 못 하는 놈이 소만 나무란다” 이러한 말들은 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도구 사용의 미숙이나 부적절성은 누군가에게 일을 남긴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일에는 남의 ‘탓’도 있지만 내 탓도 있다. 혼자 져야 하는 일방적인 책임은 없다. 책임이 전혀 없는 나와 무관한 문제는 없다. ‘나’ 자신은 분명 이 세계의 구성원이다. 특히 마음이라는 도구를 잘 써야 할 의무가 있다. 나이가 든다고 무조건 퇴행성 질환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신체적·정신적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
4차 산업혁명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무얼까? 그 이전의 산업혁명은 기계화와 대량생산, 정보화 산업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미래사회를 열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이미 정보통신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 사회의 성장 동력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어떤 첨단 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세상을 바꾸고 세계를 잇는 핵심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사람-대상-사물 등 객체의 연결성에 의한 사물인터넷, 유비쿼터스 환경 등이 미래 사회의 방점이 될 것이다.
‘앱app’도 대상들을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거기엔 코딩 기술이 필요하다. 이 코딩을 위해서도 도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상상력, 창의력, 용서, 사랑, 절제, 도덕, 이성, 사유, 미소 등 도구는 많다. 그 도구를 통해 자기문화, 자기세계를 개발하고 연결해 나가는 자기혁명이 내가 아는 4차 산업혁명이다. 고립의 타파, 결국 도구의 이야기다. 그 도구를 어떻게 다루고 활용하느냐다. 그러한 뒷받침은 자연과 문화, 인문학이 없이는 한때의 현상에 그치기 쉽다.
구리포천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울에서 포천으로 가는 길이 한결 가까워졌다.
백운산 들머리에 해당하는 흥룡사로 들어선다. 신라 말 도선이 창건했다고 하나 상세한 내력을 확인하기 어렵다. 도선이 나무로 만들어 하늘에 날려 보낸 세 마리의 새 중 한 마리가 내려앉은 이 백운산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제 막 시작한 비의 그 첫 빗방울 같은 두근거림이 인다. 미소는 둥글고 빛은 부시다. <장자>에 나오는 ‘이루離婁’가 아니어도 여기서는 눈이 어두운 나도 내 바닥이 보인다. 그 바닥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어둠 한 덩어리가 있다. 물어뜯거나 쪼거나 빻을 수도 없는 괴물체의 그림자가 보인다. 저것을 부숴버릴 도구가 무언가? 온갖 망상과 번뇌와 미혹을 먹고 산다는 걸 왜 자주 잊는 것일까. 매일매일 보고 듣는 것들에 내 감정과 사견을 이입하여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것이 아닌 남의 것, 내가 아닌 많은 다른 이가 내 안에 득시글거려 시끄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지식은 배우면 된다. 하지만 지혜는 스스로 샘물처럼 솟아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고 듣는 대상마다 그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눈과 귀와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들을 내 바탕의 풍광으로 삼으라는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아난아, 사물에 의지하지 않음이 곧 너의 본성이며, 보고 들음이 다 너 자신의 것이다.”
나는 왜 이 불음을 잘 듣지 못하는 것일까.
청류옥계의 백운계곡과 미래로 내달리는 한북정맥
백운교를 건넌다. 맑다가도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여름 산의 즐거움은 시원한 계곡 트레킹만한 것이 없다. 계곡물은 그동안의 비로 거침없는 테너요 소프라노다. 흥룡봉과 봉래굴 갈림길에서 봉래굴로 방향을 잡는다. 그래야 백운계곡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산수국이 곱게 피었다. 꽃을 따라 가는데, 가다 보니 길이 이상하다. 계곡은 좁아지고 양쪽 바위 협곡이 사람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간다. 도마치봉으로 올라가는 분기점에서 분명 잘 들어서지 않았던가.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억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길은 기억이다. 삶의 경로요 과정이다. 기억을 강물처럼 갖고 가는 것, 삶을 흐르게 하는 것이 길이다. 나를 잘 흘러가게 하는 시간의 이동통로다. 잠시 꽃에 홀렸다고나 해야 할까. 때로는 내가 좋아하며 좇는 것도 미혹이 나은 결과다. 망념이나 망상일 수 있다. 몇 번 가시덤불에 고집이 긁히고 나서야 본래의 길로 되돌아온다. 앞으로도 내가 만나야 할 가시덤불숲이 또 어디에 있을까.
취선대에 도착한다.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돌단풍 모두 바지를 걷고 탁족을 즐기고 있다. 여름 내내 발을 담근 물푸레나무는 한기를 느껴 입술이 파랗고, 줄기 여기저기에 흰 구름이 돌고 있다. 발을 적시며 계곡을 건넌다. 이어 향적봉 갈림길에 선다. 봉래굴이 멀지 않다. 아니 멀다. 길은 미끄럽고 가파르다. 중간 중간 커다란 장송들에 등을 기댄다.
봉래굴이다. 눈처럼 흰 화강암 절벽 아래에 있는 자연 석굴이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본다. 10여 명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꽤 넓은 공간이다. 어두워서 불을 켜지 않으면 주위를 분간하기 어렵다. 서늘한 고요가 깊다.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좋다. 밖으로 나와 안내문을 읽어본다. ‘조선 전기의 명필이자 대문장가인 봉래 양사언이 머물렀던 곳이다. 유·불·도를 통달하고 선계를 넘나들던 진선瞋仙이었다.’
능선에 올라선다. 흰 구름 오가는 탈속한 분위기다. 싸리꽃 피는 길을 따라 백운산(해발 903.1m) 정상에 선다. 조망은 없다. 이 한북정맥에는 국망봉을 위시해 이보다 더 높은 봉우리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삼각봉을 거쳐 도마치봉으로 향한다. 꿩의다리, 눈개승마 등의 꽃이 자주 목격된다.
구름 속에 들었다가 구름을 벗어나는 높은 산들, 무엇을 저리 멀리 보는가.
버들치와의 즐거운 대화가 오늘의 물놀이
흥룡봉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숲이 어둡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산은 한가하고, 자연을 벗 삼는 일에는 이 ‘한가함이’ 으뜸이다. 도마치봉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으면 길 왼쪽으로 일품의 조망 바위가 있다. 저 멀리 국망봉이 드높다. 몰아치는 산의 파도를 쌓고 쌓아서 하늘에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백운중중 첩첩청산 저 무궁한 산하, 굽이치는 산줄기는 어디로 가는가. 숱한 과거의 시간들과 우리들을 이끌고 어디로 갈까. 높고 밝고 깊고 넓은 그 세계를 나는 미래라 한다.
향적봉과 흥룡봉 구간에서는 자주 걸음이 멎는다. 장쾌한 한북정맥 산줄기 너머 화악산이 보이고, 드높은 봉우리들이 가슴 뛰게 한다. 절창의 봉우리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내 생각이 가 닿지 못하는 곳, 말로 뭐라 설명할 수 없다. 망념, 망상, 미망, 미혹, 무명을 다 벗은 저 훌훌함을 어떻게 말하리. 노송들의 옷자락인 안개와 구름이 바람에 펄럭댄다.
비가 쏟아진다. 후드득 후드득 만물을 때리는 빗소리가 시원하다. 맞아서 깨어나는 소리가 기쁘다. 천둥이 친다. 산을 흔든다. 후련하다. 엎드렸던 굼뜬 몸 벌떡 일으킨 계곡은 기운생동하고 콸콸콸 거침없는 흐름이 이어진다. 넘치고 넘쳐 다시 저 위 폭포가 엎어지고 깊은 소와 담의 물이 쏟아지리라. 계곡물은 탕탕히 흘러서 또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이럴까 저럴까 주춤거리던 생각들을 일거에 훑어갈 것이다.
이 무성한 빗줄기 그치면 다시 푸른 하늘일 것이다. 비가 오길 바랐던 것처럼 그 또한 우리가 바라는 일이기에. 그것이 또한 하늘의 일이므로.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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