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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화도 특집] 돈대에서 돈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by 白馬 2009. 5. 15.
          [강화도 특집] 돈대에서 돈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염하 따라 가는 길 16.39km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는 ‘염하(鹽河)’를 따라서 걷는 길이다. 염하는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이름 그대로라면 ‘소금 강’이라는 뜻인데, 바닷물이 하루 두 차례 밀물과 썰물로 드나들다 보니 그런 이름을 얻게 됐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에 남북으로 약 22km에 걸쳐서 이어지는 이 물길은 한강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름 끝에 이 땅의 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河)’자를 달고 있으니, 이름만으로 치면 중국의 황하와 대등한 셈이다. 갑곶돈대에서 출발하여 염하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가리산돈대, 용진진,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보, 용두돈대, 손돌돈대, 덕진진, 남장포대가 있다. 원래의 강화 외성은 고려 고종 때 쌓은 토성이며, 이들 돈대와 진보는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완성된 것이다. 초지진까지 16.39km로 걸어서 가는 데 7시간쯤 잡는다.


▲ 덕진진 남장포대. 멀리 염하를 가로지른 초지대교가 보인다.


갑곶돈대~더리미포구~가리산돈대 3.06km 2시간


강화도 해안선 일주의 들머리는 강화대교를 건너서 바로 남쪽, 강화의 관문인 갑곶돈대와 강화역사관으로 잡는다. 지난 1997년 제2강화대교 준공 후 폐쇄된 제1강화대교 언저리에 있는 천주교 갑곶돈대 순교 성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답사 코스다. 강화역사관은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강화도를 돌아보기 전에 꼭 들러야 할 ‘방문자안내소(visitor center)’ 와도 같은 곳이다. 사실 강화는 전체가 하나의 ‘지붕 없는 박물관’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경주처럼 강화 전체를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금 이 시간에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역사관과 더불어 갑곶돈대 일대는 최소한 한 시간쯤 잡아도 바쁘게 움직여야 할 만큼 볼거리가 많다.


강화역사관 경내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크고 작은 67개의 비석이 눈길을 끈다. 강화읍내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와 영세불망비 등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역사관 건물을 지나 갑곶돈대로 올라가는 모퉁이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천연기념물 78호로 지정된 탱자나무다.


원래 강화에는 탱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가시투성이인 이 나무는 주로 성벽 주위에 심었는데, 해자와 더불어 천연의 장애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기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9호)와 더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갑곶돈대 경내에서 주목할 만한 곳 중 하나는 ‘이섭정(利涉亭)’이다. 이섭정은 원래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협상이 잘 이루어질 것을 염원해서 세운 팔각 정자였는데 무너져서 방치된 것을 1398년 강화부사 이성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정자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롭게 올린 이섭정에 오르면 바로 가까이에 염하로 흘러드는 동락천과 멀리 남쪽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있었던 갑곶리


갑곶돈대 성벽을 따라서 걷다 보면 두 개의 강화대교와 더불어 염하 건너 문수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포 쏘기 좋은 곳은 사진 찍기도 알맞은 전망대. 염하를 향해서 형제처럼 나란히 포신을 겨냥하고 있는 구식 대포 몇 문은 비록 관광지 눈요기감으로 전락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이곳이 강화도 해안 방어의 중심지였고, 경비가 삼엄한 요새였음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성벽이 이어지다 만 듯,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제1강화대교와 이어지는 구 48번 국도로 말미암아 갑곶돈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길과 나란히 역사관 담장이 있지만 원래 갑곶돈대의 가장 높은 부분은 이 담장을 넘어서 다리 입구 일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옳다. 특히 갑곶돈은 북쪽의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과 더불어 종3품 벼슬인 만호가 지휘하는 제물진 소속 돈대 중 하나였으니만큼 현재 남아 있는 갑곶돈대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서 더 많은 방어 시설이 위치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1 갑곶돈대의 대포. 사정거리 700m로 포탄의 폭발력이 없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 2 이섭정.

실제로 강화에 다리와 길이 나기 전까지 현재의 천주교 성지 일대에는 ‘진해마을’이 있었으며, 제1·2강화대교 사이에 ‘진해루(鎭海樓)’와 갑곶나루가 있었다. 강화외성은 동문 격인 진해루에서 북쪽으로 당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동락천 건너 가리산돈대까지 이어졌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기록과 사진에 따르면 1893년 조선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과 제물진 만호의 진영이 진해마을 일대에 있었으리라는 것이 강화향토사연구소 류중현 소장의 추측이다. 당시 조선은 1876년 최초의 신식 군함인 3000톤급 ‘양무호’를 일본에서 구입해 운용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를 운용할 해군을 양성하고자 영국 해군 장교를 교관으로 초빙해서 강화에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토성 위에 쌓은 강화외성


본격적인 강화도 도보 탐사는 강화역사관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주차장을 지나 갑곶다리를 건너면 남쪽으로 염하와 나란히 해안순환도로가 이어진다. 길 한 쪽에 자전거 도로가 있기는 하지만 인도가 따로 없기 때문에 늘 오가는 자동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리미포구가 빤히 보이는 중간 지점쯤 이르면 잘 가꾼 잔디밭과 검은 비석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비석에는 큰 글씨로 ‘순국터’라고 새겨져 있어 더욱 궁금증이 생긴다. 비문에 의하면 바로 이곳이 1907년 강화의병운동에 앞장섰던 김동수 형제가 목숨을 잃은 현장이며, 자세한 내용은 강화읍내 감리교회에 세워진 추모비에 적혀 있다고 알리고 있다. 굳이 읍내 교회까지 가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좀 더 자세한 전후 사정을 담은 글을 비석 뒷면에라도 새겨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시선을 돌리면 왼쪽으로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안내판은 ‘순국터’ 비석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잔디공원으로 조성된 이 일대가 ‘강화외성’의 일부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화외성’에 관해서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염하를 따라 북쪽 월곶 연미정에서 남쪽 초지진까지 16km에 걸쳐 성을 쌓은 것이 바로 ‘강화 외성’이다. 처음 이 성을 쌓은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33년 염하 북쪽 적북돈대부터 남쪽 초지진까지 23km에 이르는 토성이었다. 이 고려시대의 토성을 바탕으로 병자호란 이후 숙종 때 돈대와 돈대, 진보를 잇는 성을 쌓은 것이다. 이러한 축성 전까지만 해도 염하 일대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매우 복잡한 데다 썰물 때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지형상 접근하기 힘든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던 곳이다.


강화에서 전사한 열세 살 소년 유격대원


가리산돈대를 끼고 있는 더리미포구는 장어구이마을로 유명한 곳. 10여 척의 고깃배가 드나드는 이 포구마을부터 강화대교가 있는 갑곶리는 물론이고 강화외성 남쪽 끝부분까지 철책으로 막혀 있던 해안선이 열려 있어서 마음대로 나가볼 수 있다. 차를 타고 그냥 지나쳐가던 더리미는 걸어서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참 아담하고 평화로운 어촌이다.


▲ 1 더리미포구. / 2 강화외성 순국터.

돈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가리산 꼭대기에서는 멀리 북쪽으로 강화대교와 문수산성, 갑곶돈대 그리고 남쪽으로 용당돈대를 휘감아 흐르는 염하가 보인다. 벼랑을 이룬 바로 아래로는 해안순환도로가 지나고, 염하에는 어선 한 척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한가롭게 떠 있다. 가리산돈대는 용당돈, 좌강돈과 더불어 용진진에 속한 돈대로 복원 예정이나 아직은 버려진 채 황량한 상태 그대로다.


가리산 중턱에는 유엔기와 더불어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공원이 있다. 더리미마을 어디에도 공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는데 이곳에는 박정희, 김종필씨 같은 지난 시절 권력자들의 휘호가 새겨진 기념비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오석에 ‘위국충렬(爲國忠烈)’이라 새겨진 김종필씨의 글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반면 1973년 6월 25일 화강암에 ‘자주의병(自主義兵)’이라 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은 강직한 무인의 기개가 넘쳐흐르는 데다 글자들이 금방이라도 죽창을 들고 튀어나올 것 같은 ‘비분강개’를 담고 있다.


공원 북쪽에 족히 수십 톤은 됨직한 거대한 화강암이 있어 가까이 가 보니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전쟁 때 유격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470명 강화 청소년의 이름 가운데 열세 살짜리 소년이 두 명이나 있다. 합동위령제를 지낸 후 그냥 방치된 제단은 2006년 6월 25일 지낸 행사의 흔적이다. 3년 전에 20회째 위령제를 올린 것이니, 위태위태하게 지나온 그간의 세월이 짐작될 만한데 텅 빈 채 굳게 잠겨 있는 ‘6.25참전 소년유격대회관’ 건물 앞에서 돌아서는 길, 빛바래고 찢어진 채 맵찬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참전 16개국의 깃발이 무색할 따름이다.


가리산돈대~광성보  8.7km 3시간


가리산돈대에서 더리미포구 마을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 왼쪽으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마을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안순환도로에 이른다. 길을 따라서 좌강돈대가 있는 용진진까지는 1.6km. 지난 1999년에 복원된 용진진 참경루(塹鯨樓)의 날렵한 지붕이 멀리에서도 눈에 띈다. 참경루 바로 옆에 있는 원형의 요새가 바로 좌강돈이다. 염하 쪽으로 간척지를 넓혔기 때문에 원래는 바닷가에 있던 돈대와 문루가 땅 한가운데로 들어앉아 버리고 말았다.


원형의 좌강돈대 성벽에 오르면 과거 해안선을 이루었음직한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염하가, 멀리 서쪽으로 고려산과 혈구산·진강산이 잘 보인다. 용진진 못 미처 해안순환도로에서 서쪽으로 난 갈림길을 택하면 선원사지에 이른다. 좌강돈대 아래쪽으로는 대형버스까지 세울 수 있는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돼 있으며, 가까이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효종 7년(1656년)에 세운 용진진은 좌강돈대와 더불어 북쪽의 가리산돈대, 남쪽의 용당돈대를 관할했으며, 병마 만호의 진영이 있었던 곳이다. 주둔했던 병력은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101명이었으며, 방어 시설은 포좌 4개소, 총좌 26개소였다.


▲ 1 가리산돈대에서 내려다 본 염하. / 2 용진진 참경루.

산모퉁이에 숨어있는 용당돈대


용진진에서 용당돈대까지는 1.1km 가량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몇몇 지도에는 ‘웅골돈대’로 표기돼 있는 곳이 바로 용당돈대다. 고갯마루에서 서쪽 능선 일대에는 짓다 만 SBS 드라마 촬영장이 있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내리막길을 따르다 왼쪽으로 용당돈대 진입로가 이어진다. 비포장에 좁은 내리막길이라서 차는 들어갈 수 없으며, 주차장도 따로 없다. 큰길에서 돈대까지는 90도 왼쪽으로 꺾어서 50m쯤 내려갔다가 다시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100m쯤 올라간다. 바로 길가에 있는 용진진과는 달리 용당돈대는 길가에 별도의 안내판이 아직 없는 데다 염하 쪽으로 숨어 있기 때문에 웬만큼 눈 밝은 사람이 아니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지난 2001년에 복원한 용당돈대는 화강암으로 쌓은 원형 진지인데, 출입구 부분과 돈대 하단부에 들어가 있는 돌 색깔이 달라 최근에 쌓아서 하얗게 빛나고 기계로 다듬어서 매끈한 화강암과 구분된다. 비록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해도 300여 년 전 조선시대 석수장이가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서 쌓아올린 거칠고 투박한 성돌에서는 온기마저 느껴진다. 특이하게 돈대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그 옆으로 집터 흔적이 눈길을 끈다. 성가퀴가 없는 용당돈대 성벽에 오르면 북쪽으로 문수산성과 강화대교, 갑곶, 가리산 더리미포구, 용진진이 보인다. 또 남쪽으로는 오두돈대와 광성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염하 건너편으로는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 일대,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골프장이 빤히 보인다.


화도, 꽃피는 작은섬


용당돈대에서 나와 남쪽 화도돈대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자면 서쪽으로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아마도 고려시대 이전에는 외성을 쌓기 전까지 이 일대의 논이 모두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과 갯골이었을 터. 대부분의 강화도 해안평야가 그렇듯 돈대에서 돈대로 이어지는 외성이 방조제 역할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돈대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의 농토로 쓸 수 있는 간척지를 얻은 셈이다.


▲ 1 강화전성. / 2 용당돈대.

용당돈대에서 화도돈대까지는 1.2km.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닿을 거리다.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가도 좋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염하 쪽 해안선, 논둑길을 걸어도 좋다. 여느 돈대와는 달리 장방형으로 터만 남아 있는 화도돈대는 규모도 작은 편이고, 해안순환도로에 바로 붙어 있어서 별도의 주차장이 없다. 아마도 이 돈대는 이름 그대로 꽃피는 작은 섬, 화도(花島)에 위치하면서 염하와 이어지는 삼동암천을 드나드는 배 단속이 주목적이었을 법도 하다.


지나치기 쉬운 강화전성


화도돈대에서 다리 건너 서쪽 갈림길은 불은면 고능리로 이어지고, 오두돈대는 계속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1km, 걸어서 15분이면 닿는다. 자라머리처럼 염하 쪽으로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자라 오(鰲)’ ‘머리 두(頭)’ 오두돈대다. 부근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돈대 아래 길가에는 화장실까지 갖춘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평지에 있는 좌강돈대나 화도돈대와는 달리 오두돈대는 여기서 70~80m쯤 올라간 언덕 위에 있다.


오두돈대를 둘러본 후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200m쯤 내려가면 느티나무 고목이 몇 그루 줄지어 선 곳에 이르는데 바로 그 아래 강화 ‘전성(塼城)’ 흔적이 있다. 대부분 오두돈대만 올랐다가 그냥 내려가는데, 천천히 여유를 갖고 살피지 않을 경우 강화전성을 놓치고 지나치기 쉽다. 영조 때 쌓았다는 까만 벽돌이 10여m 가량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길 쪽에서는 보이지 않고 해안선 쪽으로 내려서야 볼 수 있다. 간혹 느티나무 뿌리가 내리면서 벽돌이 흩어진 부분도 눈에 띈다. 강화전성 근처에는 ‘오두정’이라는 정자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 1 손돌목돈대. / 2 용두돈대.

345명이 전사하고 무참히 깨진 광성보


오두돈대에서 광성보 갈림길까지는 2.53km, 걸어서 40분쯤 걸린다. 중간에 ‘터진개’라는 특이한 이름의 마을을 지나고, 길 서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은 ‘넙성리(넙城里)’ 일명 ‘넙세이’다. 강화 지명 유래에 따르면 강화로 천도한 고려 고종 이전에 이미 이 일대에 목초가 무성해서 말 목장이 있었으며, 주변 경작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쌓은 마성(馬城)이 있었다고 전한다.


광성보 입구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 길을 택해 300m 더 가면 매표소에 이른다. 부근에는 주차장과 화장실, 매점이 있다. 1977년에 복원된 광성보는 광성돈대·용두돈대·손돌돈대·광성포대를 포함하며, 돌아보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릴 정도로 넓은 지역에 걸쳐서 자리 잡고 있다. 먼저 광성돈대와 바로 옆에 있는 ‘안해루(按海樓)’를 지나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 5분쯤 가면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어재연·어재순 두 형제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각’에 이른다. 광성보에서는 이 일대의 길이 가장 아름다운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소나무 뿌리가 다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이 길은 1977년 당시 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군인들을 동원해 하루 만에 조성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비각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는 1871년 미국 해병대와 싸우다 전사한 조선군 묘지, 이른바 ‘신미순의총’이 있어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당시 전사자는 어재연 장군 등 군관 49명과 군인 296명. 이들을 모신 크고 작은 봉분 일곱 개가 아늑한 서향 비탈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은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제법 비장한 정취를 자아낸다.


136년 만에 돌아온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 기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에 이어 5년 후 이른바 ‘포함 외교’를 명분으로 미국 아시아함대가 수백 명의 해병대원을 초지진에 상륙시켜 단숨에 제압했다. 여세를 몰아 덕진진을 함락시켰고, 광성보에서 항전하던 조선군을 전멸시켰다. 상황이 종료되기까지는 불과 이틀. 미국 해병대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너무도 손쉽게 조선군을 제압했다. 당시 이들은 광성보 일대를 초토화한 후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 기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136년간 애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던 이 비운의 깃발이 최근 뜻있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 한국에 돌아온 것은 지난 2007년 10월의 일. 매년 음력 4월 24일 지내는 광성제 당시 쌍충비각 앞에 어재연 장군의 이 깃발이 게양된 적이 있다. 그러나 깃발을 아주 돌려받은 것은 아니고 10년 장기 임대라고 하니 되돌릴 수 없는 냉엄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과연 이 땅의 누구인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침 강화군에서는 광성보에 어재연 장군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한다. 그의 애국충정이 만세에 빛나리라.


‘신미순의총’을 지나서 길은 손돌돈대로 이어진다.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돈대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해병대의 집중 공격을 받았으며, 어재연 장군도 최후까지 싸우다 바로 여기서 전사했다. 손돌돈대 아래로는 휴게소가 있으며, 여기서 용두돈대와 광성포대 가는 길이 갈라진다. 마치 용머리처럼 염하 쪽으로 뻗어나간 용두돈대는 포대까지의 통로 양쪽에 성벽과 성가퀴를 쌓은 점이 특징이다. 용두돈대는 원래 규모가 작아서 광성보의 일개 포대에 지나지 않지만 후세에 돈대로 격상된 것이다. 1977년 광성보와 더불어 복원된 용두돈대에는 당시의 대포와 ‘강화전적지정화사업기념비’가 있다.


용두돈대에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로 염하 건너 언덕 위에 ‘손돌묘’가 보인다. 용두돈대와 손돌묘 사이의 염하는 물살이 유난히 세고 썰물 때 암초가 드러나서 배가 지나다니기 힘든 일명 ‘손돌목’이라 불리는 곳이다. ‘손돌목’은 임금을 배에 태우고 이곳을 건너던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의 현장이기도 하다.


▲ 1 신미순의총. / 2 광성보 공조루.

광성보 남쪽 산허리로는 초록색 철제 울타리가 길을 막고 있어 다시 안해루 쪽으로 돌아서 나와야 한다. 해안선을 따라서 덕진진으로 잇는 길을 내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이 광성포대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쌍충비각에서 염하 쪽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을 따르면 자연스럽게 안해루로 이어진다. 안해루 앞에는 보기 드물게 높이 자란 살구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반긴다.



광성보~초지진 4.63km 1시간30분


광성보 입구 삼거리까지 길을 되짚어 나가서 해안순환도로 따라 덕진진 입구까지는 1.7km, 25분쯤 걸린다. 사거리에서 왼쪽이 덕진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차도를 따라서 걷는 게 싫으면 광성보 입구 삼거리에서 450m쯤 길을 따르다 염하 쪽으로 나가서 바닷가 논둑길을 걷는 방법도 있다.


미국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 벌였던 덕진진


효종 9년(1658년)에 설치한 덕진진은 숙종 5년(1679년) 덕진돈대와 남장포대, 덕진포대를 갖췄으며,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와 포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 김포 쪽 덕포진 포대와 더불어 염하를 지나는 함선에 협공을 가할 수 있는 강화 제1의 포대를 갖춘 곳이 바로 덕진진이다. 남장포대는 공조루(控潮樓)를 지나서 150m쯤 떨어진 후미진 곳에 있는데, 대략 100m에 걸쳐서 15개의 포대가 설치된 이곳을 지나면 덕진돈대에 이른다. 남장포대는 덕진돈대에 가려서 남쪽에서 염하를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적선이 발견할 수 없는 움푹 들어간 지형에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덕진진이 보유한 비장의 카드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군의 포탄이었다. 당시의 포탄은 쇠뭉치에 불과한 것으로 현대의 포탄처럼 폭발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작은 목선이라면 몰라도 미국의 3,000톤급 철선에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우수한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남북전쟁을 통해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해병 10개 중대 1,230명을 동원한 상륙전 앞에서는 속수무책. 초지진부터 차례로 함락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이다.


덕진돈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水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진 비석 하나가 염하를 내려다보며 꼿꼿하게 서 있다. ‘해문(海門)’이란 바다와 통하는 염하를 말하며 “이 물길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다니지 못하게 막겠다”고 선언한 흥선대원군의 ‘바다의 척화비’다. 1867년에 세웠으니 벌써 142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한국전쟁 이후 한강 하구가 휴전선으로 막히면서 반세기 넘게 뱃길이 끊어진 지금까지도 자의반 타의반 비석의 글은 유효한 셈이다.


▲ 1 초지진. 오른쪽 소나무에 대포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 2 초지대교.

초지돈대 성벽에 남은 포탄 자국


지난 2002년 초지대교가 생기면서 번잡스러워진 초지진 일대 해안순환도로는 늘 교통량이 많은 편이다. 될 수 있으면 이 길을 피해서 가는 게 낫다. 덕진진 입구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500m 가면 덕진교 다리를 건넌다. 여기서 염하 쪽 논길을 따라 400m쯤 내려가면 멀리 초지대교를 바라보면서 해안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방조제 위로 걸어갈 수 있다. 중간에 뱀장어 양식장 지나 초지진 선착장까지는 1km 남짓, 15분쯤 걸린다. 여기서 다시 해안선을 따라서 초지진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일찍이 염하의 초입으로 중시되었던 초지진은 효종 7년(1656년)에 설치된 이래 숙종 5년(1679년)에 축조한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가 초지진 관할에 들어갔다. 병인·신미양요를 치르고 난 후 고종 11년(1874년)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초지진에 추가되기도 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와 포격전을 치르기도 했던 초지돈대는 근 100여 년 가까이 무너진 채 방치되다가 1973년 강화전적지 복원사업이 시행되면서 가장 먼저 복원됐다. 그러나 초지돈대 성벽에는 지나간 시절 격전의 흔적으로 포탄에 맞아서 패인 흔적과 포탄 맞은 노송 두 그루가 그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역사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초지진에는 매표소가 있다. 관광안내소, 화장실, 매점, 식수대와 유료 주차장 등이 고루 갖춰져 있다. 특히 조금 때는 초지진 앞 염하 바닥의 기반암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지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밀물 때도 수면 위로 튀어나온 암초 지대에 등대가 설치돼 있다. 특히 염하 건너편 대명항 야경이나 초지대교를 배경으로 한 야경이 아름답다.



여행 정보


강화역사관


지난 1988년 문을 연 강화역사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2001년 2월 기존 유물을 재배치하여 새롭게 개관했다. 강화도 여행 전에 꼭 들러보아야 곳이다. 대형버스 70대가 주차 가능한 무료주차장에 매점과 화장실, 자전거대여소 등이 있다. 연중무휴로 3~5월, 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여름철 6~9월에는 오후 7시까지, 겨울철 11~2월에는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입장료는 일반 1,300원, 청소년·군인 700원. 역사관 매표소에서는 역사관 외에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일괄입장권을 30% 할인 가격으로 판매한다. 일괄 구입한 입장권은 이틀간 유효하다. 어른 2,700원, 어린이·청소년 1,700원. (032)933-2178,  http://ghm.incheon.go.kr/


자전거 대여


강화역사관 주차장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초지진까지 해안순환도로를 따라서 9km에 이르는 자전거 도로에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용 가능하며, 1인용 자전거 1시간 사용료는 2,000원, 하루 사용료는 8,000원이다. (032)933-3692
역사관 관광안내소 (032)932-5464
초지진 관광안내소 (032)937-9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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