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가면 더 운치있는 경남 함양 한옥
마음이 쉬어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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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전자파에 찌들고, 밤엔 술에 절어 있던 몸. 주말까지 네온사인 현란한 ‘속세’에 내던지고 나니 마음도 머리도 황폐하다. 문득 청아하고 고결했던 옛 선비들의 삶이 부러워진다. 타인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했던 기개(氣槪). 한낮엔 누마루에서 책을 읽고, 저녁엔 달빛 아래 시를 읊었던 풍류.
그들의 자취를 따라 의젓하게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는 일은 비도 바람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경남 함양에 갔다. 함양은 조선시대 ‘좌안동 우함양, 좌퇴계 우남명’이라 해서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 계열의 북인(北人)이 성리학을 발전시켜 온 선비의 고장이다. 비도 오겠다, 바람도 휘휘 불겠다, 고택(古宅)에 앉아 선비처럼 유유자적해볼 요량이다.
서울에서 3시간 남짓 달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정여창(鄭汝昌, 호 일두·1450~1504) 고택을 찾았다. 진흙을 이겨 돌을 쌓은 낮은 담을 따라 몰려 있는 수십 채의 기와집 중 선비의 기품이 제대로 느껴지는 집으로 유명하다.
한낮에 마루에서 책을 읽고, 저녁엔 달빛아래 시를 읊던 선비처럼…
멀리서 보니 400여 년의 세파를 당당히 이겨낸 옛 기와가 정갈하게 남아있다. 납작한 박석(薄石)을 가분가분 걸어 솟을대문 앞에 섰다. 임금이 충신·효자·열녀에게 내렸다는 홍살문이 위엄 있게 객을 맞았다. 현판을 세어보니 이 집안은 충신과 효자를 5명이나 배출했다. 한 명만 받아도 영광이었다는 이 ‘표창장’을 다섯이나 받았으니 범상한 가문은 아니다. 알고 보니 현감·군수·관찰사까지 나왔던 집이라 한다.
대문을 들어서자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풍채 좋게 솟아있다.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 등 지체 높은 이들이 묵고 갔다는 곳이다. 귀한 손님을 맞았던 방답게, 사랑채는 선비들의 ‘글 잔치’다. 지붕 아래 ‘忠孝節義(충효절의)’라고 크게 쓰여 있는 건 전주(前奏). 앞으로 톡 튀어 나온 누마루(누각처럼 높게 만든 마루)에는 ‘濁淸齎(탁청재·세속의 혼탁한 마음을 깨끗이 한다)’ 라고 쓰인 현판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추사가 썼다고 전해오는 ‘百世淸風(백세청풍·오랫동안 맑은 바람이 부는 곳)’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내벽 곳곳에는 ‘律身以敬 向學以誠(율신이경 향학이성: 경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정성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다)’같은 글귀들이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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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왼쪽 문을 통하면 안채와 아랫채, 곳간채들이 이 ‘ㅁ’자 형태로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추위를 피하기 좋은 ‘닫힌 구조’다. 하지만 함양군청 곽성근씨는 “닫혀 있지만 열려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안채 마루에 앉아 바라본 하늘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안채 뒤에는 입 모양이 다채로운 장독대가, 안 곳간채 앞에는 돌과 나무로 된 절구가 옛 정취를 자아낸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만지지 마시오’라는 푯말로 관광객을 경계하는 까칠함은 없다. 사랑채는 내부까지 들락거리며 객으로서 쉬었다 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제집처럼 막 놀다 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혼자일수록 행동을 삼가고 자신을 절제했던 선비들의 ‘신독(愼獨)’ 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곳이다.
너럭바위 웅덩이에 참방 천년의 숲 향기에 첨벙
비 올 때 더 운치 있는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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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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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은 선비 마을답게 정자와 누각이 100여 채 세워져 있다. 벗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학문을 논하거나 한양길에 잠시 머물러 주먹밥을 먹던 곳이다. 서하면 화림동 계곡은 과거 보러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60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으로 예쁜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 8개 못과 8개 정자)’으로 불렸다. 현재는 농월정(터)-동호정-군자정-거연정을 나무다리로 이은 6.5㎞ ‘선비문화탐방로’(2006년 말 완공)는 선비들이 지나쳤던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다리를 걷다 정자가 보이면 잠시 쉰다. 정자 앞 크고 납작한 너럭바위가 작은 들판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 이름은 얼마나 낭만적인지. ‘달이 비치는 바위 못’이란 뜻의 월연암(月淵岩)과 ‘해를 덮을 만큼 큰 바위’인 차일암(遮日岩)이 풍광을 아우른다.
바위 위 물살이 움푹 파 놓은 웅덩이들에 물이 들어차 잔잔한 얼룩무늬를 이룬 모양이 신비롭다. 이 곳에 막걸리를 쏟아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 마시는 이도 있다고 한다. 진정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분이다.
상림, 그리고 연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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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에 귀가 즐거웠다면 숲 향기로 코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곳, 바로 ‘상림’(上林)이다. 신라 말, 최치원이 태수로 왔을 때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호안림(護岸林)이다. 국내 최초 ‘인공림’인 셈이다. 하지만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현대식 수목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1.6㎞ 길이, 80~200m 폭의 대지에 100여종의 낙엽활엽수가 울창하게 우거진 모습은 인공 숲이면서 자연과 더 잘 어울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상림은 최치원이 ‘금으로 만든 호미’로 하루 만에 일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을 떠나기 전 금호미를 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이 호미가 발견되면 그 때 나는 세상을 떴을 것”이라 남겼다고 한다. 최치원의 말년은 발견되지 못한 금호미처럼 묘연해 언제 타계했는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숲 속 느티나무·정자나무·굴참나무·잣나무·떼죽나무·이팝나무·금낭화·꿀풀 등 수종 구경만 제대로 해도 한나절이 간다. 봄엔 이팝꽃, 가을엔 꽃무릇(석산)이 만개한 풍경이 뛰어나다. 불상·그네·운동기구·연못·약수터·인물 공원 등 곳곳에 보고 즐길 곳도 숨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단 음식물 반입은 금지,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 식량이므로 주워가서는 안 된다. 동쪽으로는 2000여 평 연꽃밭이 펼쳐진다.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잎과 붉은 꽃은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동화되지 않는다)을 일깨워줬다.
※관광문의: 함양군청 문화관광과 (055)960-5555
‘蓮’ 수제비 [하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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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새로운 명물, 노화방지 효과가 있다는 ‘연(蓮)’을 이용해 수제비를 만들어 주는 집이다. 원래 이곳의 주 종목은 전통차(4000~6000원). 외관도 찻집처럼 생겼지만, 낮 12시~3시 사이엔 특별히 ‘연잎수제비 세트’(7000원·사진)를 선보인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주인아주머니가 개발한 연잎 수제비와 연잎 차, 연근조림과 연근양갱이 함께 나오는 ‘연 4종 세트’다. 다시마·멸치국물에 연근과 들깨로 육수를 만들고 여기에 연잎을 갈아 넣은 연두빛 반죽으로 수제비를 뜬다. 감자·호박·버섯이 들어간 ‘보양식’으로 고소하고 맛이 깊어 스님들에게 인기가 높다. 저녁엔 1시간 미리 전화주문을 해야 한다. 현미로 뽑은 가래떡과 녹차를 섞은 떡으로 만든 떡볶이(1만원)도 군것질 거리. ‘상림’ 주차장 맞은편. (055)962-8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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