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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군락지의 헬기장에서 드론으로 찍은 항공샷. 주목 군락지의 헬기장에서 드론으로 찍은 항공샷. 눈꽃으로 뒤덮인 두위봉 정상부와 달리 고도가 낮아질수록 눈꽃으로 뒤덮인 두위봉 정상부와 달리 고도가 낮아질수록 그라데이션이 짙어져 한층 멋스러움을 더했다. 그라데이션이 짙어져 한층 멋스러움을 더했다.
강원도 전역에 폭설과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서울을 벗어난 생활권 탓에 강원도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휴일과 맞아떨어진 눈 소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목적지는 정선의 두위봉으로 정했다. 해발 1,466m의 두위봉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다. 산 모양새가 두툼하고 두루뭉술해 지역주민들은 두리봉이라고도 부른다. 정상에서 북으로는 민둥산, 동으로는 백운산과 태백산이 보이며, 남으로는 매봉산을 두루 볼 수 있다. 들머리까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쉽고, 정상까지 코스가 짧아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도 부담스럽지 않게 산행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서 눈 구경을 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선택은 없었다. 여름에 두어 번 찾은 적이 있지만, 겨울 두위봉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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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내리는 폭설과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오르느라 계획보다 더디게 운행했다. 체력도 더욱 빠르게 소진됐다.
예미의 택시 기사는 단 3명뿐?
청량리역에서 예미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다른 열차와 스칠 때마다 속도를 늦췄다. 속도가 줄어들 때마다 나는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도시의 삭막한 풍경이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하얗게 눈이 덮인 시골 풍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약 세 시간을 달려 예미역에 도착했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작은 기차역 승강장엔 노부부와 나, 단 세 사람만 남았다. 다소 썰렁한 역과 달리 손님 맞이방은 따뜻했다. 그 안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왔다.
들머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호출했다. 첫 번째로 연락이 닿은 기사는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며 친절하게 다른 기사의 번호를 알려줬다. 두 번째로 연락이 닿은 기사는 건강검진을 막 끝내고 식사 중이라고 말했다. 기사는 전날 9시부터 공복이었음을 강조하듯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그가 다시 세 번째 기사 연락처를 알려줬다. 세 번째 기사는 사북에 가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첫 번째 기사의 전화번호였다. 이 마을에는 택시가 3대뿐이었던 것이다. 돌고 돌아 첫 번째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두 번째 기사의 전화였다. 내 상황이 걱정이 돼 확인차 전화한 것이었다. 나는 두 번째 기사에게 택시가 곧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기사는 다행이라며 자신의 건강검진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웃으며 좋은 결과가 있길 빈다고 말하고 끊었다. 웃기면서 소소한 대화들 덕분에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한 그 드라마는 ‘전원일기’였다.
드디어 도착한 택시를 타고 단곡2교로 향했다. 다행히 길은 제설이 잘되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발은 금세 굵어지더니 함박눈으로 변했다. 곧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 같았다. 널찍한 임도였던 등산로가 가파른 샛길로 변했다. 하얗고 좁은 길은 비밀 통로처럼 희미하게 이어졌다. 눈발은 색깔이 있는 모든 걸 지우겠다는 듯 강하게 내렸다. 곧 시야조차 막혔다. 거대한 흰색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반쯤 오르자 눈은 멈추었지만, 쌓인 눈이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땀과 열기가 패딩 속에 갇혀 맴돌았다. 그런데 걸음을 멈추면 그 열기가 금세 얼어버릴 것 같았다. 숨이 차면 속도를 늦추고,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으면 다시 걸음을 세차게 내디뎠다. 아이젠을 착용한 상태였지만, 눈이 깊고 경사가 급해 산길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그 와중에도 가지마다 핀 상고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이 아름다움은 뭔 일인가? 나는 몸이 얼어가는 것도 잊은 채 한참동안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눈 덮인 능선 위에 오르자 식은땀과 차가운 공기가 어우러져 추위가 나를 옥죄었다. 강한 바람에 쓸린 눈이 작은 언덕을 만들어 놨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언덕을 러셀하며 나아갔다. 길인가 싶어 나아가면 금세 등산로에서 벗어났다. 수시로 GPS를 확인했다. 눈밭은 내 다리를 집어삼켰다. 체력은 빠르게 소진됐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풍경은 점점 더 몽환적이 되어갔다. 머릿속에서 환희와 고통이 뒤엉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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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폭설과 한파로 두위봉 정상부는 꽁꽁 얼어붙어 멋진 얼음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미세한 얼음 알갱이들이 시야를 덮어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야영지가 고민이었다. 두위봉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은 공식 야영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서 야영을 하면 다음날 도사곡휴양림까지 가는 길이 한없이 길고 고단할 것이다. 능선에 쌓인 눈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폭설로 앞선 사람의 발자국은 다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전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두위봉의 상징인 겨울 주목을 담기 위해 온 이상 원점회귀를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됐다. 이제 해가 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가느냐가 중요했다.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식었던 몸이 데워졌다. 연료를 태우기 시작한 두 다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전진했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쯤 첫 번째 주목이 나타났다. 경사진 곳에 우뚝 서있는 주목 아래에는 텐트 칠 공간이 없었다. 다음 주목을 찾아 내려갔다. 오르막에서는 다리를 잡아끌던 눈이 하산길에서는 완충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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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군락지의 고봉에서 바라본 두위봉 정상.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돌풍에 능선 위에 하얗게 덮였던 눈이 많이 날아갔다.
다리를 잡아끄는 눈덩이들
뛰다시피 달려 내려갔다. 헬기장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어둠이 깊어 졌다. 크고 작은 주목들이 나타났지만, 마음에 드는 나무는 없었다. 작정을 하고 나온 만큼 멋진 나무 아래에서 머물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동행이 있었다면 유난스럽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결국 차선책으로 처음에 봤던 주목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신나게 내려왔던 길을 힘겹게 다시 기어올랐다.
주목 아래에 멈춰 배낭을 내려놨다. 그러고 보니 산행 시작한 이후한 번도 배낭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제야 배낭 헤드에 있던 물을 꺼냈다. 이미 반쯤 얼어 있었다. 나무뿌리에 내리쳐 얼음을 깨고 물을 마셨다. 달아오른 체온 덕분에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랜턴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무서운 고독이 밀려왔지만 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멋진 주목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몸을 지배했다. 랜턴을 켜 놓으니 아늑했다. 주목을 올려다보았다. 가지마다 상고대가 맺힌 주목은 멋쟁이 노신사 같았다.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문제는 협소한 바닥에 있었다. 경사가 심한 데다가 나무뿌리는 여기서 텐트 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는 듯 고집스럽게 튀어나와 있었다. 별의별 장소에서 텐트를 쳐봤지만, 최상급 난이도의 자리였다. 기초공사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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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바람에 밀려 자라난 표지판의 상고대와 나무에 맺힌 수상樹霜.
발포 매트로 주위의 눈을 쓸어 모았다. 먼저 나무뿌리 사이를 채우고 경사진 곳에 대략 수평을 맞춰 토닥거렸다. 습설이라면 쌓는 대로 ‘스노 매트’가 착착 만들어졌겠지만, 금방 내린 눈은 건조해서 쌓아도 쌓아도 무너져 내렸다. 가장자리에 입김을 불어가며 눈을 다졌다. 20여 분간 작업한 끝에 한 평 남짓 자리를 만들었다. 다음,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경사면에 자리를 다진 터라 자칫 잘못하면 자다가 텐트와 함께 구를 수도 있었다. 텐트를 세워놓고, 경사면 쪽 스노 매트 위에 발포매트를 깔았다. 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스노 매트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였다. 그 위에 텐트를 올렸다. 프레임이 단단한 배낭을 경사면 쪽 바닥에 깔았다. 에어매트를 널빤지처럼 딱딱할 정도로 불었다.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질 것이라고 계산했다. 또 체온 때문에 스노 매트가 녹아서도 안 됐다.
나는 우모복으로 갈아입고 트레킹 때 입은 옷들은 단열을 위해 바닥에 깔았다. 발쪽이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자다가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도록 등산화를 에어매트 밑에 지렛대 받침처럼 끼워 넣어 수평을 만들었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몸이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됐다. 한파 덕분에 다져 둔 스노 매트는 밤새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되직한 밀가루 반죽이 손톱에 들러붙은 듯 묵직했다. 핫팩 두 개를 꺼내 양손에 쥐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손이 녹을 때까지 잠시만 누워 있자.’ 텐트 안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따뜻했다.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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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주목 아래에서 보낸 하룻밤. 멋진 여명이 운치를 더해 주었다.
고요함과 위엄 속에서
코끝이 시렸다.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랜턴은 켜진 채였다. 저녁도 먹지 않고 꼬박 10시간을 잔 것이다. 눈이 내린다던 예보와 달리 아침은 청명했다. 일출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점잖은 노신사 주목과 함께한 꿀잠도 좋았다. 헬기장에서 드론을 날릴 생각에 아침식사를 미루고 야영지를 철수했다. 하늘이 열린 만큼 상고대가 맺힌 아름다운 설산을 담고 싶었다. 한파도 따사로운 햇살까지 얼리지는 못했다.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상고대의 결정들은 살아 숨 쉬는 하얀 보석 같았다. 다시 텐트를 쳤다. 이따금씩 불어 닥치는 돌풍에 온 몸이 얼어버릴 것 같아 텐트 안에서 드론을 띄웠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두위봉은 마치 은빛으로 수 놓은 거대한 비단 이불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능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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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을 지붕삼아 묵었던 오래된 주목과 함께. 폭설과 한파에 가지마다 설빙이 맺혀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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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뭉술한 두위봉 정상과 도사곡으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 커다란 주목이 눈에 띈다. 왼쪽 텐트 너머로 돌풍이 일으킨 눈보라가 보인다.
지역 주민들 말대로 두루뭉술 자체였다. 이따금씩 하얗게 휘감아 오르는 돌풍은 거대한 침묵의 바다를 깨우는 거센 파도와 같았다. 설산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에 그치지 않았다. 고요함과 위엄, 그리고 자연의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순백의 계단처럼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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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식으로 준비해 온 부라타치즈 샐러드 토스트. 빵과 재료들이밤새 얼어붙어 과일 빙수 같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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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식으로 준비해 온 부라타치즈 샐러드 토스트. 빵과 재료들이밤새 얼어붙어 과일 빙수 같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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