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하늘 아래 옛 백제인들이 쌓고 밟고 지켰던 성벽이 우직하게 남아 있다.
첫 번째 산행코스 _ 봉수산
봉황의 머리를 찾아서
깎아지른 듯 험준한 산세를 뽐내는 산이 있는가 하면 동네 뒷산처럼 아담하고 소박한 산이 있다. 충남 예산의 봉수산이 그렇다. 산세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봉황 봉鳳, 머리 수首 자를 쓴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문인 홍양호洪良浩가 1764년에 홍주 목사가 되었을 때 지은 시의 한 대목이다.
봉황새 머리 모양 산봉우리 鳳首之岑
금빛 털 휘날리는 듯한 냇물이 金馬之川
구불구불 서려서 원기를 불어 모으니 蟠蟺翕噓
수려한 기운 지녀 현인을 낳았네. 孕秀產賢
봉수산의 봉우리와 솨솨 흐르는 금마천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옛 지도에도 봉수산이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옛 지도를 검색해 봉수산을 찾았다. 뫼 산山 자를 길게 늘어뜨려 쓴 것처럼 표시하고 뾰족뾰족 성곽길까지 기록해 두었다. 무채색 옛 지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지도 두 장을 배낭에 챙겼다. 새벽 6시 30분, 봉수산으로 향했다. 부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렸다. 나는 봉황의 머리가 빼꼼 솟아 있을 것 같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봉황이 어떻게 생겼더라? 참새나 비둘기 따위의 새 모습만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봉황은 상상의 새이다.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한 새,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수탉의 닭벼슬처럼 뾰족뾰족한 모양일까?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다.
정상에서 0.2km 남짓 지나자 예당호가 훤히 굽어다 보였다.
달리는 중 차창 밖으로 가을이 펼쳐져 있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늦여름 들녘에는 벼가 익어 갔다. 오랜만의 국내 산행이라 마음이 들떴다. 금세 약속 장소인 의좋은 형제 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늦여름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혔다. 가을 마중을 나왔더니 오늘 손님도 여름인가보다. 저 멀리 일행들이 보였다. 오늘은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동호회 라온의 회원들과 함께 한다. 라온은 ‘즐거운’이란 순우리말이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즐거운 산행이 될 것만 같았다.
들머리는 비티고개다. 이 고개는 홍성과 예산을 넘나들던 옛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듯이 높다고 하여 날 비飛, 고개 치峙자를 쓴다. 우리는 각자 주차를 마치고 자동차 한 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날듯이 높다고? 실제로는 너무 낮아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인도 안쪽으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 차량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바로 옆 홍성추모공원으로 들머리를 옮겼다. 홍성추모공원에 도착해 주차하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약 15분, 500m 정도 임도를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비티고개에서 출발해도 이곳 갈림길에 이른다. 연화사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발길을 옮긴다. 갈림길 안내판에는 봉수산 정상까지 약 1.2km 거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우리는 임도를 지나 숲으로 들어섰다.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인지 등산로는 물기를 가득 머금어 질척거렸다. 나무와 바위, 돌 틈 사이로 짙은 이끼가 돋아 있었다. 나뭇잎도 여느 날과 달리 더 푸르게 느껴졌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졌다. 눅눅한 흙냄새가 싫지 않았다. 숨을 더 크게 들이쉬었다. 1km 남짓 둥그렇게 생긴 나무 계단을 치고 오르자 나뭇잎 사이로 얼핏 예당호가 보이는 듯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를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벤치 앞에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당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바라본 예당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다. 봉수산 정상에서는 되레 예당호를 조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봉황의 머리는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다시 궁금해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퍽 아쉬웠다.
여지도서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표기된 봉수산과 임존성.
벤치를 지나자 안내판이 길을 안내했다. 임도로부터 1.25km를 왔으며, 정상까지는 0.65km가 남았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했던 갈림길 안내판에서는 정상까지 1.2km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안내판에 새겨진 정보가 미덥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은 왼쪽으로는 예당호가, 오른쪽으로는 홍성의 시골 풍경이 조망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등산로 초입에서 미끈거렸던 흙길은 적당한 수분을 머금고 있다가 오후 햇살을 그대로 받았다. 땅을 디디는 느낌이 폭신했다. 발바닥이 아주 편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때 함께 걷던 이민영씨가 말했다.
“이런 길 좋아.”
나는 되물었다.
“어떤 길이오?”
“안 힘들고 폭신폭신하고 시원한 길!”
때마침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산행에 지친 일행들을 응원하기 위해 쉼 없이 재잘거렸다. 그녀의 응원 덕분인지 정상까지의 길은 완만했다. 곧 봉수산자연휴양림에서 올라와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0.1km. 길목에는 밤나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 몇 걸음을 더 걷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석은 아담했지만 정상 일대는 아주 넓었다. 벤치 하나가 정상석과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포문화숲길 리본을 따라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갔다. 며칠 전에 잔디를 깎은 듯 풀냄새가 폴폴 났다.
백제의 혼이 담긴 성곽길 임존성을 걷다
이제 정상을 지나 백제 부흥 운동군의 최후 격전지로 알려진 임존성을 만날 시간이다. 정상에서 임존성 방면을 바라보니 한낮 하늘이 더욱 푸르렀다. 정상에서 200m 남짓 걸으면 멀끔한 안내판과 낡은 안내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내포문화숲길 백제 부흥군길’ 안내판에는 3코스라고 적혀 있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묘순이 바위, 남문지, 북문지를 지나 다시 원점으로 약 2.5km 거리를 돌아볼 수 있다. 임존성은 백제가 도성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에 쌓은 거점 성으로 조선시대까지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 옛 백제인들이 쌓고 밟고 지켰던 성벽이 우직하게 남아 있었다. 안내판을 확인하고 힘차게 걸음을 뗐다. 앞서 걷던 김형규씨가 소리쳤다.
“사슴벌레다!”
뒤따르던 유영환씨도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사슴벌레라니! 신기하다. 근데 죽었어. 너무 더워서 쓰러졌나?”
길에는 알밤이 툭툭 떨어져 있었다.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어 밤을 깐다.
우리는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봉수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마주친 동물이나 곤충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말했다.
“개구리!”, “뱀!”, “매미”, “아! 매미 껍질도 봤다!”, “방아깨비”, “귀뚜라미”, “엄청나게 큰 여치!”, “나비”, “거미”, “개미”, “아, 빨간 개미도!”
멀리서 들으면 마치 단체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내포문화숲길 리본을 따라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갔다. 며칠 전에 잔디를 깎은 듯 풀냄새가 폴폴 났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묘순이 바위 갈림길에 도착했다.
바위 앞에는 묘순이 바위에 대한 정보가 담긴 낡은 안내판이 있었다. 글자가 보이지 않아 읽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산행을 마치고 그 이야기가 내심 궁금해 나중에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옛날에 힘이 센 쌍둥이 남매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쌍둥이 장사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시합했다고 한다. 누이인 묘순이는 성을 쌓고, 남동생은 천릿길인 한양에 다녀오는 시합이었다. 두 남매의 어머니는 남동생이 시합에서 이기게 하려고 묘순이가 좋아하는 종콩(메주콩)밥을 해서 먹이기로 하고, 그 사이에 남동생이 성 가까이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본 묘순이가 마지막 바위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그 바위에 깔려 죽었다는 전설이라고 한다. ‘터무니없는 내용인데 괜히 찾아봤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처구니없었지만 우리네 전설이 대체로 그렇다. 묘순이 이야기는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묘순이 바위 갈림길에는 임존성을 마저 돌고 봉수산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코스와 홍성군 마사리 방면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다. 우리는 마사리 코스를 선택했다. 이 코스는 자갈길과 임도, 숲길이 반복됐다. 큰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었다.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웠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마사리마을을 지나 봉암에 다다랐다. 천지간에 모두 밤나무였다. 길에는 밤송이가 터져 알밤이 툭툭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이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까대거나 제법 괜찮은 알밤을 주워 호주머니에 몇 알 넣었다.
홍성 방면에서 봉수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여럿 있었다. 월암리 코스와 봉암마을 코스, 봉서마을 코스가 그것이다. 월암리와 봉암마을에서 오르는 코스는 초입이 제법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등고선을 대강 살펴보니 고도 300m를 거침없이 치고 오르는 길이다. 마지막 봉서마을 코스는 안내판만 버젓이 서 있고 등산로는 초입부터 엉망이었다.
8km 남짓 지나자 우리는 묵언수행을 하듯이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걸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지만 고요한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았다. 나도 걷기에 집중했다. 아스팔트조차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운 듯했다. 그러다 유영환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가을 다가오니, 정말 운동 좀 해야겠다. 힘드네.”
이민영씨가 웃으며 답했다.
“평소에 운동해도 산행할 때 힘든 건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모두 함께 웃었다. 말문이 터지자 저마다 여름휴가 때 다녀온 산행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산행을 시작했던 들머리에 도착했다. 이날의 산행이 끝났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랑 사부작사부작 걷고 싶을 때 봉수산 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오늘 너무 덥기도 하고, 코스가 조금 지루하긴 했죠?”
이민영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혼자 왔으면 지루했겠죠. 그런데 우리는 같이 왔잖아요.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전세 산행! 너무 재밌었는걸요?”
유영환씨도 말했다.
“저는 조용하고 한적해서 좋았어요. 삼삼오오 이야기 나누면서 걷는 산행을 좋아하거든요.”
이에 질세라 김형규씨도 거들었다.
“유명한 곳에 가서 사람에 치이는 것보다 조용하고 유유자적한 산행이 최고예요. 봉수산이 그랬어요.”
산행길잡이
봉수산 산행은 홍성추모공원 추모공원 4주차장(홍성군 금마로516번길 91)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등산로 안내 팻말은 볼 수 없다. 주차장에서 나와 왼쪽 오르막길로 가야 한다. 0.2km 남짓 오르면 연화사를 지나오는 길과 봉수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만난다. 이곳에 등산로 안내 팻말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등산로 이정표를 잘 따라가면 정상까지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길 찾기가 어렵지 않고 안내판과 등산로 리본도 제법 잘 갖추어져 있다. 조망처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마련된 벤치 옆, 그리고 임존산성 일대다. 하산 코스는 홍성군 마사리 방면이다. 약 5km 거리의 숲길, 임도 및 자갈길을 걸어 원점회귀할 수 있다.
이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봉수산 산행코스는 봉수산자연휴양림(예산군 임존성길 153)을 이용하는 것이다. 등산객을 위한 주차장이 초입에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1코스부터 5코스까지 나뉘어 있다. 3코스로 올라 정상과 임존성을 둘러보고, 5코스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디로 오르더라도 정상을 지나 임존성 성곽길 일대를 반드시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교통
예산역과 예산종합버스터미널이 있지만, 배차 간격이 길고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시내버스 300, 314를 타고 다시 20~40개 정류장을 이동해야 한다. 게다가 봉수산자연휴양림은 군의 도심에서 꽤 멀다. 가장 편리한 방법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봉수산자연휴양림 주차장은 매우 넓고 쾌적한 공용화장실도 갖추어져 있다. 비티고개 방면에서 오르고 싶다면 홍성추모공원 주차장을 이용해도 좋다. 이곳 역시 무료이고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연화사 방면의 임도에도 1~2대 정도 주차가 가능하지만, 현재 일대에 공사가 진행 중이라 권장하지 않는다.
맛집
예산 하면 백종원 국밥거리가 있는 예산시장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봉수산 산행을 마치고 예산시장까지 가기에는 다소 거리가 멀다. 봉수산 바로 아래 쭈꾸미 직화로 유명한 페이보리스원 오장동함흥냉면이 유명하고, 이밖에 한우로 유명한 광시면에서 뜨끈한 갈비탕 한 그릇을 해도 좋다. 봉수산에서 예당관광지 방면으로 가다 보면 도로변에 소문난 맛집들이 여럿 있다. 예당소쿠리밥상(예산군 대흥면 예당로 965)의 소쿠리보리밥정식, 삼거리식당(대흥면 예당로 1009)의 콩국수와 바지락칼국수, 정자식당 (응봉면 예당관광로 71)의 어죽 등이 유명하다.
예당호에는 좌대 낚시터가 둥둥 떠 있었다.
두 번째 산행코스 _ 예산 느린호수길
느리게 걸어도 괜찮은 길
이튿날 아침, 우리는 예당호 출렁다리를 지나 느리게 걷는 호수 산책에 나섰다. 의좋은 형제 마을 앞 중앙생태공원에서 출발해 예당호 출렁다리까지 데크로드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중앙생태공원은 넓은 주차장과 쾌적한 공중화장실이 갖추어져 있다. 데크 앞에 연꽃 몇 송이가 피어 눈길을 끌었다. 데크에 올라 그 광경을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멀리서나마 연꽃 감상을 마치고 발길을 돌렸다.
예당호 느린호수길은 편도 약 5km, 왕복 10km 길이로 비교적 짧지 않은 코스이다. 저마다 가볍게 준비운동을 한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는 예당호의 아침 안개가 걷히는 광경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예산의 시골 마을 풍경이 정겹게 펼쳐졌다. 이 코스는 출렁다리와 중앙생태공원 그 어느 쪽에서부터 시작하든지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다.
예산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는 느린호수길을 왕복하면 ‘하루 2만 보 걷기’를 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건강과 활력도 되찾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건강과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문득 근래 들어 부쩍 야윈 아버지가 생각났다. 조금 더 선선한 바람이 불면 아버지와 손잡고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km 남짓 걷자 데크 위에 그늘과 벤치가 놓여 있었다. 들판에는 가을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벼도 익고 우리도 익는 듯했다. 길은 누런 들판을 끼고 걷다가 국도 옆 인도와 다시 합쳐지기도 했다. 1km 남짓 더 걷자 도접교에 도착했다. ‘원홍장 둘레길’이란 안내판이 보였다. 이곳은 느린호수길이 아니었던가. 원홍장 둘레길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다.
‘느려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아.’
예산군 대흥마을은 2009년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슬로시티(치타슬로Cittaslow)로 지정된 마을이다. 원홍장 둘레길은 대흥역에서 출발하는 총길이 약 10km의 산책길로 인근의 느린 꼬부랑길, 봉수산 무장애 숲길, 예당호의 느린호수길과 마을 논길과 들길을 연계해 만든 길이었다. 대흥 지역에서 추구하는 ‘더 느린 여행’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걷는 자들의 천국이었다. 이리 봐도 호수길, 저리 봐도 둘레길이라니!
한 시간 남짓 걷자 간이화장실과 베이커리 카페, 펜션 등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도로가 나왔다. 데크길은 한동안 도로와 나란히 이어졌다. 꾸불꾸불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들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이민영씨와 류소라씨에게 물었다.
“느린호수길!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느려서 좋은 점이 있으려나.”
류소라씨가 답했다.
들판에는 가을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벼도 익고 우리도 익는 듯했다.
“현대 사회, 특히 한국에서는 늘 ‘빠르게 빠르게!’ 살아가잖아요. 느린호수길을 걸으니까 누군가 ‘느려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천천히 걸어도 되겠다, 천천히 걸어도 좋네’라고 느껴져요.”
예당호에는 좌대 낚시터가 둥둥 떠 있었다. 데크에서 가장 가까운 좌대 낚시터에는 앳된 얼굴 남학생들이 모여 한창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집중했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한 친구의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고기를 건져올릴 듯했다. 낚싯대를 쥔 친구는 조심스럽게 왼손을 휘저어 줄을 끌어당겼다. 걷다가 월척을 낚는 순간을 만나다니! 복권을 사야 할까? 하지만 낚싯줄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왁자지껄 한바탕 웃으며 무어라 소리쳤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저 웃음이 아니었을까. 아니,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꺼내 볼 추억이 아닐까? 데크길에서 좌대의 낚시꾼들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찔한 출렁다리
걸으면 걸을수록 예산은 정겨웠다. 3km 지점을 지나자 멀리 예당호 수문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국도를 따라 예당호의 소문난 어죽 맛집이 줄지어 있었다. 예당낚시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시계 진동이 울렸다. ‘4km 지점입니다.’ 이곳부터는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났다.
다리의 모양은 황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호수 위를 나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예당호는 예산과 당진 두 마을의 넓은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그 크기가 둘레 40km, 동서 2km, 남북 8km에 달한다. 데크를 걷는 동안 그늘이 없어 가을 햇볕을 그대로 맞았다. 우리는 모두 갈증이 났다. 충효정忠孝亭에 앉아 한가로운 정취를 느끼고 싶었지만 쌩하니 지나쳤다. 으름터널을 지나자 소나무 세상이 펼쳐졌다. 데크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그늘로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잠시 가려졌던 예당호 수문이 다시 보였다. 파란 하늘과 짙은 녹색의 예당호, 그 사이에 다섯 개의 수문이 뾰족하니 솟아 있었다.
길 반대편에서 형형색색의 양산을 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당호는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했던 현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숲길은 모노레일 길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빨간색 모노레일이 소나무 사이를 가로지른다. 역시나 사람들이 칸마다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더 빠르게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길의 반대편에서 형형색색의 양산을 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숲을 지나자 거대한 출렁다리가 다시 나타났다. 아찔해 보였다. 그 길이가 무려 402m다. 가운데에는 주탑이 우뚝 자리 잡고 있고, 양옆으로 케이블이 줄을 서듯 펼쳐져 있었다. 다리의 모양은 황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호수 위를 나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주탑에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예당호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장아장 막 걸음을 뗀 아이도 아빠의 두 손을 잡고 출렁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천천히 걸으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 출렁다리 끝에는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들과 편의점, 공중화장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봉수산자연꿀 상점 앞을 어슬렁거렸다. 느린호수길은 예당호 수문까지 이어지지만, 모두 출출하던 판이라 이곳에서 오늘의 산책을 마치기로 했다. 실제로 수문까지는 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출렁다리에서부터 중앙생태공원까지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당호 출렁다리의 하이라이트는 LED 불빛을 이용한 음악분수 공연이라고 한다. 2020년 4월부터 가동한 음악분수는 최대 분사 높이가 한가운데 위치한 주탑보다 높아, 호수에 설치된 가장 넓은 음악분수로 기록되어 있다. 감미로운 음악과 다채로운 빛과 색을 연출하는 공연이라니! 일단 빛과 음악보다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출렁다리는 산책하듯 가볍게 거닐 수 있고, 야경 명소로도 유명하다. 여행과 등산을 모두 만끽하고 싶다면 다가오는 가을, 예산으로 떠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소나무 숲길 사이로 난 데크가 정취가 있었다. 숲 사이로 예당호 모노레일이 지나간다.
산행길잡이
예당관광지(예당관광로 148)와 예당호 중앙생태공원(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203-2)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좋다. 들머리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출렁다리를 먼저 보는 것이 좋겠고, 왕복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출렁다리에서 시작해 걷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좋다. 5km 남짓 데크로 이어진 코스로, 길을 헤매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다만, 코스 중에 쉼터가 종종 마련되어 있지만 모자와 양산, 선크림 등을 준비하면 좋다. 또 휴지통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개인 쓰레기는 챙겨 가져와야 한다. 운행 중 마실 식수를 준비해 걷는 것을 추천한다.
교통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예당관광지뿐만 아니라 인근의 봉수산, 임존성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예당관광지에는 여러 개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주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예당관광지에는 국민여가캠핑장(예당관광로 123)이 마련되어 있고, 봉수산에는 자연휴양림(임존성길 153)이 갖추어져 있어 예산 캠핑 여행을 준비해도 좋겠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예산 구석구석을 만끽할 수 있다.
맛집(지역번호 041)
한믈좌대식당(예산군 응봉면 예당관광로 226)의 매운탕이 유명하다. 매운탕이 먹고 싶다면 한믈좌대식당, 어죽을 맛보고 싶다면 위 코스에서 말한 정자식당을 추천한다.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곳은 돈가스가 맛있는 예촌사랑(응봉면 예당관광로 205)이다. 호숫가에서 익숙히 먹는 매운탕과 어죽이 취향이 아니라면 돈가스를 추천한다. 바삭한 튀김과 푸짐한 한 상이 마음에 쏙 들 것이다.
이밖에 관광지 주변에 전망 좋은 카페가 즐비하다. 예당전망대카페(응봉면 예당관광로 180)는 출렁다리의 음악분수 공연을 맞은편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제2주차장 앞에 있는 오붓이(예당관광로 100)에서는 조각공원 앞에 펼쳐진 소나무 숲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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