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제주의 장면들이 있다. 바다와 빛, 돌, 꽃, 구름 등 본디 타고난 것도, 인간이 빌려 쓴 무언가도 섬을 추억하게 한다.
#1
방파제와 노을
해가 지는 곳에 바다가 있으면? 그곳이 여행지다. 이호테우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쭉 내려오면서 수없이 많은 공짜 전망대를 만난다. 애월읍에서도, 한림읍에서도, 고산리에서도 잊히지 않는 일몰을 마주한다. 문득 어느 지점까지 일몰의 영향권인지 궁금했다.
7시 방면에 있는 대정읍 모슬포로 무작정 향했다. ‘낭만적인 경치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느낌, 비논리적인 접근법이나 여행이니까 괜찮다. 무엇 하나 없다고 하더라도 근처에서 방어회를 먹으면 되니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하모체육공원 버스정류장에 내려 주황빛을 쫓아갔다. 어업인들의 공간을 통과하고 나니 지도 앱에 아무 정보도 없는 바다가 나오고, 왼편으로는 모슬포 방파제가 보인다.
10분, 아니 5분 정도 지났을까. 길을 알려준 주황색은 사라지고, 보랏빛이 고개를 든다. 깊은 곳에서 탄성이 올라온다. 일과를 마치고 항구로 돌아오는 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네, 색의 그러데이션, 은은한 파도 소리, 약간 서늘한 바닷바람, 이 모든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단 한 발자국을 뗐다.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현무암 위로 올라서니 비로소 제주도의 풍경이 완성됐다.
#2
돌과 꽃, 그리고 바다
여행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계획은 엉성해진다. 분 단위로 쪼갠 엑셀 일정표, 지도 앱을 활용하는 단계를 지나 머릿속에 가고 싶은 곳 1~2곳만 저장한다. 대신 지금껏 수많은 여정을 통해 키운 직관을 활용해 주옥같은 공간을 찾아낸다. 돌담길을 따라 걷거나, 달리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날 기온과 습도, 구름의 양, 하늘색 등을 고려한다. 이를테면 ‘오늘의 여행지’다.
조천읍의 메밀밭을 만난 날은 그랬다. 서귀포 숙소에서 나와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고, 오후 6시까지 공항만 가면 되는 하루. 애월읍과 안덕면을 거쳐 서귀포에 왔으니 제주시로 돌아갈 땐 반대방향으로 올라가야겠다는 단순한 구상으로 움직였다. 탁 트인 바다와 한라산 뷰, 작은 항구가 있는 위미항, 송당동화마을에 있는 스타벅스(국내 최대 규모의 리저브 매장)에 잠시 들렀다가 우연히 메밀밭을 찾았다. 휑한 도로변에 ‘와흘메밀마을’ 체험힐링센터라는 표지판만 우두커니 서 있으니 그냥 지나치는 게 더 힘들었다.
메밀밭의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화사했다.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 메밀밭은 초록색 나무들과 어우러져 감미롭게 다가왔고, 메밀밭을 보호하기 위해 얕게 쌓은 돌담도 제주다웠다. 또 흙길에서 느낄 수 있는 발끝의 촉감과 소리도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부끄럽게도 메밀꽃은 10월에 피는 걸로 알았는데, 5~6월에도 활짝 고개를 내민다고 한다. 1년에 2번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음식 재료(센터에서 메밀전·메밀국수 등 간단한 음식도 판매)로도 활용되는 메밀, 쓰임새가 자못 알차다.
또 돌과 관련된 여행지 중에서 법환동도 빠트릴 수 없다. 범섬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동네로, 돌과 바다,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게다가 뒷배경으로는 한라산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해녀체험센터 앞으로 현무암을 양옆에 둔 길이 있는데, 취향에 맞는지 서귀포를 지날 때마다 생각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바다와 범섬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거친 파도가 치는 날이면 바닷물이 쉽게 돌길까지 범람할 정도로 바다와 가깝다. 또 현무암이 만든 웅덩이에서 노니는 귀여운 물고기, 바다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낚시꾼들도 프레임을 채운다.
#3-1
섬이 내어 주고, 인간이 빚다
우리는 섬이 내어 준 소중한 자연을 멋지게 활용하고 있다. 제주의 쉼터들도 마찬가지. 탁 트인 바다를 품고 싶으면 호화로운 호텔로, 로컬의 일상에 다가가려면 공유 숙박으로 향하면 된다. 그리고 지난해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범섬과 제주올레 7코스를 앞에 둔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 스파다. 한국적이면서도 제주스러운 감각적인 공간이다. 자칫 촌스럽거나 유치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인데, 모든 걸 근사하게 소화했다. 몰디브와 푸에르토리코 도라도, 코사무이, 푸꾸옥 등 세계 유명 휴양지의 럭셔리 호텔을 디자인한 빌 벤슬리(Bill Bensley)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JW 메리어트 제주의 수영장. 바다와 하나가 된 기분이다
제주 유채꽃에서 영감을 받아 노란색을 주요 색감으로 활용했고, 여기에 제주의 화산 지형을 표현하기 위해 회색과 검은색도 섞었다. 이 색깔들은 제주의 밭담에 녹여 냈고, 객실을 비롯해 호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비는 대들보와 대청, 주춧돌 등 한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았고, 제주의 상징과도 같은 감귤나무를 중앙에 배치했다. 또 한국 전통의 미가 깃든 찻상과 그윽한 향기의 차, 달콤한 다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유채와 귤의 빛깔이 녹아든 객실에서는 제주의 남쪽 바다와 범섬, 수영장이 보인다. 편안한 침구와 널찍한 욕조는 덤이다.
제주에서의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편안한 침실
제주의 논, 색감을 담은 객실
유채꽃의 노란색, 화강암의 회색을 호텔 곳곳에 녹여 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도 제주를 놓치지 않았다. 조식은 코스와 반상을 적절히 섞었다. 전채로 주상절리 크루아상, 샐러드, 요거트가 준비되고, 제주 흑돼지의 풍미로 채운 맑은 국물의 도새기 국밥, 올레시장 전복죽, 제주 반상 등에서 한 가지를 고를 수 있다. 물론 JW 에그 로얄(스크램블+스테이크+로브스터) 같은 양식 메뉴도 있다. 점심과 저녁 식사도 3곳(아일랜드키친·플라잉호그·여우물)의 레스토랑과 인룸다이닝으로 제주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한옥을 닮은 로비
그리운 황우지해안의 풍경. 낙석 사고 위험으로 작년 7월 폐쇄됐다
즉, 무언갈 계획해 밖에서 시간을 채우거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저 호텔과 주변을 거닐고, 객실에서 빈둥거리고, 식사하는 것만으로도 이 섬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며칠을 머물러도 떠날 때면 아쉽고, 제주가 가장 예쁜 4~5월이 되면 더욱더 가고픈 곱디고운 집이다.
호텔 루프톱에서 본 범섬
#3-2
조용한 유혹 ‘범섬’
서귀포 바다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무인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 같아 호도(虎島)라고도 불렸고, 희귀한 식물과 해식 쌍굴 등 신비로운 것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보게 된다. 범섬의 조용한 유혹, 쉬이 뿌리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고고한 자태의 외돌개
#3-3
바다에 핀 돌꽃 ‘외돌개’
제주올레 7코스는 올레길 27개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외돌개는 7코스의 얼굴이다. 약 20m 높이의 돌기둥은 제주의 푸른 바다에 핀 꽃 같다. 주변 해식동굴과 어우러져 잊히지 않는 경치를 선물한다.
★오늘의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