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을 축하하는 다양한 현수막을 준비해 갔다.
‘정읍 일대는 겨울철 적설량이 상당하다. 등산의 깊은 맛을 아는 이들이 찾는 산이 내장산이다.’
월간 산 2월호를 읽다 한 구절에 눈길이 갔다. 다음 산행지를 고민하던 나는 이 기사를 읽고 곧장 내장산 산행을 준비했다. 겨울 내장산은 익숙지 않았다. 단풍 아닌 눈 덮인 모습은 상상이 안 됐다. 전주 경기전에서 정읍 내장산 용굴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옮겼다는 이안길도 궁금했다. 당장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새벽 6시 40분 수서역을 떠난 SRT 고속열차는 어둠을 뚫고 정읍으로 향한다. 하늘엔 구름이 잔뜩 껴있다. 강원도는 폭설로 산행이 통제되는 곳이 많다고 했는데, 내장산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된다. 국립공원 사무소에 전화해 보니 내장산은 눈이 아닌 비가 왔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오전 8시 20분에 정읍에 도착한 나는 택시를 타고 곧장 내장산으로 향한다. 내장사부터 본격적인 조선왕조실록길이 시작된다.
실록 1교를 지나니 금선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 소리가 산객을 반겨준다. 크지 않은 정겨운 개울에 오히려 정감이 간다.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주인 없는 매점 앞엔 조선왕조실록을 옮기는 모형물도 전시되어 있다. 조금씩 내리는 빗소리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내장산의 아기자기한 산세가 산객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싼다. 실록 6교를 지나니 까치봉과 신성봉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까치봉까지 거리는 1.2km. 짧은 거리이지만 가파른 계단이 아득해 보인다.
국립공원답게 잘 정비된 통나무 계단길이다. 배낭과 고어텍스 바람막이가 비에 젖어 우비로 갈아입는다. 배낭 커버도 씌우고 손질해 온 과일로 배를 채운 뒤 까치봉을 향해 오른다. 단풍나무, 참나무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진다. 가을 단풍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갈 정도다.
가파른 된비알에 숨이 거칠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비가 눈으로 변한다. 조릿대 잎은 하얀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있다. 능선 오르는 길 위에는 다행히 눈이 없다. 대신 단풍나무, 소나무, 참나무 가지에는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다.
안전 쉼터가 보인다. 우비를 챙겨 넣고 이온음료와 행동식을 먹으며 까치봉까지 남은 0.3km를 오른다. 거친 바위 위에 까치봉 안내판이 보이는데, 막상 까치봉 주위엔 운무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신선봉 방향 이정표를 따라 능선길로 들어선다. 산안개 때문에 잠시 방향감각을 잃기도 한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추락방지용 쇠파이프가 보인다. 제대로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쇠파이프를 잡고 조심조심 날카로운 바위 능선을 오른다. 곧 편안한 오솔길이 나를 반긴다.
스산한 바람이 눈 덮인 나무 사이로 불어온다. 한기도 함께 몰려온다. 가방에서 꺼낸 핫팩을 흔들어 데우고 있는데, 얼핏 안내판이 눈에 든다. 내장산 최고봉인 ‘신선봉’을 알리는 표시다. 시간은 11시 50분. 까치봉에서 신선봉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적막감이 감도는 신선봉. 아무도 없다. 정상 인증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 찍기가 어려워 바닥에 놓고 사진을 찍는다. 이번에는 동기들을 응원하고, 기쁜 소식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준비해 왔다. 사진 찍는 내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신선봉 삼거리의 벤치의 눈을 치우고 앉아 간식으로 챙겨온 빵을 먹는다. 무릎이 약간 시큰거려 스프레이 파스도 뿌린다. 금선계곡 쪽으로 하산하는데, 넓적한 바위를 잘 정비해 둬 하산길이 편안하다. 초록이끼와 고사리류가 봄이 왔음을 알리듯 연둣빛으로 변해 있다.
개울물 소리가 점점 커진다. 용굴암 오르는 갈림길이다. 100여 m 나무데크길을 오르니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용굴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앞은 대나무로 가려 있어 밖에서는 이런 곳이 있는지 모를 듯하다. 실록과 어진을 어떻게 이리 험한 곳까지 옮겼을지… 과거 선인의 희생과 헌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내장사에 들어선다. 무늬 서향나무에는 벌써 꽃이 피어 있다. 관음전 앞에서 관세음보살님께 아픈 동기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정읍역으로 이동한다.
이번 산행은 조선왕조실록 이안의 경험을 마음으로 함께한 뜻깊은 산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것이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간다”는 역사학자 조병희 선생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제 100대 명산을 오르기까지 5개산밖에 남지 않았다. “다닐 수 있을 때 다니라”고 하신 93세 아버지의 말씀대로 건강하게 오래도록 산에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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