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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독자산행기] 초보 산꾼 4,095m 오르다

by 白馬 2024. 4. 1.

최미나 서울 강서구 마곡중앙로

 

키나발루산 정상에서의 필자.

 
 

나는 완전한 등산 초보. 본격적인 등산 경력은 4개월밖에 안 된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월출산에 몇 번 가본 것, 대학생 때 2박3일간 지리산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내 산행 기록은 공백에 가깝다.

작년 10월, 우연한 계기로 산악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10km 이상의 산행을 몇 번 했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내친김에 목표를 크게 잡았다. 곧장 말레이시아의 키나발루 산행을 계획했다. 과연 등산 초보인 내가 이런 엄청난 곳에 오를 수 있을까?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달려든 꼴이었지만 일단 밀어붙이기로 했다.

 

키나발루산Mt. Kinabalu은 말레이시아의 최고봉이다. 높이는 4,095m로 한라산의 두 배에 달한다. 자연의 파수꾼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이곳은 지역 원주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역 주민들이 죽기 전 한 번쯤은 이곳에 오르고 싶어하는 전통과 영성을 상징하는 산이라고 한다.

산행의 시작점은 높이 1,866m의 팀폰Thimphon 게이트다. 정상인 로우스피크Low’s Peak까지 왕복 17.4km 거리, 고도는 2,229m 높여야 한다. 매일 165명의 등산객만 입산할 수 있으며  반드시 현지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파리를 잡아먹는 식충식물 네펜데스.

 
 

2023년 12월 27일 

아침 9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 첫날은 팀폰게이트에서 약 6km 거리의 라반라타Laban Rata 산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날 함께 오른 전 세계 등산객들의 얼굴은 설렘과 걱정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 초입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동네산만 다녔던 친구도 문제없이 오를 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가이드는 고산병이 올 수도 있으니, 고도를 급하게 올리지 않고 천천히 가자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유유히 고도를 높였다.

짧은 숲길이 끝나고 너덜길이 나타났다. 난이도가 조금 높아졌다. 친구는 이 길을 보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등린이를 이런 데 끌고 오는 게 말이 돼?! 나는 글렀다. 먼저 가!”

그 엄살이 크게 와닿진 않았다. 친구는 툴툴대기만 했을 뿐, 여전히 잘 걷고 있었다. 우리 옆으로 파리를 잡아먹는 네펜데스Nepenthes 같은 이색적인 식물들이 많이 보였다. 처음 본 생명체는 무척 신기했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한참을 구경했다.

 

숲길 지나고 만난 너덜길.

 
 

가이드는 산행 전 “키나발루산에는 4계절이 한 번에 있다”고 말했다. 산을 오르다 보니 그의 말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분명 입구는 여름이었는데, 절반쯤 오르니 날씨가 선선해졌다. 운무에 잠긴 산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이곳의 산신령이 나타날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이었다.

고도를 높일수록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표정도 점점 일그러졌다. 하산하는 이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 같이 “행운을 빌어!”, “조금만 힘내. 곧 도착해!”라고 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믿고 싶은 선의의 거짓말. 그 거짓말이 상당한 힘이 됐다. 너무 힘이 들어 중간에 몇 번 주저앉았지만, 이름 모르는 등산객들의 격려 덕분에 목적지를 향해 올라갈 힘이 생겼다.

오후 2시 반, 드디어 라반라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며 “이제 푹 쉬면서 컨디션 관리를 하라”고 했다. 산악회에서는 매일 꼴찌 담당이었는데, 키나발루산에서는 실력 발휘를 한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갑자기 고산병 증세가 찾아왔다. 나는 샤워도 못 하고 패딩과 털모자로 온몸을 두른 채 곧바로 잠에 들었다.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세인트존스 피크와 필자

 

2023년 12월 28일

새벽 1시 30분. 등산객들이 배낭 챙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다행히 생각보다 잘 잤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 정상에 오를 준비를 하는데, 어딘가 익숙하고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한 테이블 건너 우리나라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이 아침으로 컵 누룽지를 드시고 계셨다. 말레이시아에서 누룽지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룽지가 꽤 맛있어 보였다. 그들에게 조금만 나눠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친구가 적극적으로 말리는 바람에 간신히 참았다.

 

산행이 시작되자 사그라들었던 두통이 몰려왔다. 손발도 꽤 저리기 시작했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끝없이 올라갔다.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과연 정상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친구 역시 “여기가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이야!”라며 힘들어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1시간쯤 지나자 다행히 숨이 트였다.

 

계단 이후에는 로프를 잡고 바위를 오르는 구간이 나왔다. 밑창이 얇은 러닝화를 신고 온 사람들이 바위에서 몇 번씩이나 미끄러졌다. 이곳부터 정상까지 고도 약 850m를 2.7km 거리 만에 올려야 했다. 상당히 가팔랐다. 다행히 우리는 리지화를 챙겨온 덕분에 바위에 붙어 성큼성큼 올라갈 수 있었다.

서서히 동이 텄다.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나발루산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히 들어왔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바위에 조그맣게 서 있는 개미 같았다. 거대한 사우스피크South Peak, 세인트존스 피크St.John’s Peak가 주황빛으로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일출 빛에 물드는 봉우리가 좋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하산길은 된비탈이었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정상에 올랐다. 하얀 구름이 우리 발아래 있었다. 이국적이다 못해 압도적이고 특별한 광경이었다. ‘만약 화성에 간다면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올라온 길은 굉장한 비탈길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올랐기에 겁먹지 않고 이 험한 길을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상에서의 풍광을 즐기고 서둘러 산장으로 하산했다. 숨 돌릴 틈 없이 급하게 짐을 싸서 하산했다. 우리가 잠시 빌렸던 공간을 다음 등산객에게 흔적 없이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키나발루산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루한 하산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끝은 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산행증명서를 받았다. 이로써 등산 초보의 도전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산과 사람이 좋아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행을 이끌어주셨던 산행 대장님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묵묵히 바위를 오르는 개미들처럼 나 또한 앞으로도 묵묵히 산을 오르며 산이 주는 온전한 기쁨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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