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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남난희의 느린 산 지리산 둘레길 ] 오미슈퍼, 천막식당, 한울농장...아직도 곁에 있어 고맙습니다

by 白馬 2024. 1. 26.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에서 오미슈퍼를 운영하는 김순남(79) 할머니.

 

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장거리 트레일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4,285km)을 마무리했다. 1년에 한 달씩 걸어서 5년이 걸렸다. 끝내고 나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내 땅을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땅에도 무수히 많은 길들이 있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기로 하니 당연히 지리산둘레길이 먼저 선택되었다. 지리산둘레길은 3개 도(경남, 전남, 전북) 5개시·군(하동, 구례, 남원, 함양, 산청), 21개 읍·면, 120여 개의 마을을 잇는 285km 장거리 도보 순례길이다. 지리산 주변의 마을길, 농로길, 강변길, 고갯길, 숲길, 산길로 이어져 있다.

사실 나는 지리산둘레길을 3번 걸었었다. 한 번은 지리산 학교 숲길걷기반 수업으로 1년에 걸쳐서 한 바퀴 돌았고, 두 번째 법무부 보호관찰 청소년과 한 바퀴 돌았고, 나머지는 옥스팜 트레일 워커 훈련차 하루에 3~4개 구간씩 신바람 나게 걸었다.

그때마다 좋았다. 그러나 내가 맡고 있던 책임 때문에 항상 앞장서서 리드해야 했다. 너무 비장했거나, 너무 사명감에 눌리거나, 너무 조급했다. 이제 혼자 느긋이, 조용히, 천천히, 내 땅을 어루만지듯 사유하며 걸을 것이다. 그래서 떠났고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다.

 

나는 혼자 걸으며 ‘지리산둘레길이 이렇게 좋았었나?’라고 새삼 느꼈다. 항상 산, 즉 백두대간 같은 오르내림이 있는 곳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둘레길도 충분히 좋았다.

숲 사이로 반짝이는 섬진강의 윤설, 예전에는 천수답이었을 물기가 있는 곳의 멧돼지 목욕 터, 이제는 나무들 고향이 되어버린 다랑이 조각 밭, 길게 뻗은 낙엽 깔린 오솔길, 조그만 웅덩이에 비친 파란 하늘, 하늘을 향해 서로 키 재기 하는 나목들, 후다닥 지나가는 산 짐승, 아주 가끔 만나는 순박한 노인.

내 성향 상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혼자 걸으니 느긋하게 걷는 듯해도 길이 헤프다. 하루에 2구간씩 진행하는 것도 무리는 없겠다.

 

작지만 없는 것 없는 오미슈퍼.

 

천연기념물 된 구멍가게, 오미슈퍼

요즘은 모두 자가용이 있는 시대이고 조금만 움직이면 마트가 있다. 마트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물건을 쌓아놓고 곳곳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옛날 구멍가게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구례 오미에는 아직도 무슨 기념물처럼 구멍가게가 남아 있다.

지나갈 때마다 들러서 아이스크림이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쉬었던 곳이다. 오미 슈퍼 김순남(79) 할머니는 한숨 섞인 푸념을 나그네에게 고해바치듯 하신다. 물건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기름 값도 안 나온다고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본인이 버스로 구례에 나가서 과자 조금, 라면 조금, 기타 등등 조금씩 사서 택시를 타고 와야 한다는 것. 겨우 구색만 갖추는 데도 장사는 안 된다고 한다. 내가 괜히 송구해진다.

 

기름 값도 안 나온다고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할머니가 직접 구례 읍내에 나가 제품을 조금씩 사와서 채운다.

 

길을 걷다가 배고프고 목마를 때, 곳곳에 이런 가게가 있다면 걷는 사람들에게는 샘물을 만난 것만큼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이 가게마저도 곧 사라질 것 같다. 동네 노인들은 돌아가셨거나 요양원으로 가버렸고, 아이들은 아예 없고 “둘레객도 예전처럼 오지 않는다”며 쓸쓸한 표정이다.

첫날은 2개 구간을 조금 넘게 걸었다. 하사마을의 친구 지우집에서 하루 묵어 가기로 한다. 마침 가는 날이 농사지은 쌀 도정해 온 날이다. 보석 같은 햅쌀밥을 포식한다. 하동과 구례는 바로 이웃해 있지만 날씨나 기온이 다소 차이가 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본 섬진강.

 

인심 좋은 감나무집, 한울농장

구례는 섬진강과 서시천이 있어서인지 항상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하다. 노고단 운해도 아마 그래서 유명할 것이다. 안개비가 날리는 숲에 접어든다. 숲은 안개비로 젖어 있고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시야가 좋지 않아 조망이 없다. 

숲길을 지나고, 마을길을 지나고, 감나무 밭을 지난다. 지천에 홍시가 떨어져 있다. 고픈 배를 채우지만 유감스럽게도 감을 1개 이상 못 먹는다. 홍시는 배낭에 넣어 갈 수도 없어서 그림의 떡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감나무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과수원은 인심 좋기로 유명하다. 감 수확 철에는 길가에 홍시를 두고, ‘무료이니 맛있게 먹고 가라’는 친절한 글귀까지 써놓아 나그네를 감동시킨 적도 있다. 

 

둘레길에서 만난 추수하는 할머니.

 

지금은 그런 안내문은 없지만 여전히 인심이 좋다. 지나가는 내게 단감을 깎아 내오고, 홍시를 먹으라고 가져온다. 이미 오면서 주워 먹은 홍시 때문에 더는 먹을 수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울농장 주인은 그래도 뭔가 주고 싶어서 새참으로 싸온 지짐을 내온다. 혼자 걷는 내가 영 미덥지 못한지 혀를 찼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다가,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기다렸다가 인부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는다.

아침은 부실했고 점심도 먹지 못 할 것이 뻔했지만 이미 감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해서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뜬다. 아직은 시골 인심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다. 발걸음이 가볍다.

 

좁지만 소박한 맛이 있는 계단 길.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만나지 못한 둘레길의 묘미이다. 천천히 하지만 쉼 없이 산길을 걸었다. 농로를 지나고, 임도를 걷고, 마을을 지나 잔칫집을 만났다. 구례 예술인 마을 몬테에서 동네 국수 잔치가 열렸다.

맨발걷기 국민운동 본부 구례지회 발대식 예행연습으로 벌이는 잔치였다. 마침 서정수 지회장과 인연이 있어서 맛있는 국수 한 그릇 대접받았다. 한결 더 기분 좋은 발걸음이 되어 길 위에 선다.

아무리 평일이지만 이렇게 걷기 좋은 계절에 걷기 좋은 길인데 여행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긴 임도를 지나 온천이 있는 동네 구례 산동에 이른다. 산동에는 지인인 정영혁이 있는 곳으로 그는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며 노고단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와 오랜만에 만나 회포도 풀고 과한 대접을 받았다.

다음날 새벽 그와 함께 길을 나서 마을 어귀와 농로 길을 걷다가 헤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다.

 

지천으로 떨어진 감으로 요기를 했다.

 

전남에서 전북으로

좋은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가 되니 더 좋다. 혼자 걷는 길은 계절에 맞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산과 어울려 차분해지는 자신을 본다.

모든 것이 조용하다. 산도 산길도 조용하고 낙엽조차 조용히 떨어진다. 나는 그냥 조용히 걸을 뿐이다. 너무 조용히 내면으로 들어가서일까? 밤재에서 반야봉을 조망하는 것을 놓쳐버렸다. 조금 아쉽지만 다음에 와서 보기로 한다.

이제 전남에서 전북으로 넘어온 것이다. 며칠 만에 경남에서 출발한 나는 어느새 3개 도를 넘어섰다. 전북의 둘레길은 지리산둘레길이 시작된 곳이다. 길이 아름답고 길 주변에 먹을 것도 많아,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길이다. 

 

며칠을 걸어도 둘레길 순례객을 만날 수 없었다. 덕분에 휴식 같은 고요한 걷기가 가능했다.

 

지리산둘레길 1코스가 시작 되는 곳. 이 날은 만나기 어려운 도시라고 해야 하나? 읍 소재지를 2개나 지나가니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중간에 천막식당도 있고 둘레길에서는 드물게 음식 선택의 폭이 넓다. 구간마다 이 정도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어려운 희망이다.

둘레길이 생긴 초기에는 곳곳에 간이 천막이나 주막, 가게가 있었다. 소비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에게 전을 펼치라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천막식당은 시간이 일러 음식은 못 사먹고, 파전과 막걸리로 요기를 대신한다. 그래도 길 위에서 뭔가를 사 먹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운봉읍내를 통과하고, 인월로 간다. 농로를 하염없이 걷는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날씨가 잔뜩 흐렸다. <다음호에 계속>   

 

낙엽이 쌓인 지리산 자락의 맑은 계곡.

 

호수에 비친 윤슬. 지리산둘레길을 찾는 이는 확연히 줄었으나, 평화로운 지리산 자락의 자연미는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오늘의 날씨

* 오늘 하루도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