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바라본 낙동정맥의 산하, 멀리 동해가 보인다.
산길은 고부라져 휘뚤휘뚤 위로 나 있고 낙엽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바람은 쇄쇄 몰아쳐 분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맞으며 된비알을 오른다. 홍일점, 회잎나무만 빨간 잎을 달고 홀로 붉다. 이파리 모두 떠나보낸 빈 가지를 보니 비로소 나무의 몸매를 알 수 있겠다. 검정 빗살무늬 거세게 가로 새긴 산벚나무, 세로로 깊게 홈이 파인 굴참나무, 거북등처럼 갈라진 소나무, 껍데기 우둘투둘 어설픈 비목나무, 뱀 껍질을 닮은 서어나무, 무늬가 그물처럼 치밀한 상수리나무.
정오 무렵 고헌사를 두고 12시 20분, 집터가 있었는지 감나무 몇이 생강·때죽·쥐똥나무와 어울려 산다. 바람은 숨었지만 떨어진 이파리마다 우중충해서 곱지 못하다. 산등성으로 배낭을 자꾸 떠밀던 바람이 이곳에선 잠시 멎었다. 장풍국藏風局 지대다. 이마와 등에 땀이 흥건하다. 높은 데 오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하지만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바라는 요즘 세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땀과 동행하지 않는 길은 정상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기며 오른다. 높은 곳으로, 성공을 드리는 산. 그래서 고헌산高獻山(1,034m) 이다.
고헌산 정상에서 희망을 그리다.
참나무숲과 영남알프스
고헌산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언양의 진산으로 고원처럼 펼쳐진 정상의 능선에 돌탑이 세워져 있다. 마치 소가 누운 형상이라 와우산臥牛山으로, 높은 산을 뜻하는 ‘고언’이라 불리기도 했다. 낙동정맥이 분기된 영남알프스의 관문이다. 정상까지 가장 짧은 구간은 외항재와 소호령, 들머리 삼아 원점회귀한다. 이밖에 상북면 궁근정리 신기마을 고헌사와 두서면 차리마을 코스가 있는데, 가팔라서 하산 구간으로 많이 이용한다. 최근 지자체에서 영남알프스 완등 이벤트로 은화를 내걸면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쏟아질 듯 가파르게 치솟은 모습이다. 고헌사를 기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대략 5.6km, 3시간 정도 걸린다.
산길마다 바람이 닿은 곳에는 빗자루로 쓸어낸 듯 말끔하고 움푹 팬 자리마다 무더기로 낙엽이 쌓여 있어 자칫 헛디뎌 넘어지겠다. 바람은 저 혼자 소리 없는데 사람들은 나뭇잎 소리, 가지 흔드는 것을 바람 소리라고 한다. 삭풍에 귀가 시리지만 바람 불기 전에 드러눕지 못하고 쓸려가는 잎새들. 군데군데 걸려 흔들리다 산 아래로 풀풀 흩어진다. 나뭇잎에 얹혀 날리는 햇살이 눈 부시다.
산 중턱을 오를수록 나무들은 적당히 섞여 자란다. 굴참·신갈·산벚·서어·소나무. 침엽수와 활엽수가 고르게 분포되어 건강한 숲을 이루고 있으니 산불이나 병해충에도 잘 견딜 것이다. 남쪽 사면에 피라미드처럼 솟은 이 산에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낙엽 밟는 소리는 사각사각 더 크게 들린다. 근래에 동해안 지방은 연일 건조주의보가 내려 화재에 취약한 시기다.
영남알프스 실루엣. 왼쪽부터 영축·재약·신불·천황·간월·능동·가지산자락.
참나무 종류 가운데 특히 굴참나무는 껍데기가 아주 두꺼워 산불에 강하다. 코르크층 때문에 내화성 수종으로 알려졌다. 이런 쓸모 있는 나무를 잡목으로 취급하고 도토리를 채취하거나 숯으로 썼지만, 노르만인은 육중한 용골의 참나무 배 ‘라댜lodya’를 만들어 대양을 제패했다. 북반부에는 대부분 참나무가 자라므로 지구의 당산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대략 30%가 참나무 숲이다. 이 산의 참나무들을 바라보면 왠지 먹먹해진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우리 선조들.
12시 45분, 키 큰 나무 사이 지그재그 길을 따라 올라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바람이 훼방 놓는다. 대신 신갈·굴참·산벚·낙엽송·서어·소나무에게 묵언을 청해 본다. 신통찮은 듯 불통,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다. 추운 날 겨울 해는 짧고 벌써 맞은편에서 내려앉은 햇무리, 산 그림자는 솟구쳐 길게 누웠다. 웅장한 산들의 실루엣. 왼쪽부터 영축산(1,081m)·재약산 수미봉(재약산1,119m)·신불산(1,159m)·재약산 사자봉(천황산 1,189m)·간월산(1,069m)·능동산(983m)·운문산(1,188m)·가지산(1,240m).
밀양 산내, 청도 운문, 울산 울주·상북 등 낙동정맥 아랫자락에 솟은 1,000m급 7~9개의 거대한 산들을 일컬어 영남알프스라 부르는데 가지산이 최고봉이다. 광활한 고원지대에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고 쌀바위 능선 구간은 온갖 모양의 바위, 석남사를 비롯한 얼음골과 폭포가 어울려 영남의 으뜸 산군山群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은 논란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의 북알프스(혼슈의 기후岐阜·도야마富山·나가노현長野縣에 걸쳐 있는 3,000m급 히다산맥)와 비슷해서 일본인들이 지었다고 전한다. 사대주의적 명칭이라 얘기하기도 한다.
고헌사 위로 보이는 정상.
올라갈수록 푹푹 빠지는 낙엽 쌓인 숲길에 군데군데 바위와 돌, 간간이 시꺼먼 때죽나무도 어울려 자라고 해발고도가 높아도 수림대樹林帶는 일정하다. 이 산의 정기를 받아 도전과 성공의 역사를 새로 쓰길 다짐하는데 갑자기 심술궂은 바람이 화들짝 모자를 벗겨 날린다.
오후 1시 너럭바위에 잠시 섰다가 오르막길 쌓인 낙엽에 미끄러졌다. 지금부터 바위지대. 꼭대기 오를수록 당단풍나무는 손이 시린지 주먹을 꼭 쥐고 섰다. 곧장 석벽의 병풍바위를 만난다. 바로 앞 넓은 바위에 앉아 쉬기 좋지만 지나간다. 햇살은 배낭 위에 얹혀 따라오고 바람은 더 심술궂게 모자를 벗긴다. 발아래 그림자는 나뭇잎을 덮는다. 곧추선 산세에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종아리 얼얼하고 이 엄동설한에 땀을 뚝뚝 흘리니 고헌산은 이름값을 한다. 1시 반경, 키 작은 신갈나무, 노린재나무가 모여 있는 것 보니 다 올라온 듯, 드디어 정상의 돌탑에 닿는다.
고헌산. 낮아 보이지만 1,000m 급이다.
낙동정맥과 동봉의 전설 고함산
1,034m 고헌산 정상(외항재 3.3·소호령 2·고헌사 2.8km). 저 멀리 바라보이는 낙동정맥 백운산으로 이어진 마루금은 장쾌하게 뻗었다. 그 너머 검푸른 동해. 경주, 울산, 양산, 부산까지, 반대쪽으로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봉우리들이 모여 있는 산의 무리, 거대한 산군이 눈앞에 있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 태백 구봉산에서 백병산, 통고산, 백암산, 주왕산, 가지산, 금정산 등을 거쳐 부산 몰운대에 이르는 대략 370km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고헌산이 영남알프스의 시작이며 분기점이다.
정상 부근에는 고원처럼 넓게 펼쳐진 평원, 언양·두서·상북과 경주 산내 경계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샘과 폭포, 골짜기를 품고 있으며 태화강·밀양강 발원지. 특히 동봉 산불감시초소 아래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용샘이 남아 있다. 옛날 어떤 청년이 밧줄에 매달려 바위에서 버섯을 따는데 지네가 밧줄을 끊는 것을 보고 고함을 질러 목숨을 구했다 해서 고함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비슷한 전설이 설악산 대승폭포에도 있다.
고헌산의 ‘헌’자를 ‘언’자로 발음해 만든 지명이 언양이듯 읍내에서 고헌산을 보면 우뚝 솟아 더 웅장하다. 산행은 남쪽의 신기마을 쪽에서 원점회귀 코스로 알려졌지만 수년 전부터 서쪽 외항재에서 더 많이 오른다. 외항재는 상북면 덕현리에서 소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교통이 불편해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 이벤트에 참여하는 동호인이 늘면서 새로운 들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외항재에 도착했다면 정상에서 되돌아가야 한다. 반면 신기마을은 고헌산의 들머리로 서봉, 정상, 동봉 등으로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등산로 입구
지리산 천왕봉 조망하기 좋은 곳이 산청의 웅석봉이라면 팔공산 비로봉 조망은 면봉산, 고헌산에서는 영남알프스 봉우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설악산 귀때기청봉의 바람을 닮아선지 귀때기가 시려 얼얼하다. 1시 35분, 서쪽으로 가지산, 운문산, 앞에 작은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어도 왔던 길로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미끄러운 내리막길, 오후 2시경 병풍바위와 너럭바위를 두고 연신 낙엽에 미끄러진다. 돌부리에 채여 엎어지며 나뭇잎 수북한 골짜기 따라 하염없이 내려선다.
오후 3시경, 호젓한 산길을 따라 절집으로 거의 다 내려오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산신각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면 정상이 가깝게 보이지만 무려 3시간 걸렸다. 올라갈 때는 바람이 등을 떠밀고 내려올 때는 일행이 등에 기대 내려온 산.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기 더 어려운 산임을 실감한다. 한참 산꼭대기를 쳐다보는데 절집의 보살은 쇠말뚝을 박아달라며 다가온다. 개를 왜 묶느냐고 물으니 ‘악바리 산’이라고 산을 가리킨다. 염불하듯 개 짖는 소리 계곡의 바람을 깨운다.
참나무 와 바위길.
산행길잡이
고헌사 주차장 – 등산로 입구 – 참나무 바위길 - 너럭바위 – 병풍바위 – 고헌산 정상 – 병풍바위 – 너럭바위 – 고헌사 주차장(원점회귀)
※ 왕복 5.6km·3시간 정도
교통
경부고속도로 언양IC(하차) → 언양 읍내 → 자동차 전용도로 (밀양 방면) → 고헌사 주차장
※ 내비게이션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신기1길 149(궁근정리 산112) 고헌사
※ 주차장 무료, 대중교통 불편
숙식
언양 읍내, 울산 시내 등지에 다양한 식당과 모텔이 많음.
주변 볼거리
영남알프스, 등억온천, 석남사, 반구대 암각화, 언양읍성 등.
병풍바위.
★오늘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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